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묻는 이에게]이판사판 놓는 마음이라야지 사량으로 놓아서는 안 됩니다

죽고 사는 거를 다 주인공에 탁 놔버리고 겁내지 마세요 여러분의 몸뚱이 자체를 끌고 다니는 마음의 주인, 그 주인의 핵심을 꼭 믿고 ‘오로지 거기서만이 나를 이끌어 줄 수 있다.’라는 믿음을 진실하게 가져야 합니다.

2025-09-19     대행 스님
그림=최주현 작가

일상생활이 그대로 수행이 되려면
질문 스님께서는 생활 참선을 말씀하시는데 저는 아직까지 생활 따로 수행 따로인 공부를 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나의 일거수일투족이 그대로 수행이 되는 참 불자가 되고 싶은데 마음만 앞서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일상생활이 그대로 수행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요.

답변 우리가 먹으면 배설하고 먹으면 배설하고 그러죠? 그리고 땅을 걸어가다가 엎드러지면 땅을 짚고 일어나죠? 그러니까 여러분이 이 세상에 태어났으니까 이 세상이 있는 거지 여러분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여러분은 무효예요. 그러니까 어느 누구든지 대신 죽어 주는 사람도 없을 거고, 자 주는 사람도 없고 먹어 주는 사람도 없고, 아파 주는 사람도 없고 똥 눠 주는 사람도 없어요.

그러니까 여러분의 이 몸뚱이 자체를 끌고 다니는 마음의 주인, 그 주인의 핵심을 꼭 믿고 ‘오로지 거기서만이 나를 이끌어 줄 수 있다.’라는 믿음을 진실하게 가져야 돼요. 그렇게 진실되게 이끌어 준다는 거를 믿고 하는데, 때에 따라서는 병도 날 수가 있고 때에 따라서는 애고도 생길 때가 오고, 어떤 때는 장사도 안될 때가 오고 어떤 땐 몸도 찌뿌드드하게끔 될 때도 있고, 가정이 의합하지 않을 때도 있고 별문제가 다 생기는 거를 그저 오는 대로, 생기는 대로 거기다가 맡겨 놓고 ‘하이고! 이 마음의 주인공, 당신밖에 없어. 이 영원한 친구야! 당신만이 나를 이끌어 주고 이 병고나 애고를 없애 줄 수 있어!’ 하고 거기 놔라 이겁니다.

그러니까 이 주인공에 모든 것을 놓고, 그 놓고 나서 돌아가는 것을 지켜보고 관찰하고 이러는 게 참선이에요, 그렇게 놓고 관찰하고 지켜보는 게. 그것이 어떻게 지속되느냐. 이렇게 좌선을 하고 앉아 있는 것만이 참선이 아니에요. 그건 좌선이지. 그러니까 모든 게, 와선이나 입선, 눕는 거나 앉는 거나 서는 거나 일하는 거나 모든 게 한데 합쳐지는 것이, 어떠한 형태로서 어떻게 작용을 할 때나 내가 마음을 그렇게 가질 수 있고 여여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이 그게 참선이에요.

그럭하다 보면 내 마음 자체가 자꾸 실험이 되면서 체험이 되는 거예요. 하나하나 자꾸 체험이 되고 그렇게 체험을 함으로써 바로 진짜로 믿게 되죠, 그때는. 그럼으로써 자기 참자기를 발견하게 되는 겁니다.

