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묻는 이에게]죽는다 산다를 떠나서 자기 주인공을 믿고 맡겨 놓으라
말 한마디를 해도 한데 떨어뜨리지 말라 똥 마려우면 그냥 변소에 가서 똥 누듯이 그냥 나오는 대로 용도에 따라 거기에 되돌려 놓는 것이 바로 수행에 있어서 첨단의 길입니다.
지난 호에 이어서
지옥이라는 것이 다른 게 아닙니다. 인간의 의식을 가지고 살다가 짐승의 탈을 써 보십시오. 개 탈을 썼다 이럴 때 내가 아무리 속으로 ‘내가 사람이다’ 하고 사람의 말을 해도 개가 짖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게 개 탈을 썼으니까 개로 대접하지 사람으로 대접을 해 줄 수가 없지요. 한 가지 예로 표현을 할 때 말입니다. 그처럼 아무리 사람의 의식을 가졌다 하더라도 고양이로 태어났거나 독사로 태어났다면, 사람의 의식으로 아무리 말을 한답시고 지저대고 찍찍거려 봤자 그것은 뱀의 소리고 벌레의 소리고 개의 소리일 뿐입니다. 그러니 그거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그게 지옥입니다. 지옥이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그렇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천차만별로 말입니다.
그저 여러분은 무서운 줄 모르고 말도 함부로 하고, 화나는 대로 그냥 내뱉습니다. 자식이 속을 썩이면 “아이, 저놈 급살이라도 맞아라.” 한다든가 “너는 깡통밖에 못 찬다.” 한다든가, 이렇게 함부로 말하고 생각도 없이 말을 해도 그것이 입력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태교가 귀중하다고 하는 겁니다. 내가 나쁘게 생각하면 생각하는 대로 이 속에 들어 있는 수십억의 업식들이 다 그렇게 따라갑니다. 병원에 가서 진찰을 했는데 ‘병명이 이러니까 우리도 인제는 어찌할 수 없다’ 하니까 ‘아이구, 인제 난 죽었구나.’ 이런 생각이 들면서 그 선고를 그냥 100%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그대로 입력이 되니까 그대로 될 수밖엔 없는 겁니다. 아이한테도 “깡통을 차려고 그러느냐? 너, 공부할 시기에 공부를 안 하면 넌 항상 어려움을 면치 못할 것이다.” 하고 막 욕을 해 댔는데, 나중에 그대로 됩니다.
그래서 입력이라는 것이 무서운 겁니다. 자식들에게나 부모에게나 부부지간에 말을 함부로 하는 것이 모두가 그대로 입력이 돼서 그대로 현실에 나오는 겁니다. 알고 하는 거는 알게 나오기 마련이고 모르고 하는 거는 모르게 나오게 돼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 한마디, 생각 한 번, 행동 한 번 하기가 어렵다 이겁니다. 부처님께서 “말 한마디를 해도 한데 떨어뜨리지 말라.” 하셨습니다. 어떠한 문제가 잘못됐든 잘됐든 간에 여러분이 한생각으로써, 잘됐으면 감사하게 놓고 안된 거라면 ‘거기서 안된 것이 나온 거니까 잘 돌아가게 할 수 있는 것도 거기다.’ 하고 되돌려 놔야만이 인생의 근본적인 공부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도 이름해서 말입니다.
부처님 발을 왜 평발이라고 했을까요? 하다못해 지렁이 발도 부처님 발 아님이 없기 때문에 평발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럼 지렁이 발이 어딨느냐고 하시겠죠? 하여튼 풀 한 포기만 살아 있어도 부처님은 항상 계신 겁니다. 부처님이 삼천 년 전에 나셨다가 열반하셔서 이제는 안 계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이렇게 계시는 한 부처님은 항상 계시는 거죠. 일체제불이 다, 여러분의 한생각에 찰나에 들고 찰나에 나십니다. 왜 보이는 물질적인 것만 생각을 하고 50%에 매달려서 그렇게 허덕입니까. 정신계와 물질계가 같이 작용을 하고 돌아가는 100%의 한세상을 말입니다.
