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무원장 진우 스님의 Weekly 선명상] 35. 보시의 마음으로
보시, 번뇌·고민 비우는 수행 ‘사람 人’, 의지하며 살아간다는 의미 남 돕기 위해선 자신의 삼독심 비워야 본래 내 것 없어…잠시 머무는 것일 뿐 보시 통해 집착하는 습관들 바꿔 나가길
[오늘의 명상]
지옥에서는 숟가락이 길어 스스로 먹지 못하고
극락에서는 긴 숟가락이라도 서로 먹여 준다 하네.
내 먹겠다 욕심내면 스스로 먹지 못하고
남 위해 보시(布施, 베품)하면 내게 복(福)을 먹여 준다네.
만약 세상에 아무도 없이 나 홀로 남겨졌다면 어떻게 살아갈까? 다른 것은 모두 차치하고서라도 우선 먹는 것부터 해결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 정도 되면 원수라도 옆에 있기를 바랄 겁니다.
한자의 ‘사람 인(人)’자는 서로 의지하며 살아간다는 의미라고 합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남을 위해 쓰기를 아까워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연과 다른 사람들의 도움 없이는 한순간이라도 버티기가 힘듭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습니다. ‘스스로 돕는다’는 의미는 열심히 노력하는 것을 뜻하기도 하지만, ‘노력한다’는 것은 엄밀하게 말하여 남을 돕는 의미가 더 큽니다.
남을 돕기 위해서는 탐하고 성내고 어리석은 자신의 ‘삼독심(三毒心)’을 비워야 합니다. 물이 정체되어 있으면 썩게 되는 것과 같이 모든 것은 서로 윤활하게 오고 가야 그 가치가 빛나게 됩니다. ‘경세제민(經世濟民)’의 ‘경제(經濟)’도 눈을 굴리면 큰 눈덩이가 만들어 지는 것과 같이 막힘없이 주고받는 가운데 더욱 번성하는 겁니다.
그릇에 잡동사니가 가득 차 있으면 값진 보석이 생긴다 해도 담을 공간이 없어 더 이상 담지 못하는 것과 같이 그릇을 제때 비워야 더욱 소중한 것을 담아 낼 수 있습니다. 씨앗을 심을 때는 작은 구덩이라도 파고 묻어야 하듯이 더욱 소중한 것을 심기 위해서는 있는 것을 우선 퍼내야 합니다.
본래 내 것이란 없습니다. 들고 나는 인연 따라 잠시 머물렀다 흩어지는 것이 자연의 이치이자 우주의 질서요, 공(空)함의 진리입니다.
보시(布施)란 걸림에 따른 번뇌와 고민을 비우는 수행입니다. 그러니 뺏기거나 잃어버리는 것이라 생각하지 말고, 과감하고 흔연스런 마음으로 집착하지 않는 습(習)을 가꿔 나가십시오. 그러면 그 공덕은 부메랑이 되어 엄청난 복(福)으로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썰물이 빠져나간 후에는 반드시 밀물이 밀려옵니다. 이러한 이치를 항상 염두에 두고 살아가게 된다면 혹여 나가는 것이 있다 한들 그리 애석치는 않을 것입니다.
[오늘의 명상]
사랑한다는 것은 기쁨과 슬픔의 쌍둥이 아이를 갖는 것.
한 아이는 키우고 한 아이는 버릴 수 있겠는가.
두 아이를 모두 키울 수 없다면
애초에 사랑이라는 아이를 태어나게 하지 말지니….
불가(佛家)에 출가하여 수행자가 되는 이유는 간단하니, 애초에 사랑을 하지 않기 위함입니다. 사람뿐만이 아니라 무엇을 사랑한다는 것은 기쁨과 즐거움, 행복을 위해 집착하는 마음의 감정을 갖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마음의 모습이란 낮과 밤과 같고, 밀물과 썰물과 같고, 여름과 겨울과 같고, 산이 높으면 골이 깊은 것과 같고, 빛이 강하면 그림자가 짙은 것과 같고, 올라가면 내려와야 하는 것과 같고, 멀리 가면 돌아오는 길이 먼 것과 같고, 앞이 있으면 뒤가 있는 것과 같고, 생겨난 것은 반드시 사라지는 것과 같이 양면성이 있습니다. 이처럼 두 가지의 감정이 서로 교차하여 윤회(輪廻)하게 되는 인과(因果)가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무슨 생각을 하던, 어떤 일을 하던, 그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던 두 가지의 감정을 벗어날 수 없으니 마치 늪에 빠져 발버둥치며 허우적거릴수록 헤어나오지 못하는 모습과 다를 바 없습니다.
때문에 수행(修行)이란 두 가지의 상대적인 마음을 벗어나기 위한 수단과 방법을 의미합니다. 그 대표적인 방법이 참선(參禪)인데, 선(禪)이란 분별하는 생각과 감정을 일으키지 않게 하는 고도의 마음 수행입니다.
분별된 생각과 감정을 일으키지 않는 상태에서 하는 말과 생각과 행동은 인과에 의한 업보(業報)와 과보(果報)가 생기지 않습니다.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말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감정의 기복(起復)이 생기지 않으므로 마음은 항상 고요하고 편안하고 자유자재한 상태가 됩니다.
다만 참선을 하는 데 있어서 반드시 갖춰야 할 전제 조건이 있습니다. 마음의 모양과 세상의 모습은 바로 두 가지 마음이 서로 교차하여 나타나는 모습임을 알아야 합니다. 즉, 이것이 생기면 다른 저것도 반드시 생겨난다는 인과의 모습을 깊이 깨닫고 믿어 모든 일과 사안에 더 이상 미련을 두거나 집착하지 않는 마음 자세를 갖춰야 합니다.
따라서 이러한 인과의 모습을 여실히 알아 깊은 신심을 가지게 된다면 더 이상 탐하거나 성내거나 쓸데없는 생각을 하지 않게 됩니다. 하지만 문제는 이러한 내용을 충분히 이해하더라도 뼛속까지 배어 있는 습기(習氣) 때문에 업의 모습이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참선은 바로 마음의 모습이나 세상의 모습에 대해 더 이상 시시비비(是是非非)의 의심을 하지 않고, 충만된 신심(信心)을 바탕으로 행동과 말과 생각에 있어서 분별된 감정을 일으키지 않고 몸에 밴 습기[삼업·三業-행동·말·생각]를 빼기 위한 피나는 수행입니다.
더 이상 삼독심(三毒心)에 집착하지 않고 삼업을 청정(淸淨)히 하면 육근(六根-눈·귀·코·혀·몸·생각) 또한 청정하게 되며 나아가 매사에 선(禪)을 행함으로써 늘 안녕(安寧)된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육바라밀(六波羅蜜-보시하고, 계를 지키고, 참고, 노력하고, 분별하지 않고, 지혜를 갖춤)과 염불, 기도, 정진이 곧 참선(參禪)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