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 붓다를 만나다] 17. 탑 안에 깃든 간절한 기도

수종사에 담긴 조선 왕실 여성들의 기도 

2025-08-29     이승혜 동아대 역사문화학부 교수
남양주 수종사 사리탑(사진 왼쪽, 조선 1439년)과 팔각오층석탑(오른쪽, 1493년경) 전경.사진 제공=국가유산청 

서울에서 멀지 않은 경기도 남양주 운길산(雲吉山) 자락에는 수종사(水鍾寺)라는 아담한 사찰이 있다. 수종사의 창건주나 연혁은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1459년(세조 5)에 세조가 병을 치료하기 위해 오대산에 거둥했다가 돌아오는 길에 창건했다는 이야기가 전하고 있어 왕실과 관련이 깊은 사찰임을 알 수 있다.

사람들에게 수종사는 북한강과 남한강이 합류하는 두물머리를 굽어보는 아름다운 풍광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조선시대에 많은 문인과 묵객들이 수종사를 찾아 수려한 경관을 노래하고 붓으로 남긴 것도 같은 이유였을 것이다. 또한 수종사는 다실 삼정헌(三鼎軒)을 통해 차 문화를 계승하고, 절을 찾은 이들에게 맑은 차 한 잔을 내어 주는 넉넉한 인심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수종사의 차 문화는 다산 정약용과 초의 선사의 교유로 거슬러 올라가는 유서 깊은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잊지 않아야 할 또 다른 수종사의 이야기가 있다. 바로 간절한 마음으로 누대에 걸쳐 수종사에서 기도를 올렸던 조선 왕실의 여성들 이야기이다. 대웅전 오른편에 자리한 조선시대의 사리탑과 석탑 안에 이들의 이야기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사리탑에 담긴 각별한 모자의 인연
조선 왕실은 수도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사찰에서 왕실을 위한 기도를 올리는 경우가 많았다. 수종사 역시 그러한 사찰 중 하나였던 것 같다. 수종사의 건축과 유물 중 가장 시대가 올라가는 것은 대웅전 오른쪽 뜰에 자리한 사리탑과 2기의 석탑이다. 

사리탑은 지붕 모양의 옥개석(屋蓋石)과 종 모양의 탑신을 지녔으며 상륜부(相輪部)를 갖춘 모습이다. 수종사 사리탑은 정교한 설계, 안정된 비례, 섬세한 표현 기법이 돋보이는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석조미술품이다. 지대석 표면에는 구름을 형상화한 운기문(雲氣紋)을 가득 새기고, 기단부 중 하단석은 연화문(蓮花紋), 하단석은 초화문(草花紋)을 새겨서 아름답게 장엄했다. 탑신석에는 꿈틀거리는 구름 사이로 꿈틀거리며 나르는 용 두 마리의 모습을 낮은 부조로 새겨 넣었다.

사리탑 옥개석 처마면에는 “太宗 太后/ 貞惠 翁主/ 舍利 造塔/ 施主 文化 柳氏/ 錦城 大君 正統/ 四年 己未 十月日”로 판독되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이를 통해 1439년(세종 21)에 문화 류씨(文化 柳氏)와 금성 대군 이유(錦城大君 李瑜, 1426~1457)가 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이 탑을 세우고, 그 공덕을 태종(太宗, 재위 1400~1418)과 의빈 권씨(懿嬪權氏, 1384~1457)의 외동딸인 정혜 옹주(貞惠翁主, ?~1424)에게 회향했음을 알 수 있다. 