우리가 앞으로 정신계의 50%를 알지 못한다면, 우리가 서로 둘이 아님을 깨닫지 못한다면 점점 발전력과 창조력이 약해질 겁니다. 과학이 발달이 되었다 하더라도 그건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의학적으로 의사, 박사들이 어떠한 것을 알아내서 못 고치는 병들을 고친다 하더라도 그것은 일시적이지 완전히 병을 고치는 것은 아닙니다. 병만 고치는 것이 부처님 법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병고를 호소하면 그 병고를 바로 공부할 수 있는 재료로 삼고 공부하라고 가르칩니다. 병고만이 아니라 애고라든가 모든 걸 말입니다. 만약에 의사, 박사들이 심사숙고해서 연구를 하고 새로운 치료법을 발견해서 불치병을 고친다고 하더라도 다시 병고의 싹이 나오게 됩니다. 어디서 어떻게 돼서 어떠한 관계로 인해서 그 병이 온 줄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병뿐만이 아닙니다. 이 공부 하시는 여러분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몸에 병이 안 들었다고 해서 병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즉 말하자면 마음의 병이죠. 마음의 병을 놔야 자유자재할 수 있는 겁니다. “아무리 천지를 한 찰나에 다 본다 하더라도 도가 아니니라. 가고 옴이 없이 가고 온다 하더라도 도가 아니니라. 과거의 숙명을 아주 꿰뚫듯이 알아도 도가 아니니라. 또는 타심을, 명백히 남의 속을 안다고 해도 도가 아니니라.” 하셨습니다.
우리가 촛불을 하나 켜려면 초, 심지, 성냥, 켜는 사람이 합쳐져야 됩니다. 그런데 그 마음 하나에서 천차만별의 법이 들고 나는 겁니다. 그걸 어떻게 말로 다 하리까. 그러니까 여러분의 마음이, 바로 자기 마음을 다스리되 절대 내 탓으로 돌려야지 남의 탓으로 돌려서는 안 된다 하는 겁니다. 그렇게만 한다면 얼마 안 가서 바로 자기 자성 부(父)를 만날 것입니다. 자(子)와 자성 부가 같이 상봉을 해야 그때부터 진짜 공부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름해서 평등공법이요 수레공법이요 활궁공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그 세 가지도 따로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부처님께서 49년 설하시면서 일러 주신 이 길을 똑바로 아시고 똑바로 길을 걸어야 합니다. 과거에 어떠한 업이 있다 하더라도, 망상이 수없이 나온다 하더라도, 하늘이 무너지는 병고가 생겼다 하더라도 눈 하나 깜짝하지 말고 다 제자리에다 되돌려 놓는 수행을 하십시오. 그러면 가정도 이끌어 나갈 수 있고 화목하게 할 수도 있고, 묵은 빚도 갚고 햇빛도 줄 수 있고, 나를 발견해서 이 세상 우주 삼라대천세계를 끌어다가 볼 수 있는가 하면 알 수도 있고, 가고 옴이 없이 가고 올 수 있고, 멀고 가까움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그거를 다 안다 하더라도 도가 아니니라.” 하셨던 것은, 우리가 목마른 사람한테 물을 줄 수 없고 자기가 목마른데 먹을 수 없다면 그건 도가 아니다 이겁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겁니다.
그래서 신도들이 찾아와서 어디가 어떠니 어디가 어떠니 이럴 때에 나는 내 대답을 들으려는 생각을 하지 말라고 그럽니다. 그냥 그대로 말을 하고 가면, 듣는 사람과 말하는 사람이 양쪽의 전깃줄과 같으니까, 부처님 법에 의해서 전깃줄이 딱 붙게 됩니다. 사람이 전깃줄을 갖다가 붙이듯이 하는 게 아니라, 마음은 체가 없기 때문에 듣는 사람과 말하는 사람의 마음이 통하면 그냥 와서 쩔꺽 붙게 돼서 하나로 되면서도 하나도 없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불이 들어오게 돼 있습니다.
