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일야의 시, 불교를 만나다] 17. 좋은 벗[善友] : 정호승의 ‘벗에게 부탁함’

저 꽃 같은 놈 정호승, 슬픔 벗어나는 지혜 전해 줘 벗이란 마음의 소리를 알아듣는 관계  거친 말 대신 아름다운 대상 비유하길  

2025-09-12     이일야 전북불교대학 학장
해당 삽화는 생성형 AI를 통해 제작했습니다.

요즘 청소년들이 대화하는 모습을 보면 욕설이 많아도 너무 많다는 생각이다. 언젠가 EBS 프로그램에서 학생들에게 욕하지 않고 대화해 보라는 주문을 한 적이 있다. 대부분 대화가 이어지지 않고 자꾸 끊겼으며, 욕 없이 말하는 것을 모두 힘들어했다. 자신도 모르게 욕이 불쑥 튀어나오는 아이들도 적지 않았다. 이 실험을 통해 학생들은 평소 자신이 얼마나 욕을 많이 하는지 실감할 수 있었다. 어찌 보면 우리는 지금 욕이 난무하는 사회에 살고 있는 셈이다.

이처럼 청소년들 사이에 욕설이 일상화된 것은 어른들에게 보고 배웠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영화나 각종 방송 프로그램에서도 반말과 욕설이 적지 않게 등장한다. 특히 요즘 대세로 자리 잡은 유튜브에서는 서로 자유롭게 대화하다 보니, 반말은 물론이고 욕설도 거리낌 없이 한다. 방송에 출연한 패널들 또한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반말과 욕설이 난무한다는 것은 상대에 대한 존중과 배려가 줄어들고 있다는 방증이다.

청소년의 욕설이 심각한 것 같아 고등학교에 인문학 특강을 나가면, EBS에서 방영된 ‘욕의 반격’이라는 영상을 보여 주곤 한다. 거기에는 우리가 상상하기 힘든 충격적인 장면이 나온다. 평소에 말할 때는 무색의 침전물이 나오고 사랑한다고 말할 때는 분홍색, 화를 내면서 욕할 때는 갈색의 침전물이 만들어진다고 한다. 그런데 갈색의 침전물을 모아 쥐에게 주사했더니 곧바로 죽고 말았다. 욕설이 얼마나 해로운지 보여 주는 실험이었다. 제목대로 욕이 반격을 가한 것이다.

그래서 준비한 시가 정호승 시인의 ‘벗에게 부탁함’이다. 친구에게 욕하고 싶을 때 활용하면 좋을 것 같다. 시인은 거칠고 험한 말 대신 ‘봄비 같은 놈’이나 혹은 ‘꽃 같은 놈’, ‘나무 같은 놈’이라고 욕하라고 한다. 욕도 이렇게 하면 상대 또한 기분이 상하지는 않을 것이다. 욕이 아니라 오히려 칭찬 같은 느낌도 난다. 도대체 친구가 어떤 존재이기에 시인은 욕도 이처럼 예쁘게 하라는 것일까?

정호승은 ‘슬픔의 시인’이라는 별명으로 널리 알려진 작가다. 그만큼 슬픔에 관한 시를 많이 썼다는 뜻이다. 1979년 발간한 첫 시집의 제목도 <슬픔이 기쁨에게>이다. 하지만 시인은 슬픔에 매몰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서 벗어나는 지혜도 우리에게 전해 준다. 개인적으로 ‘산산조각’이라는 시를 좋아하는데, 이를 통해 적지 않은 위로를 받았기 때문이다. 시인이 룸비니 동산에서 사 온 흙으로 만든 불상이 마룻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던 모양이다. 그때 순간접착제로 떨어진 조각을 붙이려 하는 모습을 보고 부처님이 시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한다.

“산산조각이 나면 / 산산조각을 얻을 수 있지 / 산산조각이 나면 / 산산조각으로 살아갈 수 있지.” 

