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소연의 수행 다이어리] 마음에게 대상 주기

19. 사마타 수행의 핵심 1

2025-10-03     강소연/ 중앙승가대 교수
전면의 집중점이 잡히면, 부단히 그곳에 집중을 유지한다. 그러면 빛이 발생하게 된다. ©강소연 

마음은 끊임없이 대상을 찾는다. 그 이유는 마음은 대상 없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마음의 성품이고, 마음이 살아남는 방식이다. 그래서 부단히 여기저기 집착의 대상을 바꿔가며 스스로를 유지한다. 마음의 변화무쌍함은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원숭이 또는 날뛰는 망아지[心猿意馬]’에 비유된다. 또 부정적인 마음의 전개는 매우 위험하기에 ‘술 취한 코끼리’에 비유되기도 한다. ‘심우도(또는 십우도, 깨달음의 과정을 소와 동자에 비유해 10단계로 그린 그림)’에는 ‘미쳐 날뛰는 검은 소’가 등장한다. 이는 오염된 마음의 거친 흐름을 비유한 것이다. 고삐 풀린 소는 제멋대로 거세게 날뛰며 주변의 풀들을 짓밟는 줄도 모르고 나와 남을 해치고 있다. 

마음의 날뜀, 가장 큰 방해꾼

수행의 가장 큰 방해꾼은 ‘마음의 부유(이리저리 떠돌아다님)’이다. 그냥 놔두면 끝 간 데 모르고 참으로 다양한 변주의 집착과 번뇌 망상을 만들어 낸다. 마음은 계속해서 대상을 바꿔 가며 집착을 일으킨다. 그것은 ‘항상 변화 중’에 있다는 현상으로 드러난다. 얼마나 정신이 없는지, 예를 들면 하나의 슬픔이라는 감정이 채 가시기도 전에 벌써 완전히 다른 생각이 끼어든다. 또 하나의 반찬을 탐해 그것을 목에 넘기기도 전에, 이미 마음은 다른 반찬에 가 있곤 한다. 일어난 마음에 집착이 들러붙는다고 치면, 벌써 마음은 또 다른 대상으로 옮겨 가고 있는 중이다. 

특히 몸이 움직이지 않을 때(누워 있거나 좌선하고 있는 경우 등), 생각은 더욱 치성하게 움직인다. 마음은 지극히 사소한 자극(촉으로 인한 느낌)에도 기존에 닦아 놓은 습(習: 되풀이로 인해 버릇으로 정착된 고질적인 에너지 패턴)대로 순식간에 길을 가 버린다. 이때 알아차림으로 인한 분리가 없다면, 이 같은 ‘마음의 작용’에 ‘나’를 동일시하게 되고 나는 마냥 휘둘리게 된다.

고통을 스스로 즐기고 있다?

마음은 잔인하게도 내용을 상관 하지 않고, 파장 또는 진동이 가장 컸던 기억을 떠올려 생존하기를 즐겨 한다. 그래서 숙주(기생물체에게 영양을 공급해 살게 하는 주인체)인 내가 고통을 받건 안 받건 상관하지 않는다. 가장 자극적이어서 가장 힘들었던 파장의 기억과 감정일수록 대환영이다. 큰 파장으로 스스로를 생존하게 할수록, 살아 있다는 재미를 만끽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석가모니 붓다께서는 무명 속 중생이 “고통을 스스로 즐기고 있다”라고 말씀하신 바 있다. 습관이란 무섭다. 습관이 되면 거적때기도 비단 이불보다 편안하게 느껴진다. 습관이 되면 우울과 슬픔과 알코올의 구정물도 내가 안주하는 거주처가 된다. 

이렇듯 한번 일어난 것이 스스로를 있다[有]고 착각해[無名] 그것을 유지하려는 성품을 자성(自性)이라고 한다. 한 번 일어났던 생명, 한 번 일어났던 마음, 한 번 일어났던 분노, 한 번 일어났던 탐욕, 한 번 일어났던 슬픔 등은 업식으로 내장돼 다시 한 번 그것이 일어날 조건이 되기만을 호시탐탐 기다린다. 그리고 ‘특정 조건’이 형성돼 마음이 다시 촉발하는 즉시, ‘갈애와 염오’라는 ‘집착’을 더해 스스로를 더욱 강화한다. 

여기서 ‘특정 조건’이라는 인(因)이 되는 것은 대부분 ‘수(受: 느낌)’이고, 수는 다시 ‘촉(觸: 닿음, 부딪힘)’을 인(因)으로 하여 일어난다. ‘촉’은 육근과 육경의 만남을 가리킨다. “알아차림하는 부처님의 제자는 느낌을 알고/ 느낌(이 어떻게 비롯되는지) 그 기원을 알며/ 어디서 느낌이 그치는지/ 그리고 느낌의 멸진(滅盡)으로 이끄는 길을 아느니라/ 느낌의 멸진에 다다랐을 때 비구는 갈증이 풀려 열반을 성취한다.(<쌍윳따 니까야>)”라고 붓다께서는 설하신 바 있다. 즉, 느낌 관찰[수념처受念處]만 잘해도 그것을 인(因)으로 유발되는 상(想)-행(行)-식(識)의 전개를 소멸할 수 있다.      
마음에게 끊임없이 ‘바른 대상’ 던져 주기     

그래서 이러한 마음의 성품을 간파했다면, 부질없는 마음의 작동에 휘둘리기 전에, 선수를 쳐야 한다. 선수 치는 방법은 석가모니 붓다께서 이미 가르쳐 주셨다. 마음에게 ‘바른 대상’을 주는 것이다. 이것을 ‘정정(正定: 팔정도의 하나로 어지러운 마음을 고요하게 안정시키는 것)’이라고 한다. “마음을 한곳에 집중하라!(<관무량수경>)” 불안과 죽음의 고통 속에 울부짖는 위데휘 부인에게 붓다께서 하신 말씀, 아니 (거의) 명령이다. 그렇다면, 마음을 어디에 집중해야 하는가? 무엇이 바른 집중 대상인가?(지난 연재② 참조) <관무량수경>에는 석가세존께서 극락으로 가는 집중 대상을 하나하나 던져 주시는 내용(16관법)이 나온다. 바른 집중 대상에 마음을 묶어 두는 것, 이것이 사마타 수행의 핵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