그러니까 불만 들어왔을 뿐이지 양쪽의 전깃줄은 내가 했느니 네가 했느니 할 수가 없는 겁니다. ‘내가 해 줬다, 내가 했다’ 이럴 수가 없는 겁니다. 이게 부처님 법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내가 한 마디도 한 예가 없고 내가 마음을 낸 예도 없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했다. 나다, 내가 이만치 배웠으면 됐지’ 이렇게 생각을 한다면 오산입니다. 그리고 배우는 사람이 ‘여자다 남자다, 동쪽이다 서쪽이다, 높다 낮다, 이게 정법이고 저게 사법이다’ 이런 것을 따진다면 벌써 깨달음과는 천리만리 멀어지는 겁니다. 풀 한 포기도 나 아님이 없다고 하신 말씀을 생각할 때 어느 거 하나 내 스승 아닌 게 없고 내 아픔 아닌 것도 없는데 어찌 ‘이것이 먼저다 저것이 나중이다, 이것이 틀렸다 그것이 잘됐다’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점수와 돈오도 없다. 둘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선과 교가 둘이 아니다. 넓게 본다면 이 모두가 둘이 아닌 까닭을 알 것이다. 수억겁을 거쳐 진화되면서 찰나에 화해서 자꾸자꾸, 구름이 모였다 흩어지고 흩어졌다 모이듯이 이렇게 거쳐 와서 여기까지 온 것을 알 것 같으면 네 자식 내 자식 내 부모 네 부모 이렇게 따질 것도 없다.’ 이랬습니다. 이렇게 엄청난 도리가 있는데 어떻게 단순하게 그냥 요 앞의 것만 생각하고 살 수가 있겠습니까. 인간으로 태어났으면 그냥 갈 수는 없죠. 절대 그냥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까 얘기했죠. 부처님은 지금까지도 가르치고 계십니다. 물은 자기같이 살라고 하고…, 그게 전부 부처님이 가르치시는 겁니다. 팔만대장경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 세상 돌아가는 자체가 모두 팔만대장경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에서 살림하는 것도, 좌선이다 입선이다 와선이다 행선이다 하는 것도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모두가 참선입니다. 좌선을 하는 것만 참선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거는 무척 잘못된 일입니다. 앉았다 일어나면 선은 끊어지니까요. 질문하실 거 있으면 질문하세요.
질문자1(남) 생과 사가 둘이 아니라는 것을 제가 바로 알고 있는지 큰스님께서 들으시고 좀 가르쳐 주시면 좋겠습니다. 저희 중생들은 몸에 중생심이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몇십억이 되는지는 모르지만 이 중생심을 하나로 통일시켜서 그 중생심이 가지고 있는 탐진치나 분별심에 의한 착을 한마음 자리에 되돌려 놓고, 억겁을 쌓아 온 선업 악업도 다 제자리에 돌려놓아서 지혜가 자꾸 밝아지면 모든 고에서 벗어나 자유인이 되어 해탈한다. 소위 중생이 해탈한다는 그것이 곧 부처 자리에 간다는 것이다.’ 이렇게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의 진리에서는 태어남과 죽음, 즉 생멸이 없는 걸로 저는 이해를 하고 현재 그렇게 알고 있는데, 우리 불자님들과 간혹 이야기를 하다 보면 “사람이 나서 살아간다는 건 곧 죽어 가는 거니까, 생과 사를 합해 가지고 시공을 초월했을 때 하나의 찰나니까 이것이 생사가 둘이 아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데 어느 것이 맞는지요? 만약에 제가 방금 말씀드린 전자가 맞다면, 생멸이 없다는 그 자체는 열반경지에 가신 분만 아는지,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알고 있는 것을 저희 중생들이 마음으로라도 좀 더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지 질문하고 싶어서 나왔습니다.
큰스님 서울에서, 즉 시발점에서 차를 타고 부산에 왔습니다. 부산을 왔는데, 종점에서 내렸다고 생각했는데 종점이 아니라 또 시발점이 되더랍니다. 그러니까 종점과 시발점이 둘이 아닌 까닭에 모두가 그냥 일분일초도 쉬지 않고 돌아갑니다. 영원히 말입니다. 그러니까 서울에서 부산을 왔다가 그냥 있어야만이 죽는 것인데, 부산에 왔다가 도로 타고 도로 가야 되고요, 갔으면 또 와야 되고 왔으면 또 가야 되고, 이러니 살아나온 것이 따로 있습니까? 또 죽어 갈 것이 따로 있습니까?