몇 해 전 치아 상태가 좋지 않아 전체를 뽑는 대공사를 할 때 우연히 이 시를 접했다. 시를 읽고 치아가 없으면 없는 대로 살아가면 되지 않겠냐고 생각하니 묘하게 위로가 됐다. 임플란트와 브리지를 해서 살아가도 삶에 아무런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이런 경험 때문인지 주위에서 누군가 힘들어하면 이 시를 보내 준다. 대부분 위로를 받고 용기를 얻었다는 반응을 보였다. 삶이 산산조각 나면 쉽게 포기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러지 않으면 좋겠다. 시인의 말처럼 우리는 얼마든지 산산조각대로 살아갈 수 있다. 그래도 괜찮다.

시인은 1973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첨성대’라는 시가 당선돼 등단하게 된다. 1982년에는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위령제’라는 단편소설이 당선됐다. 소설 쓰는 시인인 셈이다. 그의 시가 중학교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영향력 있는 작가다. 김광석이 불러 유명해진 ‘부치지 않은 편지’와 안치환의 ‘우리가 어느 별에서’도 정호승의 시에 곡을 붙여 만든 것이다. 

친구를 주제로 쓴 ‘벗에게 부탁함’은 1997년 발간된 시집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에 실린 시다. 정호승 시선집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도 실려 있다. 직접 들어 보기로 하자.

“벗이여 / 이제 나를 욕하더라도 / 올 봄에는 / 저 새 같은 놈 / 저 나무 같은 놈이라고 욕을 해다오 / 봄비가 내리고 / 먼 산에 진달래가 만발하면 / 벗이여 / 이제 나를 욕하더라도 / 저 꽃 같은 놈 / 저 봄비 같은 놈이라고 욕을 해다오 / 나는 때때로 잎보다 먼저 피어나는 / 꽃 같은 놈이 되고 싶다”
 

좋은 벗[善友]에게 부탁함
아무리 가까운 친구 사이라도 오래 만나다 보면, 서운하다고 느끼거나 욕하고 싶을 때가 있다. 사람 관계에서 어떻게 좋은 일만 있을 수 있겠는가. 벗에게 욕하고 싶을 때 이 시를 활용하면 적어도 감정이 상해 관계를 해치는 일은 없을 것 같다. 나무나 꽃 같은 놈이라고 욕하는 친구에게 화를 낼 수는 없을 테니 말이다.

옛날부터 벗의 중요성을 강조한 수많은 이야기가 있다. 친구 사이에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붕우유신(朋友有信)’이란 말도 숱하게 들어 왔다. 친구라는 제목의 시나 노래 또한 많은 편이다. 친구를 가리키는 ‘지음(知音)’이라는 말도 종자기(鍾子期)가 죽자 백아(伯牙)가 거문고의 줄을 끊어 버렸다는 그 유명한 ‘백아절현(伯牙絶絃)’의 이야기에서 나온 것이 아니던가. 벗이란 이처럼 마음의 소리[音]를 알아듣는[知] 관계였다.

17세기 프랑스 작가인 라 로슈푸코(La Roch efoucauld, 1613~1680)는 친구를 가리켜 ‘제2의 나’라고 하였다. 그만큼 친구가 중요하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는 친구를 믿지 않는 것은 친구에게 속아 넘어가는 것보다 더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곧 나 자신을 믿지 않는 일이니까 말이다. 친구란 어떤 존재인가 보여 주는 것 같아 벗과 사이가 서먹해질 때면 들여다보곤 한다.

불교에서도 친구의 중요성을 많이 강조한다. 벗이란 단순히 가까운 사이가 아니라 부처님께서 가신 길을 함께 걷는 길동무다. 이런 의미를 담아 도반(道伴)이란 말을 쓰기도 한다. 언젠가 아난 존자가 진리의 길을 가는 데 벗이 도(道)의 절반은 되는 것 같다고 말하자, 부처님은 단호한 목소리로 답한다.

