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 붓다를 만나다] 18. 복장이 되살려 낸 잊힌 왕후

장렬 왕후, 도성 안 비구니절 불사 이끌어

2025-09-12     이승혜 동아대 역사문화학부 교수

 

서울 지장암 목조비로자나여래좌상 조성발원문, 조선 1622년, 명주, 33.3×34.0㎝,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보물.사진=e뮤지엄

1622년(광해 14), 임진왜란의 병화가 휩쓸고 간 조선의 수도 한양 도성에서는 재건 공사가 한창이었다. 그해 봄, 한양 도성 안의 자수사(慈壽寺)와 인수사(仁壽寺) 역시 큰 불사(佛事)의 회향을 앞두고 분주했다. 무려 불상 11존과 불화 7점을 전국에서 모여든 승려 장인들이 동시에 조성해 봉안하는 장대한 규모의 불사였다. 그러나 도성 한복판에서 벌어졌던 이 대불사는 당대의 문헌에는 전혀 기록돼 있지 않다. 역사에서 잊힌 이 불사가 세상의 빛을 본 것은 오랜 시간이 흐른 후인 2007년의 일이다. 

2007년 당시 서울 종로구 창신동 지장암(地藏庵) 대웅전에 봉안됐던 목조비로자나여래좌상의 복장(腹藏)이 조사됐고, 2010년에 개최된 학술대회와 보고서를 통해 그 결과가 세간에 널리 알려지게 됐다. 

당당한 불신과 위엄 있는 상호가 인상적인 목조비로자나불상 내부에는 조성발원문(造成發願文)을 비롯해 은제 후령통(喉鈴筒)과 다양한 불교 전적 및 다라니 등이 안치돼 있었다. 푸른 비단 위에 정연히 써 내려간 붉은 글씨는 이 불사의 발원자가 ‘장렬 전하(章烈殿下)’라고 밝혔다. 장렬 전하는 곧 광해군(光海君, 재위 1608~1623)의 정비인 ‘장렬경휘정성명숙현신정순왕비(章烈敬徽貞聖明淑顯愼貞順王妃)’를 가리키는 존호이다. 역사가 폐비 류씨(廢妃 柳氏, 1575~1623)라고 기억하는 이 잊힌 왕비는 대불사를 일으키며 무엇을 빌었던 것일까. 

 

서울 지장암 목조비로자나여래좌상, 조선 1622년, 높이 117.5㎝,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보물. 사진=e뮤지엄

지극한 불심으로 불사 일으킨 장렬 왕후
장렬 왕후 류씨의 본관은 문화(文化)이며, 판윤 류자신(柳自新)과 정양정(鄭楊貞)의 딸이다. 그녀는 1587년(선조 20)에 선조(宣祖)와 공빈 김씨(恭嬪金氏)의 둘째 아들인 광해군과 가례를 올리고 문성군부인(文城郡夫人)으로 봉해졌다. 1592년(선조 25)에는 전란의 와중에 광해군이 긴급히 세자로 책봉되자 세자빈으로 진봉됐다. 1608년(선조 41), 선조가 승하하고 광해군이 왕으로 즉위하자 왕비가 됐다. 

1623년(광해 15) 3월에 능양군(후일의 인조)이 일으킨 반정이 성공하자, 광해군과 함께 폐출돼 강화도에 유배됐다. 폐위된 광해군의 지위가 ‘군(君)’으로 격하됨에 따라, 그녀 역시 왕비에서 ‘군부인(郡夫人)’으로 격하됐다. 같은 해 10월 폐위된 지 7개월여 만에 강화도에서 숨을 거두었다. 

정사나 야사 모두 폐비에 대해서는 기록하는 일이 별로 없다. 그런데 예외적으로 효종의 부마 동평위(東平尉) 정재륜(鄭載崙, 1648~ 1723)이 1708년(숙종 34)에 편찬한 야사집인 〈공사견문록(公私見聞錄)〉에는 장렬 왕후에 관한 일화들이 다수 실려 있다. 장렬 왕후는 정재륜의 증조부인 정창연의 외손녀였기에, 정재륜은 한 집안사람이었던 그녀에 대해 더 많은 이야기를 접할 수 있었을 것이다. 