질문자1(남) 생과 사가 둘이 아니라는 것에 대해서 방금 설명을 하셨는데, 저희들이 나고 죽고 또 나고 이렇게 윤회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태어남과 죽음은 열반경지에 가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큰스님 방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내가 늙어 죽어야 가고 오고 이런다’고 생각하는데 그게 아닙니다. 마음은 정신계와 물질계를 한 찰나에도 들고 한 찰나에도 나고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둘이 아니게 그냥 그대로 한 찰나에 나고 한 찰나에 들고 이러시기 때문에, 아예 죽고 사는 생사를 벗어난 분이죠.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도 부처님의 길을 따라서 자기가 못났든 잘났든 자기 마음속에서 자기를 찾아야 됩니다. 찾는 게 아니라 본래 있기 때문에 발견하는 겁니다. 그걸 발견을 해야 생사가 둘이 아닌지 어떤지를 알게 되지 말로는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질문자2(남) 오늘 이 좋은 날 주옥 같은 큰스님의 법문을 듣고 질문까지 하게 되어 본인으로서는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제법무아, 제행무상, 일체개공, 열반적정. 오늘 이 KBS홀에 만장하신 여러분께서는 일체의 고해를 넘어서서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을 해서 열반의 경지에까지 가도록 수행을 해야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큰스님께서 말씀하시는 한마음 주인공과 해탈을 해서 열반하는 그 수행과 둘이 아니고 하나라는 도리를 저희들이 잘 알 수 있도록 다시 한번 설명해 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큰스님 원자에서 입자가 많이 생길 수 있는 것처럼 한마음은 이 생각 저 생각, 이런 말 저런 말, 헤아릴 수도 없는 것을 다 포함하고, 이 우주 전체를 다 싸안으라 해도 싸안을 수 있습니다. 아까 직결되고 가설이 돼 있다고 그랬죠? 그러니까 모든 것은 자기 혼자가 아니라 천체가 같이 돌아가고 있습니다. 나무는 산소를 저장했다가 인간에게 주고 인간은 이산화탄소를 내주듯이 그렇게 서로 주고받으면서 공생, 공용, 공체, 공식화하고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주인공’ 하면 일체가 다 귀합이 되는 것입니다. 귀합이 돼서 나 너가 없이 돌아가는 것을, 즉 말하자면 ‘공이 색이고 색이 공이니라.’ 하는 거와 똑같이 ‘주인공’ 하면 이름해서 주인공이지 없는 것을 뜻합니다.
똥 누러 갈 때는 아무 생각 없이 가서 똥을 누죠? ‘똥을 눠야 하나, 안 눠야 하나?’ 이런 생각이 없이 똥 마려우면 그냥 변소에 가서 똥 누듯이, 그냥 나오는 대로 용도에 따라 거기에 되돌려 놓는 것이 바로 수행에 있어서 첨단의 길입니다. 그래, 생각해 보십시오. 못하든 잘하든 자기네들이 하고 있지 딴 사람이 해 줍니까? 안 그렇습니까? 못하든 잘하든, 망하든 흥하든 자기가 했습니다. 자기가 한 거를 ‘이 몸뚱이 내가 한 게 아니라, 주인의 심부름꾼이 한 게 아니라, 이 심부름꾼은 심부름만 했지 주인이 한 거로구나.’ 하고 거기다가 맡겨 놓으십시오. 주인과 심부름꾼이 둘이 아닌 까닭에 주인공입니다.
