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 붓다를 만나다] 19. 왕후의 붓, 사경 불사로 여물다
19 조선의 여성 명필이 쓴 기도: 인목 왕후의 불사
한국미술사에서 여성 참여와 흔적이 가장 많이 확인되는 분야는 단연코 불교미술이다. 각종 불교 조형물의 조성 기록에는 후원자로서 동참한 여성들의 이름이 빼곡히 적혀 있다. 불심이 깊고 큰 재원을 동원할 수 있었던 조선시대 왕실 여성들 역시 불사의 대시주(大施主)로서 발원문에 이름을 올린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점에서 인목 왕후 김씨(仁穆王后 金氏, 1584~1632)는 매우 특별하다.
첫째, 인목 왕후는 남성 문인들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서예로 이름이 높았던 명필이었다. 둘째, 그녀는 사경(寫經)을 발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손수 서사(書寫)했던 수행자였다. 인목 왕후가 지닌 예술가이자 수행자로서의 복합적인 모습은 조선의 다른 왕실 여성 후원자들에게는 찾아보기 어려운 면모이다. 이는 그녀가 겪었던 정치적이고 개인적인 고난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애끊는 마음을 담아 쓴 한 글자 한 글자
인목 왕후는 선조(宣祖, 재위 1567~1608)의 정비인 의인 왕후 박씨(懿仁王后 朴氏)가 승하하자, 1602년(선조 35)에 간택을 거쳐 계비로 책봉됐다. 이듬해인 1603년(선조 36)에는 정명 공주(貞明公主, 1603~1685)를, 1606년(선조 39)에는 영창 대군 이의(永昌大君 李, 1606~1614)를 낳았다. 영창 대군이 태어났을 당시는 후궁 태생인 광해군(光海君, 1575~1641, 재위 1608~1623)이 왕세자에 책봉된 후 여러 해가 지난 시점이었다. 비록 인목 왕후는 광해군의 왕위 계승을 지지했으나 영창 대군은 존재 그 자체로 혈통적 정통성이 취약했던 광해군에게 위협일 수밖에 없었다.
광해군은 1613년(광해 5)에 계축옥사(癸丑獄事)를 일으켜 영창 대군과 반대파 세력을 제거했다. 영창 대군은 역적의 수괴로 몰려 폐서인이 되어 강화도에 위리안치됐으나, 1년 만인 1614년(광해 6)에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다. 인목 왕후의 부친 김제남(金悌男, 1562~1613)과 형제들도 사사(賜死) 당했고, 1618년(광해 10)에는 본인도 대비 자리에서 쫓겨나 서궁(西宮, 현재의 덕수궁)에 딸 정명 공주와 함께 유폐됐다. 부모는 형살을, 친정은 멸문을 당하고, 품 안의 어린 자식을 빼앗긴 채 유폐 당한 인목 왕후를 지탱해 준 것은 불심이었다.
서궁에 유폐됐던 시기에 인목 왕후는 적어도 네 건의 경전을 손수 필사했다. 그중 1621년(광해 13)에 서사한 〈불설아미타경(佛說阿彌陀經)〉과 1622년(광해 14)의 〈금광명최승왕경(金光明最勝王經)〉이 남아 있다. 〈불설아미타경〉은 백지 위에 금자로 <불설아미타경>의 경문을 쓰고, 이어서 은자로 왕생정토신주(往生淨土神呪)와 발원문을 써 완성한 절첩본의 작은 사경이다. 발원문에 따르면, 〈불설아미타경〉은 ‘소성 정의 왕대비 김씨(照聖貞懿王大妃金氏)’, 즉 인목 왕후가 천계원년(天啓元年, 1621) 신유(辛酉) 9월에 은으로 손수 경건하게 쓴 <미타경(彌陀經)> 3건 중 하나다.
그녀는 1604년(선조 37) 10월에 ‘소성(昭聖)’이란 존호를 받았는데, 발원문에는 ‘조성(照聖)’이라 적혀 있어 이채롭다. ‘정의(貞懿)’는 1608년(광해 즉위년) 8월에 광해군이 모후인 그녀에게 추가로 올린 휘호다. 이 경전을 필사한 1621년에 인목 왕후는 서궁(西宮)에 유폐돼 암울한 시간을 겪고 있었다. 이미 1618년(광해 10)에 앞서 받았던 존호도 몰수당하고, ‘대비’ 대신 ‘서궁’이라 불리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발원문에서 인목 왕후는 본인을 여전히 ‘소성 정의 왕대비’라고 칭하고 있어, 큰 어른으로서 지녔던 자부심을 확인할 수 있다.
발원문에서 인목 왕후는 부모, 자식, 형제, 그리고 주변인들의 순으로 이름을 열거하고 이들이 정계(淨界)를 넘어 함께 아미타를 보고 속히 윤회를 벗어나기를 바랐다. 고인이 된 아버지 ‘연흥부원군 김제남’과 당시 제주도에 유배됐던 어머니 ‘광산부부인 노씨’, 아들 ‘영창대군 이의’, 친정 형제들인 ‘목사 김래(牧使 金琜)’, ‘진사 김규(進士金珪), ‘유학 김선(儒學金瑄)’의 순으로 열거했다. 다음으로 큰아버지인 ‘현령 김효남(縣令金孝男)’, 형부 ‘현령 심재세(縣令沈挺世)’, 인척으로 짐작되는 혜인 정씨(惠人鄭氏)와 온인 김씨(溫人金氏), 본인을 시봉했을 상궁 김씨(尙宮金氏)와 같은 여성 인물들의 이름을 적었다.
