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법일기] 5억 년 버튼  

2025-09-05     눌은 스님 /전 범어사 포교국장

‘유정이 엄마’라는 호칭이 입에 익어 ‘강미화 神位(신위)’라고 적힌 위패가 좀 낯설었다. 남편 거사님과 이제 겨우 고3인 유정이의 상심에 비할까마는 나 역시 15년 가까운 인연의 깊이에 차오르는 감정을 수습하는 것이 어려웠다. 빈소에 앉아 염불을 마치고 나서 문득 ‘5억 년 버튼’이 생각났다.

5억 년 버튼은 스가하라 소타의 단편 만화 ‘모두의 토니오쨩’의 에피소드인 ‘아르바이트(BUTTON)’에 등장하는 물건이다. 누르면 100만엔(한화 약 950만원)이 나오는 버튼이 있다. 그 버튼을 누르면 누른 사람의 정신은 어딘가로 공간 이동해서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그저 깨어 있을 뿐인 5억 년의 시간을 보내게 된다. 하지만 끝나는 순간 정신뿐만 아니라 시간도 몸도 원래대로 돌아온다. 

이 만화의 주인공은 짧은 시간에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아르바이트를 찾다가 5억 년 버튼을 알게 된다. 옆에서 친구가 누르는 것을 봤을 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보여서 주인공은 그 버튼을 누르고,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 5억 년을 지내게 된다. 5억 년에 걸친 망상과 후회, 허무의 시간을 지나 깨달음과 우주와의 합일에 이른 주인공은, 5억 년이 지나고 마침내 본래의 세계로 돌아온다. 

그리고 이 모든 기억이 지워진 주인공은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100만엔을 벌었다고 좋아하고, 다시 16번을 연속으로 누른다. 80억 년의 방황이 시작되고, 만화는 끝난다.

어쩌면 우리는 5억 년 버튼까지는 아니어도, 70년이나 80년 버튼 정도는 누르고 있는지 모른다. 우리 육체는 지구 밖 미지의 것이 아니라, 지구가 탄생한 이래 끝없이 순환하고 있는 물질들의 조합으로 이뤄져 있다. 경전에서는 이것을 지수화풍(地水火風) 4대 원소의 조합으로 표현한다. 순환하는 물질의 조합에 따라 나는 어느 생에는 꽃이나 나무였으며, 어느 생은 바위나 강물이었고, 때로는 날짐승이나 들짐승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으로 태어나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나는 이전 내 삶들이 전혀 기억에 없다. 마치 버튼을 누른 것 같이 말이다.

5억 년 버튼을 누를 것인가, 절대 누르지 않을 것인가 서로 다른 입장을 가지게 하는 핵심은 ‘버튼을 누르기 전의 나’와 ‘누르고 나서의 나’는 같은 존재인가, 별개의 타인인가 하는 점이다. 이는 끝없이 윤회하는 중생의 전생과 현생은 연속된 존재인가 별개의 존재인가 하는 물음과도 맞닿아 있다.

다만 만화 속 5억 년 버튼은 5억 년의 시간을 홀로 보내게 하지만, 우리 삶은 결코 홀로 살다 가지 않는다는 점에서 극명하게 다르다. 내가 죽고 나서 업과 인연에 따라 새로운 몸으로 다시 세상에 날 때 이전 삶의 기억은 비록 없더라도, 내가 살면서 인연 맺은 사람들과 함께한 기억과 시간은 주변 모든 것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유정이 어머니 강미화 보살님은 내게 그런 분이었다. 늘 긍정적이고 밝은 웃음으로 주변에 힘을 주는 사람이었다. 우리 만남이 지구의 시간 동안 처음이 아니었을 것이므로, 어느 생에 다시 만날 것을 믿는다. 당신이 남긴 미소에 나의 세상이 더 밝아졌으므로 추모의 글을 눈물 대신 웃음으로 맺으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