지혜로운 마음 되고 싶어요
질문 스님 법문에 “지혜 있는 데 마음이 있고 마음 있는 데 지혜가 있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마음공부를 하지만 참 지혜롭지 못한 것 같습니다. 지혜로운 도반들을 보면 참 부럽기도 하고 저도 지혜로운 마음으로 살고 싶은데,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답변 지금 젊은 분들도 그렇거니와 애들서부터 어른까지 다 알아야 할 인생관, 인생이 어떻게 해서 자기한테 주어졌고 어떻게 조화가 돼서 돌아가는지 그것을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저 화원의 꽃이 저렇게 한데 합쳐져서 조화가 이루어지듯이, 또는 산의 고목이나 벌레 먹은 나무들, 짧고 긴 나무들, 풀 등도 각기 모습이 다 다른 것들이 같이 모여 있기에 조화를 이룬다는 것, 산골마다 물도 좋고 돌도 있고, 그 여러 모습들이 조화된 아름다움으로 우리들 눈에 비춰진다는 것을 한번 생각해 보셨으면 합니다. 우리들의 삶에 대한 것도 역시 그와 같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모둠이로 생각해서 물 위에 산이 가고, 산 위에 물이 간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무슨 뜻이냐. 지혜 있는 데 마음이 있고 마음 있는 데 지혜가 있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곧바로 자기한테 있다는 얘깁니다. 지혜 따로 있고 마음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랬을 때 지혜는 물로 비유했고 마음 내는 이 자체는 법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모습 모습이 다른 여러 종류들이 성황을 이루고 있는 산에 비유를 했습니다. 그것은 우리 살아나가는 모습들이 다르고 이름들이 다르고 또는 병든 사람 건강한 사람, 잘난 사람 못난 사람, 키가 작은 사람 큰 사람, 모두 다 같이 사는 것처럼 산에도 그렇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얘깁니다. 

그와 같이 들이나 산이나 물이 함께 조화를 이루어서 돌아간다는 것을 알고 우리 한번 그것을 생각해 봅시다. 물이라는 것은 지혜로 비유하니 우리가 시각적으로나 촉각적으로나 또는 감각적으로나 청각적으로나 온갖 지각이 한데 합쳐진 것을 물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귀로 듣는 것을 받아들이고, 또는 눈으로 보는 것을 받아들이고, 또 코로 냄새 맡는 것을 받아들이고, 혀로 맛을 아는 것을 받아들이고, 또는 부닥치는 것을 받아들여서 그 모두를 지혜롭게 돌린다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귀로 들어서 화가 불끈 나는 것도 있지만 아주 감미롭고 친근하고, 어떤 땐 웃음이 날 소리도 들을 수 있고, 어떤 때는 상을 찌푸리는 소리도 들을 수 있고 이랬을 때에 그 듣는 순간에 마음이 달라진다는 얘깁니다. 그래서 지혜는 물로 비유한 것입니다. 그리고 듣는 것은 여러 가지로 듣기 때문에 산으로도 비유한 겁니다. 

듣는 것만 듣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도 역시 아름답게 생각이 들 때가 있고, 아주 속상할 때가 있고, 여러 가지 가지 아니겠습니까? 냄새를 맡아서 구린내가 나는 것도 있고 향기로운 냄새도 있는 것입니다. 또 맛을 봐서 아주 맛이 없는 것을 느끼고 맛이 있는 것을 느낍니다. 또는 우리가 손으로 쥐어서 촉감이 좋은 것이 있고 아주 거친 게 있습니다. 그런 걸 알게 하는 그 자기의 모든, 한데 합쳐진 지혜라고 할까요? 달라지는 이 마음 자체가 지혜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혜 있는 데 마음이 있다고 하는 거죠.

그러니까 청각이 뚜렷하고 시각적으로나 감각적으로나 모든 게 융합돼서 돌아가는 것을 발현하고 서로 상응하게 하는 그 자체의 지혜가 넓어야 된다는 얘기죠. 바다와 같아야 된다, 좁아서는 허공에 바늘구멍도 안 들어간다는 얘기죠. 그러니까 우리가 귀로 듣고 혀로 맛을 보고 코로 냄새를 맡고 하는 것이 한두 건이 아닙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중생이다 부처다 하는 것은, 중생들은 보고 듣고 생각 일어나는 것, 모두가 자기가 그렇게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것이 중생이요, 부처님의 뜻은 자기가 고정돼 있지 않으니까 마음조차도 배꼽이 떨어졌다는 겁니다. 처음 단전을 할 때 배꼽 밑에다 중심을 두라고 하지만 그 배꼽까지도 송두리째 빠졌다 이 소립니다. 송두리째 빠지니까 나라고 내세울 게 없는 것이 공한 이치라고 생각합니다. 내 마음이 고정되게 돌아가지 않고 공했으니 내가 하는 모든 일도 전부 공했느니라. 그렇기 때문에 하나도 착(着)을 두지 말고 그냥 무심, 무심으로 해라 했던 겁니다. 

