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원의 불교미학산책] 17. 정각원 불단(상단) 3
아미타불, 방편일까? 한국불교 특수성 삼문수업에 있어 정토교, 간화선·화엄학 위상 의문 미타정토는 상식을 뛰어넘은 세계
우리나라 불교의 특색이란 무엇일까? 같은 한자 문화권인 중국과 일본의 불교와 견준다면, 우리나라 불교의 특수성은 삼문수업(三門修業)에 있다.
중국불교는 실천 중심의 선(禪)과 정토(淨土)에 있고. 반대로 일본불교는 종파불교로 각 종이 서로 교학의 우수함을 내세움으로써 종학(宗學)이 발달했다고 여겨진다.
우리나라 불교의 경우 실천으로서 선과 교학으로서 화엄, 의례로서 정토라는 세 가지 문을 세웠는데, 이를 삼문수업이라고 한다.
즉, 선을 닦는 경절문(徑截門), 화엄을 배우는 원돈문(圓頓門), 정토의례를 중심으로 한 염불문(念佛門)이다.
이렇게 본다면 경절문-수행, 원돈문-교학, 염불문-신앙이라는 형태로 실천이나 교학 한쪽에 집중하는 중국·일본의 불교보다 종합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5가7종의 가풍 중 유독 임제종과 간화선만을 선택하는 경절문과 팔만사천의 경전과 논서 속에서도 오로지 화엄만을 강조하는 면에서 외골수적 면모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정토교가 우리나라 불교에서 간화선과 화엄학에 버금가는 위상을 갖고 있는 것이 맞을까? 삼문이 평등한 것이 아니라, 대궐집에 주인들이 드나드는 대문이 두 개 있고, 그 옆 눈에 잘 띄지도 않는 곳에 시종들이 오가는 쪽문 하나 있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정각원 상단의 부처님 앞에서 이런 사색을 갑자기 쏟아내는 이유는 당연하게도 정각원 부처님이 아미타불이기 때문이다. 선방에서 방부를 틀거나 강원과 율원에서 연찬하는 일은 스님들의 이력에 당당히 적히는 반면, 부전을 살았다는 사실은 크게 자랑하거나 이력으로 여기지 않는 세태 속에서 우리나라 불교학의 최대 거점인 동국대 주법당에는 왜 아미타불을 모셨을까? 이것이 오늘 우리가 산책할 사색의 길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말이 길어져 미처 언급하지 못한 것이 아미타불 이야기이다. 아미타불 이야기를 독자층 대부분은 알고 계시겠지만, 처음 접하시는 분들을 위해 설명하고자 한다.
아미타불은 오랜 옛날 세자재왕여래께서 나타나셨을 때 한 나라의 왕이었다. 그는 붓다께서 세상에 나오셨음을 알고 왕위를 버리고 출가해 법장 스님이 됐는데, 세자재왕여래 앞에 나아가, 반드시 붓다가 되어 모든 중생을 구원하리라 서원을 세웠다. 그리고 세자재왕여래의 위신력을 빌려 무한히 많은 여러 붓다의 정토들을 관찰한 다음, 모든 불국토의 좋은 점을 모아 자신의 정토를 계획하였다. 한마디로 자신이 세울 정토의 블루프린트(청사진)를 그린 것이다.
이 블루프린트를 그리는 데 걸린 시간이 무려 5겁(劫)이다. 한 변의 길이가 40㎞인 정육면체의 강철을 선녀의 옷깃으로 100년마다 한 번씩 쓸어 다 닳을 때까지의 시간을 1겁이라고 한다. 단순 계산으로 서울에서 대전의 거리가 대략 200㎞이다. 서울과 대전까지의 거리를 한 변으로 하는 정육면체의 강철 덩어리를 선녀의 옷깃으로 100년마다 한 번씩 쓸어서 다 닳을 시간 동안 법장 스님은 자신의 블루프린트를 작성한 것이다. 얼마나 야심만만한 그림이었을까.
그는 완성된 자신의 블루프린트를 들고 다시 세자재왕여래 앞으로 갔다.(참고로 세자제왕여래의 수명은 42겁이었다고 한다.) 자신이 존경하는 붓다 앞에서 법장 스님은 당당하게 블루프린트의 프리젠테이션을 시작하는데, 그것이 그 유명한 48대원이다.
48대원은 법장 스님이 자신이 어떤 부처가 될 것인지, 자신이 만들 정토가 어떨 것인지, 그리고 중생들을 어떻게 구제할 것인지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를 순서대로 섭법신원(攝法身願), 섭정토원(攝淨土願), 섭중생원(攝衆生願)이라고 하며 48개 각각의 원은 이 세 가지 원 중 하나에 속하게 된다.
아미타불 신앙의 핵심으로 알려진 십념왕생원은, 중생이 자신의 이름을 열 번만 부르면 임종 때 반드시 데리러 오신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세부적으로는 48대원 중 제18원이며, 큰 범주에서는 섭중생원에 속한다.
자기 스스로가 모든 붓다 중에서 최고의 붓다가 될 것이고, 자신의 세계가 모든 정토 중 최고의 정토가 될 것이며, 자신의 세계에 태어날 중생들은 반드시 붓다가 될 것이라는 이 야심을 법장 스님은 세자재왕여래 앞에서 거침없이 드러낸다.
세자재왕여래는 법장 스님에게 그의 계획이 블루프린트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세상에 실현될 것이며 48대원 모두가 성취되리라 확언하셨다.
그러고서 법장 스님은 자신의 계획을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진행시켜 나갔다. 이것이 바로 법장 스님의 보살행이었다. 그 보살행을 통해 48대원의 서원이 모두 실현되는 날, 그는 아미타란 이름의 부처가 됐으며 그의 정토는 극락, 즉 극한으로 즐거운 세계라 하였다. 이 세계는 우리가 사는 지구이며, 불교에서는 남섬부주에서 서쪽으로 10만억 국토를 지나면 있다고 한다. 아미타불의 수명은 아직도 무한히 남아 있다고 한다.
아미타불께서 극락에 계속 계시는 한 우리가 그의 이름을 부르면 임종 시에 반드시 우리를 데리러 오신다고 한다.
고성염불이니 염불삼매니 하지만 사실 그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지성으로 열심히 할 필요도 없다. 열 번은 불러야 한다는 것도 사실이 아니다.
법장 스님은 정확하게는 ‘내지십념(乃至十念)’이라 하셨다. 원효정토교학의 일인자이신 보광 스님은 이 내지십념을 한 번 내지 열 번이라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하셨는데, 가장 타당한 이해로 보인다. 독자분들은 지금 한 번만 아미타불이라고 외워 보시라. 반드시 아미타불이 데리러 오시리라.
아미타불 이야기를 동화처럼 읽으신 분들이 많으리라. 현대 과학은 우주의 나이를 150억 년으로 추정하는데, 그렇다면 붓다의 시간은 무엇이며, 10만억 국토라는 은하단을 뛰어넘는 붓다의 공간은 무엇인지, 그저 상상의 세계가 아닌지 말이다.
현실 긍정의 선과 화엄은 좋아해도 이 정토문은 가볍게 동화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고, 간단히 이 동화를 방편이라고 이름해 버리는 데 반론을 제기하는 것이 이번 글의 목표였다. 그러나 지면은 한정돼 있어 다음 호에서 이를 이어가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