인목 왕후는 이 불사에서 비롯된 공덕이 1613년의 계축옥사(癸丑獄事)에 연루돼 참변을 당한 이들에게 돌아가기를 바라면서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재원을 마련해 손수 경전을 필사했을 것이다. 경문에 이어 현세의 업장을 소멸하고 사후에 서방 극락정토에 태어나게 하는 효능을 지녔다는 왕생정토신주를 쓴 데에서도 고인들의 극락왕생을 빌었던 그녀의 간절한 마음을 여실히 느낄 수 있다.
〈불설아미타경〉의 표지는 녹색의 당초 무늬 비단을 이용해 별도로 만들어졌다. 표지 중심에는 붉은색 비단을 붙인 후 이중으로 방형의 틀을 구획해 제첨을 마련했다. 제첨 안에는 ‘학립사횡(鶴立蛇橫)’ 부호와 ‘불설아미타경 전(佛說阿彌陀經 全)’을 먹으로 썼다. 학립사횡은 경전을 펼 때 읽는 ‘개법장진언(開法藏眞言)’을 상징하는 부호이다. 제첨의 좌우로는 황룡을 한 마리씩 자수하고, 표지의 나머지 공간에는 칠보와 연화 무늬를 수놓아 꾸몄다. 표지는 서궁 유폐 시절 인목 왕후를 옆에서 모시던 궁녀가 자수한 것으로 짐작된다.
극락에서 다시 만날 그리운 이들
계축옥사로 인해 희생된 피붙이들과 내 사람들의 명복을 비는 것이야말로 인목 왕후의 불사를 관통하는 가장 간절한 염원이었다. 앞서 살펴본 〈불설아미타경〉의 발원문에 조선시대 왕실 여성들의 발원문에 의례적으로 보이는 선왕이나 선대 왕실 가족들에 대한 추선(追善)과 현 왕실에 대한 축원(祝願)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불설아미타경〉의 발원문에서 파악되는 인목 왕후의 바람은 그녀가 다음 해에 서사한 〈금광명최승왕경〉의 발원문에서도 보인다. 〈금광명최승왕경〉은 전체 10권 10책으로 구성된 절첩본의 사경이다. 권1은 표지만 남아 있으나 권2에서 권10에는 각 권의 말미에 거의 동일한 내용의 발원문이 있다. 두 사경은 발원문 내용은 물론 표지 꾸밈에도 공통점이 많다. 표지 중앙에는 붉은 비단을 붙이고, 그 중앙에 학립사횡 부호를 표시한 후 ‘금광명최승왕경 권제이(金光明最勝王폱 卷第二)’ 같은 식으로 제목을 묵서했다. 제목 좌우에는 연화와 칠보 무늬 등을 수 놓아 표지를 장식했다.
발원문은 ‘소정 정의 왕대비가 특별히 자신을 위해 손수 써 완성한 금광명최승왕경 1건[昭聖貞懿王大妃 特爲己身手書成 金光明最勝王經一件]’이란 구절로 시작한다. 다음으로 재앙과 어려움이 소멸되고, 나쁜 사람을 멀리하며, 좋은 일과 경사를 항상 만나고 마음속 바람이 뜻대로 이뤄지기를 기원한다는 구절이 이어진다. 왕후는 발원문에서 영원히 여자의 몸을 떠나서 속히 윤회에서 벗어나 극락세계 무량수불이 계신 곳에서 다시 태어날 것을 기원했다. 또 부모와 동기, 충직한 비(婢)와 아이들과 같은 곳에서 함께 살고 같이 즐기며 잠시도 헤어지지 않고 영원히 즐거움을 누리기를 빌었다.
이어서 조부모인 영의정 김오(金祦) 양주를 시작으로 아버지인 연흥부원군 김제남과 어머니 광산부부인 노씨, 아들 영창 대군 이의와 딸 공주 이씨를 열거했다. 그다음으로 형제들인 김래, 김규, 김선을 적은 후, 친척들인 김효남, 심재세, 온인 김씨, 혜인 정씨, 아기 춘근(阿只春根)을 열거하고, 마지막으로 상궁 5인과 전의(典衣, 내명부 정7품 궁관) 3인을 적었다. 궁인들의 품계와 성씨, 이름까지 빠짐없이 다 적은 데에서 인목 왕후가 동고동락했던 이들에게 느꼈던 애틋한 마음을 엿볼 수 있다.
이어지는 발원문에는 사경의 조성 당시 살아 있던 사람들에 대한 바람이 기재돼 있다. 먼저 유일한 혈육인 정명 공주의 수명이 연장되고 복록을 오래 누리며 자손이 크게 번성하고 업장이 소멸하고 재난이 모두 없어지기를 발원했다. 뒤를 이어 전선(典膳, 정7품 궁관)과 전언(典言, 종7품 궁관) 등 내명부 궁관들의 이름을 열거하고, 이들의 수명이 연장되고 영화 복록을 누리고 목숨을 다한 후에는 서방 극락세계에 다시 태어나기를 빌었다.
복권 후에도 이어진 간절한 기도
인목 왕후는 1623년(인조 1) 3월에 인조가 일으킨 반정이 성공하자 복권돼 명예를 회복했다. 대왕대비가 된 이후에는 근기 지역의 여러 사찰에서 추복 불사를 활발히 벌였다. 1624년(인조 2)에는 비구니 예순(禮順, 1587~1657)에게 명해 삼각산 청룡사(靑龍寺)를 중창하고, 화장사(華藏寺)에 모셔 두었던 영창 대군의 위패를 청룡사로 옮겨 와 천도법회를 열었다고 전한다. 또한 안성 칠장사(七長寺)를 아버지 김제남과 아들 영창 대군을 위한 원찰로 삼고 중수하는 등 서궁 유폐 시절에는 할 수 없었던 대규모의 불사를 적극적으로 이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