명문에는 문화 류씨와 금성 대군만이 시주자로 기록돼 있지만, 사리탑의 조성 당시 의빈 권씨와 정혜 옹주의 남편인 박종우(朴從愚, ?~1464)가 생존해 있었기 때문에 이들도 불사에 동참했을 것이다. 또한, 정혜 옹주의 빈소(殯所)에 세종도 사제(賜祭)했던 것으로 보아 왕실 차원의 후원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1939년에 사리탑을 현재의 자리로 이건할 때 발견된 구슬 모양의 불사리(佛舍利) 14과(顆)는 사리를 위해 탑을 세웠다는 명문의 내용을 입증해 준다. 사리장엄구는 원나라에서 수입한 주름문청자항아리를 가장 바깥쪽 용기로 삼아 그 안에 금제구층소탑(金製九層小塔)과 수정사리병(水晶舍利甁)을 납입한 은제도금육각당(銀製鍍金六角堂)을 봉안한 구성이다. 

의빈 권씨는 1422년(세종 4) 5월에 태종이 승하하자 곧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되어 아침저녁으로 불법을 행할 정도로 불심이 깊었다. 비록 신료들의 반대로 세속의 삶으로 돌아오긴 했지만, 의빈 권씨는 일생에 걸쳐 독실히 불교를 믿었다. 태종이 승하한 지 2년 후인 1424년에는 정혜 옹주마저 요절했다. 의빈 권씨는 세종과 소헌 왕후 심씨의 여섯째 아들인 금성 대군을 맡아 양육하며 지아비와 자식을 먼저 떠나보낸 슬픔을 잊었을 것이다. 

의빈 권씨 슬하에서 자란 금성 대군은 어릴 때부터 불심이 깊었고, 평생에 걸쳐 불사(佛事)를 적극적으로 후원했다. 금성 대군은 1453년(단종 1)에 일흔이 된 의빈 권씨를 사가에서 봉양하겠다고 왕에게 청할 만큼 평생에 걸쳐 양모(養母)와 각별한 인연을 유지했다. 의빈 권씨를 향한 금성 대군의 효심은 아직 어린 나이였던 그가 사리탑에 시주하도록 이끌었을 것이다. 
 

수종사명 범종, 조선 1469년, 높이 48.9㎝, 국립중앙박물관.  사진 제공=emuseum 


탑 안에 봉안한 후궁들의 모정(母情)
세조의 중창 불사 이후 수종사는 여성들의 기도처로서 특별히 중시되었던 것 같다. 특히 성종(成宗, 재위 1469~1494) 대(代)에는 수종사와 연이 깊었던 소혜 왕후 한씨(昭惠王后 韓氏, 1437~1504)의 비호 아래 사세가 커지면서 비구니 스님과 사족(士族) 여성들이 이곳을 찾아 여러 날에 걸쳐 재(齋)를 지내고 불사를 벌였다. 한편 소혜 왕후와 수종사의 인연은 그녀가 세자빈이었던 젊은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녀는 수빈(粹嬪) 시절인 1469년(예종 1)에 도성 안 비구니 사찰인 정업원(淨業院)의 주지 이씨와 함께 수종사에 소종(小鐘)을 시주했다. 

1493년(성종 24) 6월, 성종의 후궁인 숙용 홍씨(淑容洪氏, 1457~1510), 숙용 정씨(淑容鄭氏, ?~1505), 숙원 김씨(淑媛金氏, 1475 이전~1524 이후)는 국왕의 성수만세(聖壽萬世)와 소생 자녀들의 복수(福壽)를 기원하고, 왕대비 두 분과 중궁 및 세자의 수명장수를 빌며 옛 불상을 중수해 탑에 안치했다. 이 같은 내용은 1957년에 팔각오층석탑의 초층 탑신석 안에서 발견된 석가여래좌상의 복장(腹藏) 발원문을 통해 비로소 알려졌다. 세 사람의 후궁은 “어린 자식은 뼈와 살인 바 정이 어찌 도탑지 아니하랴[兒息骨肉 情所篤也]”는 구절이나, “모든 아들과 사위들이 잘 자라 건강하고 마음 편안하며 복과 수명이 더욱 높아[諸子甥○保康寧 福壽增崇]”지길 바란다는 구절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자녀들을 향한 모정을 감추지 않고 발원문에 드러냈다.