〈공사견문록〉에 의하면 장렬 왕후는 독실한 불교 신자였다. 왕비는 대궐 안에 금부처를 모셔 두고 친히 기도하며 복을 구했고, 평소 대궐에서 불상을 만들어 안팎의 절에 하사했다. 그녀는 후생에는 다시는 왕가의 지어미로 태어나지 않기를 항상 빌었다고도 전한다. 유사한 기록이 이능화의 〈조선불교통사(朝鮮佛敎通史)〉에도 게재돼 있다. 

서울 칠보사 목조석가여래좌상, 조선 1622년, 높이 117㎝, 서울 칠보사, 보물. 사진=국가유산청

이능화의 기록에 보이는 ‘불상을 만들어 안팎의 사찰에 하사했다[造佛像 以內外寺刹]’는 구절은 장렬 왕후의 불사 경향에 대해 알려 주기에 중요하다. 여기에서 ‘안’은 자수사와 인수사를 비롯한 도성 안의 비구니절을 이르는 것이요, ‘밖’은 도성 밖에 멀리 위치한 명산대찰 일컫는 것이다. 돌아보면, 왕비 류씨는 1622년(광해 14) 한 해만 해도 5월에는 도성 안 자수사와 인수사를 위해 다수의 불상과 불화를 조성하는 대불사를 회향했고, 7월에는 도성 밖 합천 해인사 장경판전 남쪽에 있는 건물인 수다라장(脩多羅藏, 당시 대장전[大藏殿]이라 지칭)을 중수하는 불사를 마무리 지었다. 

자수사와 인수사 두 절을 위해서는 단독으로 나섰고, 해인사 수다라장 중수에서는 ‘조성대시주(造成大施主)’이자 내명부의 실질적인 수장으로서 후궁들, 옹주들, 상궁과 나인들, 상궁으로서 출가한 비구니[尙宮比丘尼]와 비구니 스님들을 이끌며 불사 후원을 주도했다. 비록 2년 후인 1624년(인조 2) 4월에 완공을 보긴 했으나, 장경판전 북쪽 건물인 법보전(法寶殿)의 중수도 수다라장과 함께 장렬 왕후와 궁중 여성들의 발원으로 시작됐을 것이다.

목조비로자나상의 조성발원문에 언급된 자수사와 인수사는 〈조선왕조실록〉에 종종 언급되는 자수원(慈壽院)과 인수원(仁壽院)을 가리킨다. 조성발원문 속의 명칭에서 불사가 거행되던 1622년 당시에는 두 절의 위상이 ‘원(院)’이 아니라 ‘사(寺)’로 불릴 만큼 높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같은 사격의 격상 뒤에는 장렬 왕후의 후원이 있었을 것이다. 

두 절의 연원은 왕이 승하한 후 선왕의 후궁들과 연로한 궁중 여성들이 공동 거주할 수 있도록 마련한 별궁에 있다. 이러한 별궁이 그곳에 거주하는 궁중 여인들의 숭불 활동에 의해 자연스럽게 불교 시설화하면서 왕실과 긴밀한 관련이 있는 비구니원으로 거듭난 것이다. 자수원의 전신은 본래 태조의 일곱째 아들 무안 대군 이방번의 집인 자수궁(慈壽宮)이며, 인수원은 태종 이방원의 잠저인 인수궁(仁壽宮)이 그 모태이다. 전대 후궁들의 공동 거주지였던 두 비구니절은 자연히 궁궐의 외곽에 자리 잡고 있었다. 자수궁은 경복궁(景福宮) 서쪽 외곽인 지금의 서울 종로구 옥인동에 있었고, 인수궁은 창덕궁(昌德宮)의 서북쪽 담장 근처인 오늘날의 종로구 원서동 일대에 자리했던 것으로 보인다.

