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오테크놀로지, 불교로 읽다] 20. 수식관의 호흡수행
원천적 수행으로 돌아가라 몸과 마음의 부실이 조급함 이끌어 수식관 수행은 거친 마음 부드럽게 호흡에 집중하면 안정 찾고 몸 충전
과학지상주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 나노 테크닉과 양자 역학이 보여 주는 경이로움, 인공지능의 발달 단계가 초래할 신세계의 모습, 이러한 과학 기술의 양상은 위기감과 불안증을 일으키기도 한다. 그래서 일말의 공포감이 느껴진다. 삶 자체가 위험하여, 두려움 없는 ‘무유공포’로 인도하는 ‘원리전도몽상’의 선언이 과연 무색한 것은 아닐까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이럴 때일수록 원천적 수행으로 돌아가는 것이 상책이다.
초기불전에서 소박하게 제시되는 수식관의 호흡수행은 ‘정신을 오로지하여 안반(安般)을 생각하는 것’으로 규정된다. 구체적으로는 ‘숨이 길 때는 지금 숨이 길다고 관(觀)하여 알고, 숨이 짧으면 마땅히 지금 숨이 짧다고 관하여 알며, 만약 숨이 지극히 차거나 지극히 뜨거우면 마땅히 숨이 차고 뜨겁구나 하고 관하며, 드나드는 숨의 길고 짧음을 분별하고 헤아려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 수식관이 다시금 강조돼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 시대는 호흡이 깊지 못하고, 천식 증세처럼 가슴이 답답한 증세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이 조급함의 원인은 몸과 마음의 부실에 있다. 마음은 욕심으로 인한 이양(利養, 이익과 명예 등)에 덮인 것이다. 중생의 몸은 근본적으로 오염된 것이다. 그래서 안으로 ‘내심무천(內心無喘)’의 자세가 다시금 강조돼야 하고, ‘외식제연(外息諸緣)’의 당당함이 회복돼야 한다는 것이다.
<치선병비요경>에서 이르기를, ‘중생들 몸의 근본 종자는 다 더러운 것’이고, ‘이양을 바라는 것은 사람의 몸을 해치고 선근을 못 쓰게 하는 것’이기에, ‘수식관의 수행으로 일심을 관하기만 하라’고 일러 준다. 이 수식관은 양약(良藥)이므로, 이 약을 복용하는 그 자체로 이로움이 있다. 궁극에는 천상과 인간의 스승이 될 만하다고 안내한다. 이 호흡을 통해 거친 마음이 부드럽게 조화를 이루게 되기에 자신의 주인이 되는 비법이라고 설명한다.
들숨과 날숨에 집중하는 것은 좌선을 행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그저 고요히 앉아 무심의 상태로 자신의 호흡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이 훈련이 깊어지면, 일상의 숨 가쁜 상황을 맞닥뜨려 지칠 때 양손을 아랫배에 얹어 두고 들숨과 날숨에 집중할 수 있게 된다. 한참 호흡에 집중하면 마음은 안정을 찾고 몸은 충전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 안반의 호흡법은 호들갑 떨면서 할 것이 아니다.
<좌선삼매경> 등에서는 호흡을 ‘수수지관환정’의 치밀한 방법으로 설명하고 있다. 숨을 헤아림[數], 호흡을 따름[隨], 생각을 멈추고 집중하는 지(止), 있는 그대로를 조작하지 않고 알아차리는 관(觀), 이 과정 전체를 하나로 되돌려 봄[還], 깊은 단계로 들어가 불순함을 제거하는 과정으로서 청정[淨] 등 여섯 가지로 섬세하게 분류하고 있다. 이 호흡법은 훗날 여섯 가지의 신묘한 방편인 육묘문(六妙門)으로 정리된다.
<마하지관>은 육묘문의 행법을 기운의 활용이라는 측면으로 제시한다. 여섯 가지의 기식(氣息)은 호흡을 우리 몸의 각 장기에 배속시키는 방법이다. 즉 장기가 냉하면 취(吹)를, 열이 있으면 호(呼)를, 아픔이 있으면 희()를, 번거로움이 가득하면 가(呵)를, 가래가 있으면 허(噓)를, 권태로우면 시()의 호흡법을 사용하라고 알려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