“아난아, 벗은 도의 절반이 아니라 전부이니라.”

불교에 입문해 이 문장을 처음 접했을 때, 참 멋지다고 생각했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보존하고 전승하는 승가는 ‘좋은 벗들[善友]’의 모임이다. 전국에 있는 사찰과 수련원, 포교당, 불교대학은 이처럼 좋은 벗들이 모여 공부하고 수행하는 도량이다. 개인적으로 선우라는 말이 마음에 들어 불교대학 어느 기수의 이름으로 지어 준 적도 있다. 이처럼 손에 손잡고 어깨동무하면서 진리의 길을 걸어가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기분 좋은 일이다.

하지만 함께 가는 길이 어찌 좋을 수만 있겠는가. 길벗이라 해도 때로는 얼굴 붉히는 일이 생기기 마련이다. 이럴 때 쉽게 입에서 나오는 말이 불교의 십악(十惡) 가운데 하나인 악구(惡口), 즉 험한 말이다. 평소 감정에 휩쓸려 거친 말이나 욕을 많이 하면 습관으로 굳어져 고치기 어렵게 된다. 이렇게 쌓인 나쁜 습관은 언제 어디에서 불쑥 튀어나올지 모를 위험한 폭탄과도 같다. 어찌 보면 이것이 진짜 욕의 반격이 아닐까 싶다.

언젠가 학술 세미나에서 있었던 일이다. 평소 욕을 많이 하던 교수가 사회를 보게 됐는데, 자기 뜻대로 말이 잘 나오지 않았던 모양이다. 사회가 매끄럽지 않았다고 생각한 그 교수는 마이크가 꺼진 줄 알고 평소처럼 혼잣말로 욕을 했는데, 그 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생생하게 전달됐다. 그 순간 사회자의 얼굴은 홍당무가 되고 말았다. 요즘 말로 ‘웃픈’, 즉 웃기면서도 슬픈 상황이 찾아온 것이다. 쉽게 회복하기 어려울 정도로 욕이 크게 반격한 셈이 되었다.

이처럼 욕이 습관이 되면 웬만해서는 고치기 힘들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거친 말 대신 고운 말을 쓰는 훈련이 필요한 것이다. 정호승의 ‘벗에게 부탁함’이라는 시가 오늘의 우리에게 주는 의미이기도 하다. 누구라도 욕하고 싶을 때가 있다. 그 대상이 친구라면 더욱 쉽게 나올 수 있다. 그만큼 욕을 하기도 받아 주기도 편한 관계여서 그렇다. 욕이 나오려고 할 때 그런 나 자신을 직시하고 의식적으로 아름다운 대상을 비유해서 욕하면 좋지 않을까. 시에서처럼 꽃이나 나무 같은 놈이 아니어도 된다. 가을 단풍이 곱게 물들 때면 ‘저 단풍 같은 놈’, 겨울 눈이 내린다면 ‘흰 눈 같은 놈’이라고 욕을 해보자.

“성 안 내는 그 얼굴이 참다운 공양구요, 부드러운 말 한마디 미묘한 향이로다.”
불교에서 널리 알려진 문수보살 게송이다. 우리는 얼마든지 말과 표정으로 상대를 기분 좋게 하거나 나쁘게 할 수 있다. 상대가 인생이라는 길을 함께 가는 벗이라면 얼굴에 찡그림이 아니라 웃음 띤 표정을 짓는 것이 좋다. 혹여, 욕하고 싶을 때면 좋은 벗에게 부탁해 보자. ‘이 문수 같은 놈’이라 욕해 달라고. 나도 때로는 입가에 미묘한 향과 미소 가득한 문수 같은 보살이 되고 싶다.

▶한줄 요약 
벗에게 욕하고 싶을 때 이 시처럼 의식적으로 아름다운 대상을 빗대어 표현한다면, 적어도 관계를 해치는 일은 피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