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보배의 24번의 계절]17. 백로_서울 길을 걷다
대기 온도 변화 알리는 자연의 전언
백로(白露)는 지나는 것과 새로운 시간의 어딘가에서 흔들리는 계절. 미처 전하지 못한 마음과 그리움의 온기가 새벽이슬로 맺히는 절기다.
아직은 물기 머금은 더운 바람이 등허리를 적시지만, 일순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 속에 가을은 어느새 머물러 있다. 이른 새벽, 대지를 적시는 이슬로 먼저 알려 주는 절기. 백로가 시작된다.
이슬의 시간
새벽이슬이 뜰 오동나무에 내리니
둥글둥글 맺힌 것이 새하얀 옥 같구나
봉암 채지홍의 〈봉암집〉에 담긴 시 ‘백로’의 한 구절이다. 한 해의 15번째 절기이자, 하얀 이슬이라는 의미를 지닌 백로.
이 무렵의 이른 아침 풍경은 뽀얀 안개와 발아래 대지를 적시는 이슬방울로 가득하다. 밤새 풀숲 위에 맺힌 저 수천수만의 이슬은 누가 옮겨다 놓은 것일까.
백로 무렵, 여느 때와 다름없는 하루가 저물고 나면, 대기에는 미묘한 변화가 시작된다. 아직 한낮의 뜨거운 기운이 남아 있는 공기는 밤새 찬 기운과 만나 바삐 움직이고, 마침내 하나의 물방울로 변해 세상에 존재를 드러낸다. 그렇게 하나둘 맺힌 이슬들은 온몸으로 세상을 투영하고, 아직 잠든 세상의 색을 담아 하얗게 피어나는 것이다.
대기의 온도가 낮아지면 수증기가 응결하기 시작하는 ‘이슬점’의 마법이 펼쳐진다. 오늘날 대중화된 냉난방 장치는 언제든 마음대로 공기를 뒤섞고, 그와 함께 이슬이 맺혀 흐르는 결로 현상도 흔히 볼 수 있다. 하지만 옛사람들은 이 무렵의 새벽이슬에서 계절의 변화를 읽었고, 이 절기를 대표하는 하나의 상징으로 삼았다.
백로. 이 이슬의 시간은 대기의 온도가 변하고 있음을 알리는, 이른바 자연의 전언(傳言)인 것이다.
한 계절이 또 다른 계절과 맞부딪히며 만들어 내는 힘. 그 천지의 기운이 온 세상을 유영하던 저 이슬에 스미지 않을 리 없다.
〈동의보감〉은 사람의 몸을 건강하게 하고, 병을 낫게 하는 물을 33가지로 분류해 놓았다. 그중 추로수(秋露水)는 백로 무렵부터 얻을 수 있는 가을의 이슬로, 소갈증을 낫게 하고 피부를 윤택하게 한다고. 또 백로에 콩잎 위에 내린 새벽이슬을 모아 마시면 속병이 낫는다는 민간요법이 전해지기도 했다.
이 계절이면 온몸의 영양소를 최대로 끌어내며 성장하는 콩 줄기. 이제 조금만 지나면 콩잎은 눈부시게 빛나는 황금빛 단풍으로 변할 것이다. 순금의 잔처럼 빛나는 그 위에 천지의 기운이 담긴 새벽이슬이라면 암리타(인도 신화 속 신들이 마시는 음료)인들 부러울까.
지금은 쉬이 만날 수 없는, 우리 손에서 사라져 버린 하늘의 영약. 그 오랜 신비가 이 계절에 있었다.
포도가 익는다
백로를 상징하는 또 다른 존재가 있다면 그건 바로 포도다. 백로를 이르는 또 다른 말인 ‘포도순절(葡萄旬節)’.
이 무렵은 뭇 과실들이 막바지 당도를 높이며 성장하는 시기이지만, 그중에서 포도를 꼽는 것은 이 탐스러운 과일이 풍요와 다산, 가문의 번영을 상징하기 때문이리라.
옛사람들이 편지 첫머리에 ‘포도순절(葡萄旬節)에 기체만강(氣體萬康) 하옵시고’라거나, 포도 넝쿨이 그려진 도자와 서화 등을 집안 곳곳에 둔 것은 모두 그런 마음으로 복을 기원하는 뜻이었을 것이다.
상징은 많은 이야기를 담는다. 때로는 긴긴 글귀보다 더 많은 사연을 담고, 마치 포도 넝쿨처럼 꼬리에 꼬리를 물어 인간의 마음을 전하는 것이다.