장렬 왕후의 자수사·인수사 불사는 광해군대의 궁궐 영건과 연결해 바라볼 때 매우 흥미롭다. 조선시대 궁궐의 연혁 등을 기록한 〈궁궐지(宮闕志)〉 중 ‘경희궁지(慶熙宮志)’에는 1616년(광해 8)에 경덕궁(慶德宮, 경희궁으로 개칭), 인경궁(仁慶宮), 자수궁(慈壽宮)의 조영 공사를 시작했다고 전한다. 막대한 자원과 인력이 소요되는 궁궐 영건에는 승군(僧軍)이 동원됐다. 바꿔 말하자면, 당시 한양에는 많은 수의 승려 장인들이 머무르고 있었다. 광해군과 장렬 왕후가 거주했던 창덕궁과 인수사는 궁궐의 담장을 사이에 두고 인접해 있었고, 새 궁궐이 지어지던 자수궁의 옛터에 자수사가 있었다. 두 절의 비구니 스님들은 구중궁궐 속 왕비마마와 한양 도성에 모여든 비구 스님 사이를 내왕하며 불사를 매개했을 것이다. 
 

안동 선찰사 목조석가여래좌상, 조선 1622년, 높이 42㎝, 안동 선찰사, 보물. 사진=국가유산청 

푸른 비단에 붉은 글씨로 쓴 바람
장렬 왕후가 발원했던 불상들은 1661년(효종 2)에 자수원과 인수원이 폐사된 이후 가까이는 근기(近畿, 서울에서 가까운 경기도 지역), 멀리는 경상도에 이르기까지 전국의 인연 있는 사찰로 흩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간 지장암 목조비로자나여래좌상을 필두로 서울 칠보사(七寶寺)의 목조석가여래좌상과 안동 선찰사(仙刹寺)의 목조석가여래좌상이 자수사와 인수사에 봉안됐던 11존의 일부로 밝혀졌다. 아쉽게도 1622년에 함께 조성한 불화 7점의 소재에 대해서는 아직 알려진 바 없다. 이 3존의 불상에서는 푸른 명주 위에 붉은 글씨로 적은 발원문이 각각 1점씩 발견됐다. 

발원문을 통해 1622년 장렬 왕후의 불사에서 당대 최고의 고승 벽암 각성(碧巖覺性, 1575~1660)이 증명(證明)의 소임을 맡았고, 현진(玄眞), 수연(守衍), 응원(應元) 등 전국 각지에서 자신들의 유파(流派)를 이끌고 활약했던 승장(僧匠)들이 대거 참여해 공동으로 불상을 제작했음이 밝혀졌다. 왕후가 직접 발원하고 임진왜란과 뒤이은 병자호란 이후 전국 사찰의 재건 불사를 이끌었던 각성이 불사를 지휘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발원문에는 장렬 왕후의 개인적인, 동시에 국가적인 발원이 담겨 있다. 불사의 일차적인 동기는 임금과 본인의 아들인 세자와 세자빈 내외를 위해 복을 빌고, 먼저 세상을 뜬 직계 가족들의 명복을 함께 비는 데 있었다. 작고한 친정 부모, 자신이 낳은 자녀들 가운데 먼저 세상을 떠난 왕자 1명과 공주 2명, 그리고 세자빈 박씨 소생의 왕자, 세상을 떠난 친정 형제들이 극락에 왕생하길 빈 것이다. 나아가 장렬 왕후는 조선의 왕비이자 임진왜란을 몸소 겪었던 사람으로서 동쪽의 왜와 북쪽의 오랑캐에 의한 전쟁이 완전히 종식되어 국가가 안녕하기를 빌었다. 임진왜란의 와중에 갓 출산한 왕자를 잃는 고통을 겪었던 왕후의 진솔한 바람이었다. 

▶한줄 요약 
장렬 왕후는 독실한 불교 신자로, 불상을 조성해 도성 안팎의 사찰에 하사하는 등의 불사를 통해 개인적 소망과 국가의 평안을 함께 기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