불안한 마음 뛰어넘고 싶은데
질문 저는 아내와 두 딸을 책임지고 있는 월급쟁이 가장입니다. 그런데 직장생활도 늘 언제 잘릴지 불안하고, 그래서 그런지 늘 주인공을 부르는데도 편안하지 못합니다. 이 불안한 마음을 어떻게 뛰어넘을 수 있을까요. 

답변 주인공이라는 것도 이름이지, ‘주인공, 주인공’ 아무리 불러 보세요, 내가 내 뿌리를 믿지 않는데 주인공이 나오나. 저 나무들을 보세요. 가을이 되면 저절로 잎이 져서 앙상한 가지만 남았어도 그 가지는 내년 봄에 또 잎이 필 것을 알고 아무리 비바람이 치고 눈보라가 쳐도 아무 상관 없이 그냥 살다가 봄이 되면 잎이 나고 꽃이 피어요. 그러니까 우리 사람도 그렇게 아등바등하지 마시란 말입니다. 저런 나무들은 한 해가 가야 그렇게 되지만 우리는 한 찰나란 말입니다, 고등 동물이기 때문에. 아등바등하면 오히려 못 믿는 게 되기 때문에 내가 나를 지원을 안 해 줘요. 

그래서 자(子)와 부(父)가 상봉을 해야만이 그게 견성한 거다 이런 말입니다. 그것도 이름이지만 말입니다. 견성을 했어도 견성했다고 다냐. 그것도 아닙니다. 둘이 아닌 도리를 알면서 배우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나 아님이 없고, 내 형제 아님이 없고, 내 부모 내 자식 아님이 없는데 누구를 남이라고 밀어내고 섭섭하게 하겠습니까? 

그러니까 “나와 같이만 생각해라. 내 모습같이 생각하고 내 마음같이 생각하고, 불쌍함도 나같이만 생각해라. 더 위로 생각하지도 말고 내려서 생각하지도 마라. 부처님도 나와 같이만 생각해라. 그리고 부처님의 뜻을 받아서 그대로 이행한다면 그대로 부처니라.” 하는 겁니다.   

불교라는 자체가 머리 깎은 스님들만 공부하는 게 아닙니다. 사람뿐만 아니라 일체 만물만생의 생명은 다 불(佛)입니다. 물 안에서 고기들이 사는 것도 교(敎)입니다. 우리들이 사는 것도 교고, 모든 생명체들이 살아나가는 게 전부 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한군데 국한돼 있는 게 아니라 무의 세계나 유의 세계나 둘 아니게 수레바퀴 돌아가듯 돌아가는 이 진리가 바로 불교죠. 그 진리 안에서 우리가 그 진리를 알아야 된다는 얘기죠.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보이는 자기를 자기라고 생각하지 말고 보이는 자기는 심부름꾼으로 생각을 해라. 안 보이는 자기가 반드시 누구에게나 다 있으니까. 못났든 잘났든, 거지든 부자든, 지위가 낮든 높든 간에 자기에게는 반드시 안 보이는 자기가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수억겁 광년을 거치면서 자기를 형성시키고 진화시켜서 내려온 거죠. 그러니 얼마나 유능하겠습니까, 보이지 않는 자기가.  

그래서 나는요, 이 절을 지으면서도, ‘허! 네가 있다면….’ 말을 하려니까 그렇죠. 말을 안 하더라도 있으니까 하는 거죠. 그쵸? 없으면 안 하죠. 여러분도 여러분이 없으면 아무것도 없어요. 하기는 뭘 해요? 그러나 계시니까 하죠, 모두. 내가 없으면…, 나라고 할 건 없지만. 그래서 그 나 아닌 나를 부처라고 합니다, 주인공을. 그래서 부처님이 계시면 할 거고…. 부처님이라고 하니까 멀리 있는 걸로 생각을 하지 마십시오. 안에 부처님이 계시면 할 거고 부처님이 안 계시면 못 할 거고 그렇지, 그렇게 안달복달할 게 없습니다. 이건 나 하나가 개별적으로 집을 짓고 살려고 해야 문제가 되는 거죠.

