[송마나의  시절인연] 보로부두르, 공(空)의 자리 

2025-10-17     송마나 작가
해당 삽화는 생성형 AI를 통해 제작했습니다.

유달리 무더웠던 여름 낮이 짧아지고 밤이 길어졌다. 한밤중 홀로 깨어 창밖을 바라보니 멀리 깜박이는 빌딩 불빛이 외롭게 느껴졌다. 건물이 외로울 리 없겠지만 내 마음이 외롭기 때문일 것이다. 외로움은 나만의 감정이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는 실존의 현상이다. 외로움이든 고독이든, 그것은 상실과 결핍에서 비롯된 허무가 아니겠는가. 

까닭 모를 허전함에 잠겨 있는데 며칠 전 신문에서 보았던 보로부두르 사원 성지순례 광고가 떠올랐다. 거대한 사원의 품에 안기고 싶었다. 컴퓨터를 켜고 족자카르타로 가는 비행기와 사원 정상까지 오를 수 있는 티켓을 예매했다.

족자카르타의 새벽하늘은 뿌옇고 탁했다. 택시를 타고 사원에 도착하니 이미 많은 사람이 안내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보로부두르는 예약한 관람객만이 정해진 시간에 가이드의 인도를 받아 사원에 올라 참배할 수 있다. 나는 첫 번째 팀에 합류했다. 

우거진 나뭇잎 사이로 사원이 조용히 모습을 드러냈다. 햇빛이 쏟아지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오랜 세월 길 위를 떠돌다 고향에 돌아온 듯 그리움과 안도감이 온몸에 사르르 번졌다. 

보로부두르 사원은 우주 전체를 돌로 형상화한 법계(法界)였다. 먼 옛사람들이 쌓아 올린 거대한 석조 구조는 세계의 한가운데 솟아오른 수미산이며 우주를 펼쳐 낸 만다라였다. 사원 정상으로 오르는 계단은 인간 내면을 향한 수행의 길로 다가왔다.

사원의 맨 아래는 사각 벽으로 닫혀 있었다. 그곳에는 인간의 욕망과 번뇌를 그린 부조가 숨겨져 있다고 한다. 어쩌면 우리 마음속 깊숙이 감춰진 탐(貪)·진(瞋)·치(癡)를 상징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돌계단을 따라 오르니 사각 회랑이 4층으로 이어졌다. 벽면마다 정교하고 아름다운 부조가 새겨져 있었다. 부처님의 생애와 전생 이야기, 중생의 고통과 보살의 발자취가 한 장 한 장 펼쳐지듯 드러났다. 나는 그 길을 천천히 걸었다. 돌 속에서 설법이 흘러나오는 듯했다. 

사각 층을 벗어나 원형 테라스로 올랐다. 세 겹의 테라스에 반투명한 스투파 72기가 빙 둘러 있었다. 그 속에는 각기 다른 모습의 부처상이 모셔져 있다고 한다. 

나는 두 손을 모으고 스투파 안을 들여다보았다. 햇빛이 스투파 격자 구멍을 뚫고 쏟아져 눈부셨다. 스투파들을 오른쪽으로 한 바퀴 돌며 안을 들여다보아도 불상이 뚜렷이 보이지 않았다. 그럴수록 나는 스투파의 작은 구멍에 더 매달렸지만 그 안의 불상은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아, 이 먼 길을 와서 부처님을 뵐 수 없다니….’ 낙담한 눈빛으로 정상에 우뚝 선 거대한 스투파를 바라보았다. 그때 “너는 인간이 만든 내 형상을 보려고 이곳에 왔느냐?”라는 음성이 들리는 듯했다. 맨 꼭대기 스투파는 불상 없이 텅 비어 있었다. 

그 공(空)의 자리는 돌로 빚은 부처님의 형상이 있는 곳이 아니었다. 내 마음속 외로움과 허무를 비워 내고 내가 부처로 서야 할 자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