그러니까 되맡겨 놓으면 벌써 마음이 편안해질 뿐만 아니라 가정이 화목해지고, 잘못돼 나가던 애들이 벌써 유순해지고 부모의 의견을 존중하게 됩니다. 또는 애들이 잘못되지 않게 해 줄 수 있는 여건이 실천으로 나옵니다. ‘우리 생활이 참선이다’ 하는 것은 그렇게 나오는 것을 그대로 거기다가 맡겨 놓고, 되돌려 놓고 지켜보고 체험하는 것을 말합니다. 참선이 달리 있는 게 아닙니다. 거기다 맡겨 놓고 지켜보고 체험하는 것이 참선이 무르익어 가는 과정입니다.
그러니까 누구든지 못났든 잘났든 자기 주인공에다 모든 걸 되돌려 놓고 지켜보는데, 잘되는 건 감사하게 되돌려 놓고 안되는 건 ‘안되는 것도 거기서 나온 거니까 되게 할 수도 있다.’ 하는 믿음으로 거기에다가 되돌려 놓으시면 앞으로 살아나가면서 극한적인 괴로움은 벗어날 겁니다.
질문자3(남) 저는 두 가지 질문을 하겠습니다. 탐진치 삼독과 번뇌 망상심, 이런 도리는 제가 알겠는데요, 병고의 문제에 대해 조금 전에 스님께서 ’그 모든 병고가 공부거리로 나와 있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는데 공부감이라고 하기에는 그 자체가 너무나 가혹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병고에 대한 이치를 조금 더 말씀해 주십시오.
큰스님 여러분이 그렇게 모습으로 보고 모습으로 생각을 하니까 그렇지 체가 없는 마음자리로 본다면 그게 아닙니다. 어떠한 병고가 닥치더라도, 즉 말하자면 하늘이 무너지고 금방 죽는다 하더라도 믿는 사람은 태연합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을 믿지 않고 뭘 믿습니까. 허공을 믿겠습니까, 형상을 믿겠습니까? 또는 이름을 믿겠습니까, 스님들의 고깃덩어리를 믿겠습니까? 뭘 믿겠습니까?
그러니까 자기 주먹을 믿듯이 자기를 끌고 다니는 자기 운전수를 믿어야 합니다.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오늘 이렇게 끌고 다니는 겁니다. 수억겁을 통해서 말입니다. 그러니까 진짜로 믿으십시오. 죽어도 거기요 살아도 거기니까, 금방 죽는다 하더라도 죽는다 산다를 떠나서 거기를 믿고 거기다가 맡겨 놓으세요. 믿는 것은 그렇게 살리는 것만을 목적으로 믿는 게 아닙니다. 죽는 거 사는 걸 다 놓을 수 있다면, 그냥 그렇게 맡겨 놓으신다면,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아마 자기 소망대로 될 것입니다.
질문자3(남) 네. 잘 알겠습니다. 또 한 가지는요, 우리가 사주나 관상이나 미래학을 볼 때에 흔히들 생년월일과 시(時)를 넣어 줘야 그게 나온다는 것을, 제가 직접 가 보진 않았습니다만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사바세계에서 우리가 행한 업이 생멸의 시와 어떤 관계가 있기에 꼭 생년월일, 시를 넣어야 그게 나오는 건지 그것이 알고 싶어서 질문을 드립니다.
큰스님 시를 넣을 것도 없고 뺄 것도 없고, 이름을 넣을 것도 없고 뺄 것도 없는 도리가 바로 부처님 도리입니다. 그러니까 아까 얘기했지 않습니까? 어떠한 문제든지 거기다 되돌려 놓으라고요. 뭐, 이사 날짜가 나빠서 어떻고, 삼재가 들어서 뭐가 어떠니저떠니 하면서 죽을까 봐 겁내지 말고 모든 것을 거기에 놓으세요. 또 한편으로 볼 때, 내가 이날 이사 간다 했으면 그날이 좋은 날이에요. 그리고 삼재가 들어서 뭐가 어떠니 뭐가 어떠니 이렇게 생각을 하니까 그게 입력이 돼서 꼭 그렇게 되죠. 그러니까 그렇게 안 되도록 마음을 잘 쓰시라 이겁니다.
질문자3(남) 예, 잘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위 법문은 대행 선사 법문집 ≪허공을 걷는 길≫ 중 1992년 10월 11일 국내지원법회 법문을 정리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