그것뿐만 아니라 생활하는 데 다 그렇다는 얘기죠. ‘뭐가 참 아쉽다’ 이러면, 아쉬운 거를 내가 알았잖아요. 여러분이 살아가면서 아쉽다는 것도 알고 계시고 안 된다는 것도 알고 계시잖아요. 그러니까 거기에서는 더 잘 알겠죠? 그렇게 알더라도 이 배우는 사람은 반드시, 거기를 집어서 그냥 내맡겨 버리는 거예요. ‘나는 너의 심부름꾼이니까 너 알아서 해.’ 하고 말이죠. 이 보이는 육체로서는 도저히 그걸 가늠할 수가 없거든요. 해결해 나갈 수가 없단 말입니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자기한테 내맡겨서 보이지 않는 데서 다 조절하게끔 만들어 놓고 자기가 뛰는 거예요.  

어떤 신도 하나가 그런 얘기를 해요. 기계를 놓고 공장을 하는데 말입니다, 물건을 팔아도 돈도 안 걷히고 외상이 되고, 기계는 자꾸 고장이 나고 이러니까 하루는 그냥 앉아서 울었대요. 그래서 그랬어요. “그 기계도 살아 있는 거야. 그러니까 기계의 그 몸뚱이나 당신의 몸뚱이나 둘이 아니야. 그것도 다 주인공이 하는 일이고 나는 심부름꾼 노릇을 하는 거니까 주인공에다 다 맡겨서 다스리게 해라.” 이랬어요. 그랬더니 그 이튿날부터는 고장이 하나도 안 나더랍니다. 그래서 돈 벌었다잖아요.  

그런데 이치가 이상스럽게도, 귀찮고 골치가 아파서 ‘아유, 죽으나 사나 그냥 너 알아서 해!’ 하고 그냥 그렇게 맡기니까 오히려 풀려나가더래요. 생각해 보세요. 골치가 아프지 않아요, 사는 데? 그러니까 골치가 아픈 걸 생각해서라도 다 그냥 맡겨 버리고 사는 거예요, 물 흘러가듯이. 왜 골치 아프게 살아요? 한 생 얼마나 산다고요. 아등바등하고 아무리 그 높은 산을 손톱이 다 까지도록 올라가려고 애를 써도 이 몸뚱이로서는 도저히 올라갈 수가 없고 은산철벽을 뚫을 수가 없어요. 그러나 여러분의 마음은 은산철벽을 뚫고도 남음이 있죠.  

그러니까 그 사람 말이 그래요. “참 신기합니다.” 이거예요. “참, 스님! 마음법을 이렇게 알게 되었으니 제가 수십 번을 머리를 깎아서 신을 삼아 드린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그거는 당신 주인한테 당신이 갚는 거니까, 그렇게 잘 돌아가고 잘 사는 게 바로 갚는 거야. 그 공부를 잘하고 잘 사는 게 갚는 거지, 나한테 뭘 갖다 주고 이래서 갚는 게 아니다 이거야. 자기 마음의 뜻을 알고 일체가 다 부처님의 그 가르치신 뜻을 알면, 당신의 뜻을 알면 다 알게 돼 있어. 그게 갚는 거다.” 이랬습니다. 

이 몸뚱이는 한 철 살다가 옷을 훨훨 벗어 버리고, 또 새 옷을 입고 싶으면 입고, 말고 싶으면 말고, 보살로서 중생들이 원하면은 보이지 않게 다 구제하고 다니듯이 말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그렇게 하고…, 마음대로죠, 그것이. 