화엄사 성보박물관에 모셔진 서산 대사의 가사, 그 붉은 비단에 새겨진 포도와 다람쥐. 또 국보인 조선 시대 ‘백자 철화 포도 원숭이 무늬 항아리’처럼.
그중 원숭이의 의미는 더욱 남다르다. 이는 여느 길상 동물들이 단순히 부귀와 다산, 장수 등을 상징하는 것과 달리, 원숭이는 더 큰 감정을 전하기 때문이다.
날쌔고 영민한 원숭이는 출세와 지혜를, 또 〈서유기〉의 손오공처럼 벽사(邪)와 호신(護身)의 의미도 지닌다. 〈삼국유사〉에는 신라 시대 승려 이차돈이 순교하자 원숭이가 울었다는 기록도 전해진다. 하지만 유독 인간과 닮은 이 동물은 그 무엇보다 뜨거운 모성애를 상징한다.
창자가 끊어질 듯한 슬픔을 일컫는 ‘단장(斷腸)’. 이 또한 자식을 잃은 어미 원숭이가 애통함에 죽은 것에서 유래된 말이다. 또 불가에서는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에 ‘원숭이 달을 보고 새끼 생각에 울부짖듯/ 염려하는 생각으로 간장이 다 끊기네’라는 게송이 부모의 마음을 빗대어 전한다.
어머니가 껍질과 씨를 가려내고, 맛있는 포도 알만 아기의 입에 넣어 주는 사랑. 그 사랑을 ‘포도지정(葡萄之情)’이라 부르던가. 뭇 생명이 알알이 익어 가는 시간. 우리는 모두 이 포도의 계절을 지나 성장한, 다디단 사랑의 상징이다.
시간을 넘어
서울의 서쪽 끝 서오릉을 곁에 둔 산자락. 봉산(烽山)을 뒤로 두르고 은평구 일대를 한눈에 내려다보는 그곳에 황금빛 사찰이 있다. 산문을 들어서는 순간, 금빛으로 장엄한 법당이 찾아온 이의 걸음을 멈추게 하는 곳. 바로 수국사(守國寺)다.
눈부신 한낮의 햇살을 받아 더욱 찬란하게 빛나는 법당. 이곳은 세조 5년(1459), 세조의 맏아들 의경 세자가 요절하자 그의 극락왕생을 위해 세조에 의해 창건된 사찰이다. 본래는 정인사라는 이름이었으나, 화재로 인한 소실과 수차례의 중수를 거치며 수국사로 이름이 바뀌었다.
수국사는 1900년 월초 스님에 의해 또 한 차례 중창됐는데, 이는 1898년 당시 세자였던 순종이 병을 앓고 난 뒤, 아버지인 고종의 불사로 이루어진 것이다. 왕실의 명으로 순종의 건강을 기원하는 백일기도를 올린 지 80일째 되던 날, 세자의 꿈에 한 노승이 나타나 병을 낫게 해 주겠다며 금침을 놓았다. 그리고 꿈에서 깬 세자가 말끔히 병을 털고 일어나자 그에 대한 보답으로 이뤄진 것이다. 이때의 불사는 고종이 자신의 내탕금을 내어 한 것으로, 세자의 회복에 아버지인 그가 얼마나 안도하고 기뻐했는지 고스란히 전해진다.
수국사가 황금사찰로 거듭난 것은 6·25 전쟁 이후 쇠락한 도량을 중창하며 근래에 변모한 결과이다.
화려한 금빛 외관과 달리 수국사 도량은 내내 고요하고 평온한 산사의 기운으로 가득하다. 그리고 그 속에 가족을 위해 기도하는 누군가의 어머니들이 함께 있다.
오래전 아들을 그린 한 나라의 왕부터 이 시대의 어버이까지, 포도지정의 시간은 여전히 이 금빛 도량 안에 생생히 머문다.
생과 사를 넘고, 과거와 현재를 넘어 살아오는 무언가가 있다. 환영 같은 새벽이슬도, 뭇 곡식과 과실을 살찌우는 저 햇살도 이 절기가 지나면 잠시 잊히고 말 것들. 하지만 그 시간이 키워 낸 어떤 것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빛나는 것이다. 마치 당신처럼.
▶한줄 요약
백로는 하얀 이슬이라는 의미를 지닌 한 해의 15번째 절기로, 대기의 온도가 변하고 있음을 알리는 자연의 전언(傳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