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성미의 심심톡톡] 차별하는 마음이 폭력의 씨앗

47. 육군비구를 제재한 부처님, 학교폭력(3) 차별-경멸-폭력의 고리 끊어야 피해자 존중하는 자비 실천 필요

2025-09-26     하성미 기자

“베트콩, 미안해.” 

당진의 한 중학교 교실에서 피해 학생이 들은 사과는 비아냥뿐이었다. 다문화 가정이라는 이유로 “냄새가 난다”, “얼굴이 왜 그렇게 생겼냐”는 조롱을 당했고, 삽에 머리를 맞는 신체적 폭력까지 겪었다. 피해 학생은 “휘두르지 말라고 했지만, 제 주변에서 더 휘둘렀고 그러다 맞았다”고 말했다. 작은 차별심이 경멸로, 경멸이 결국 폭력으로 번져 가는 과정을 보여 준 사건이다.

학교폭력은 흔히 순간적인 분노나 충동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실제로 그 뿌리를 들여다 보면, 폭력의 핵심에는 ‘경멸’이라는 태도가 자리한다. 

경멸은 타인을 존중할 가치가 없는 존재로 여기며, 쓸모없고 열등하다고 낙인찍는 심리다. 사실 경멸의 시작은 아주 작은 차별에서 비롯된다. 피부색, 말투, 가정 환경, 성별과 같은 다문화적 차이뿐 아니라, 요즘 학생들 사이에서는 성적 수준, 집안의 경제적 형편, 체격과 외모, 패션이나 말투, 심지어 좋아하는 취미나 성격적 특성까지도 차별의 근거가 된다. 존중의 대상이 돼야 할 다양성이 오히려 열등함의 꼬리표로 바뀌는 순간, 차별의 마음 자체가 이미 폭력의 씨앗이 된다. 

그리고 가해자는 자신이 더 크고 힘이 세며 잘났다는 이유로 상대를 통제할 권리가 있다고 착각한다. 여기에 또래 집단의 묵인과 사회적 교육의 부재가 더해지면, 차별과 경멸은 곧 폭력의 정당화로 이어진다. 가해자의 행동은 멈추지 않고 오히려 집단의 침묵 속에서 강화된다. 분노가 순간적 불꽃이라면, 경멸은 집단 속에서 지속적이고 체계적으로 타인을 괴롭히는 불씨가 된다.

이러한 경멸은 다양한 방식으로 드러난다. 언어적 괴롭힘은 가장 흔하고 실행이 쉬운 형태다. “냄새가 난다”, “얼굴이 왜 그렇게 생겼냐”는 말은 농담처럼 들릴 수 있지만, 사실은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언어 폭력이다. 욕설과 조롱, 성적 희롱, 가정 환경을 들먹이는 비하 발언, 인종 차별적 별명까지 포함된다. 

신체적 괴롭힘은 때리기, 밀치기, 발길질처럼 눈에 잘 띄는 폭력이다. 교과서나 소지품을 빼앗아 찢거나 부수고, 책상에 침을 뱉는 행위처럼 모욕과 위협을 동반하기도 한다. 단순한 싸움처럼 보일 수 있으나 실제로는 권력의 불균형 속에서 한쪽이 일방적으로 피해를 당한다. 피해 아동에게 남는 것은 신체적 상처만이 아니라, 다시 맞을 수 있다는 지속적인 공포감이다.

관계적 괴롭힘은 은밀하면서도 치명적이다. 따돌림과 고립, 집단적 배척을 통해 피해자를 공동체에서 지워 버리는 방식이다. “그 아이랑 어울리면 너도 이상한 애로 보일 거야”라는 말 한마디가 또래 집단에서의 지위를 무너뜨린다. 험담과 소문은 직접 들리지 않아도, 피해자는 주변 시선과 태도를 통해 자신이 고립됐음을 감지한다. 이는 눈에 보이는 멍보다 더 깊은 상처를 남긴다. 청소년기에 가장 중요한 정체성 확립 과정에서, 관계적 배제는 존재 자체가 부정당하는 경험으로 작용하며 우울과 극단적 선택으로 이어질 수 있다.

가해자의 유형은 여러 갈래로 나타난다. ‘기고만장형’은 교만과 특권 의식으로 가득 차 타인 위에 군림하려 한다. 

‘사회형’은 소문과 험담으로 대상을 교묘히 고립시키며, 겉으로는 사교적이지만 속으로는 질투와 불안에 사로잡혀 있다. ‘냉혹형’은 평소 감정을 드러내지 않지만, 괴롭힘 상황에서는 잔인하게 변한다. 또 ‘과잉행동형’은 작은 자극에도 과민하게 반응하고 책임을 전가한다.

이 밖에도 자신이 당한 상처를 약자에게 되풀이하는 ‘피해자이면서 가해자형’, 집단에 기대어 폭력에 가담하는 ‘집단형’, 전략적 동맹을 통해 세력을 넓히는 ‘조폭형’ 등 다양한 유형이 있다. 

그러나 공통점은 분명하다. 타인을 지배하려 하고 공감 능력이 결여돼 있으며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회피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타인의 고통을 통해 스스로 주목받고 존재감을 확인하려는 심리가 자리한다. 불안정한 자아가 타인을 깔아뭉개며 드러나는 또 다른 형태의 자기방어다.

부처님 시절에도 공동체 내에는 항상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육군비구(六群比丘)’라 불리던 이들이다. 이들은 출가자의 본분을 저버리고 무리를 지어 다니며 갖가지 악행을 저질렀다. 수행은 뒷전이고 더 좋은 공양을 받는 일이나 마음에 들지 않는 스님을 몰아내는 데만 몰두했다. 그들의 행동은 공동체를 흔들고 다른 이들을 상처 입히는 원인이 됐지만, 부처님은 이를 방치하지 않았다. 잘못을 피해자에게 돌리지 않고 가해자에게 책임을 물었으며 새로운 계율을 제정해 공동체가 더 건강하게 서도록 만들었다.

이 교훈은 오늘날 학교 공동체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폭력을 저지른 가해자에게는 단호한 제재와 교육이 필요하다. 동시에 또래의 침묵과 사회의 방관을 끊어내야 한다. 차별이 경멸로, 경멸이 폭력으로 이어지는 고리를 끊기 위해서는 공동체의 힘이 모아져야 한다.

불교의 가르침은 분명하다. 경멸은 무지에서 비롯되며, 무지를 깨뜨리는 길은 자비다. 학교폭력 문제 역시 개인의 일탈로만 볼 것이 아니라, 집단이 함께 바꿔야 할 무지의 구조로 인식해야 한다. 부처님 당시 계율이 그러했듯, 오늘의 교실에도 경멸을 멈추게 하는 규율과 교육, 그리고 피해자를 존중하는 자비의 실천이 필요하다. 그것이야말로 폭력의 불씨를 끄고, 존중과 공존의 공동체를 세우는 첫걸음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