마음은 체가 없어서 철퇴도 없고 또 꼬챙이도 없고, 그렇기 때문에 뛰어넘을 수가 있고, 강도 건널 수가 있고, 은산철벽도 뚫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 자리에서 한생각을 하면 저 미국에도 통하고, 저 은하수에도 통하고 저 우주에도 통하는데요, 뭐. 그냥 빛보다 더 빠르다니까요. 

그러니까 죽고 사는 거를 다 그냥 거기다 탁 놔 버리고요, 겁내지 말아요. ‘자식이 어떻게 될까, 부인이 어떻게 될까, 또 어떻게 바가지를 긁을까? 그런 것이 악마들처럼 들이덤비는 데는 내가 용빼는 재주 있나?’ 이러지만 그런 거를 다 그냥 놓고, 그냥 다 놓고…. 그거를 들고선 붙잡고 쩔쩔매든, 다 놓고 그냥 뻔뻔하게 있든 그건 상관이 없어요. 외려 다 놓게 되면 심부름꾼이 생겨요.

우리가 어렵게 살다 보면요, 저 고기들 하나, 벌레 하나 사는 것을 봐도 참 애틋해요. 우리네 살림살이와 똑같거든요. 모습은 사람 사는 거하고 달라도 사는 이치는 똑같아요. 내가 예전에 산길을 걷다가 봤는데, 개미 한 마리가 다리가 부러져서 못 가고 쩔쩔매고 있으니까 개미 세 마리가 달려들더니 그걸 끌고 갑디다. 개미도 그러는데, 사람으로서 그 도리를 모르고 살아서야 되겠느냐는 얘기죠. 

이렇게 살아야 하나 하는 생각이...
질문 스님, 요즘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아가는 하루살이 인생입니다.사는 게 너무 고달픈데 더군다나 몸까지 아파서 힘들 때는 ‘이렇게 하면서 살아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 때는 마음이 너무 아파요. 이런 저도 잘 살아나갈 수 있을까요?

답변 세상은 환상이지만 또 환상이 아닌 것이 세상이지요. 그래서 살다 보면 눈물 나는 일들이 그렇게 내게 닥치게 되고 그럽니다. 하지만 이렇게 살라고 하는 것이 내 팔자구나 하고 거기서 주저앉아 버리면 앞으로 또 그 바퀴를 넘어야 하니 어쩝니까. 그러니 그건 정신이 문제예요. 

아니, 오늘 살다 내일 죽으면 어떻고 모레 죽으면 어때요? 안 그래요? 한 번 죽기는 마찬가진데. 누구 말마따나 이판사판이란 말입니다. 여러분은 살 양으로 바둥바둥하기 때문에 죽는 법이에요. 이 돈도 쫒아가려고 바둥바둥하기 때문에 달아나가는 거지 가만두고 그냥 저절로 오게끔 해 놓으면 저절로 ‘아, 이 집에 들어가면 구순하겠구나.’ 이러곤 들어오는 거예요. 쫒아다니면 안 와요. 붙들리지 않아요.  

이 마음의 묘법이라는 게 그래서 그렇게 광대무변한 겁니다. 이 마음의 법이라는 게 얼마나 중요하고 얼마나 광대무변하고 얼마나 묘한지 여러분도 자꾸자꾸 경험을 쌓으세요. 왜냐하면 과거에 지은 업보가 지금 없어질 리는 없어요. 그러니까 어떠한 고통이 오더라도 모든 거는 주인공 자리에서 오는 거니까 거기다 맡겨 놓고 죽든 살든, 뭐 죽지 않는다는 법은 없어요. 그렇게 하면 육신이 망가졌다가도 다시 소생할 수가 있고 더 안 살려고 그러니까 더 살아지죠. 더 살 양으로 바둥거리면 더 안 살아져요.  

또 ‘이렇게 살 양으로 하면 더 안 살아진다더라’ 이러고 또 생각을 내진 마세요. 그냥 천연적으로 그렇게 돼야지, 그냥 이판사판 놓는 그 마음이라야지 이거는 생각을 해 가지고 사량으로 놔서는 안 됩니다. 그러니까 죽든 살든 주인공만 붙들고 놔 보세요. 죽으란 법은 없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