이 복장 발원문의 말미에는 시주(施主)가 별도로 기록돼 있다. “숙용 정씨, 안양군양주, 태안군, 승복(淑容鄭氏 安陽君兩主 奉安郡 承福)”과 같은 식으로 본인의 이름을 먼저 적고 그 밑에 소생 자녀들을 태어난 순서대로 일일이 적은 것이 눈에 들어온다. 옛 불상을 중수하고 탑 안에 봉안해 얻는 공덕이 모든 자녀에게 골고루 돌아가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미 출가한 자녀 부부에서 아직 군이나 옹주로 책봉 받지 못한 어린 자녀에 이르기까지 이름을 하나하나 적어 넣었을 것이다. 

복장 발원문에 언급된 ‘석가여래 1구’는 실제로는 불감(佛龕) 안에 봉안된 채 발견된 금동석가여래삼존상에 해당하며, ‘관음보살 1구’는 파편으로 발견된 목조불감과 목조관음보살삼존상에 해당한다. 이 석가여래상의 바닥을 막은 은판 위에는 음각으로 ‘시주 명빈 김씨(施主 明嬪 金氏)’라 새겨져 있다. 태종의 후궁인 명빈 김씨(?~1479)는 태종 대부터 성종 대에 이르기까지 오랫동안 내명부를 지킨 왕실의 어른이자, 여러 불경을 간행하고 불상을 발원한 독실한 재가 신도였다. 이 석가여래좌상은 명빈 김씨가 평소에 기도를 드리고자 조성한 원불(願佛)이었을 것이다. 자녀가 없었던 명빈 김씨가 세상을 떠난 후 이 불상을 성종의 후궁들이 지니고 있다가 수리한 후 새롭게 점안(點眼)해 탑 안에 봉안한 것은 아닐까.
 

금동석가여래좌상, 조선 1479년 이전(1493년 중수), 높이 15.0㎝, 수종사(불교중앙박물관 기탁), 보물. 사진 제공=국가유산청

 

탑 속에 깃든 추선(追善)의 마음
수종사는 17세기에도 왕실의 기도처 역할을 이어갔다. 1628년(인조 6)에 소성정의 대왕대비(昭聖貞懿大王大妃)는 수종사 팔각오층석탑을 열어 기단 중대석 및 1층, 2층, 3층의 옥개석에 24존의 불상을 봉안하도록 했다. 소성정의 대왕대비는 곧 선조(宣祖, 재위 1567~1608)의 계비인 인목 왕후(仁穆王后, 1584~1632)이다. 그녀는 광해군(光海君, 재위 1608~1623)이 즉위한 후 아들인 영창 대군(永昌大君, 1606~1614)과 아버지 김제남(金悌男, 1562~1613)을 잃었다. 1618년(광해 10)에는 폐서인이 되어 딸인 정명 공주(貞明公主, 1603~1685)와 함께 서궁(西宮, 현재의 덕수궁)에 유폐됐다. 

 인목 왕후는 1623년(인조 1)에 인조반정으로 복위된 뒤에는 정치적 혼란 속에서 희생된 일가족의 극락왕생과 살아남은 이들의 수명장수를 위해 자주 불사를 일으켰다. 수종사 팔각오층석탑에 봉안된 비로자나여래좌상의 대좌 바닥에 새겨진 명문에는 중생을 구제하기 위한 마음에서 23존의 불상을 보탑(寶塔)에 안치했다고만 돼 있다. 

명문에는 23존이라 적혀 있으나 실제로는 24존의 불상이 발견된 것이 흥미롭다. 많은 숫자의 불상을 한꺼번에 조성하는 큰 불사를 일으킨 배경에는 아들인 영창 대군과 유명을 달리한 가족들의 명복을 비는 어머니의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당대 최고의 승려 장인 중 한 명인 화원(員) 성인(性仁)이 조성한 불상들은 삼등신의 아기와 같은 비례로 몸에 비해 머리가 크다. 둥근 얼굴, 살이 올라 통통한 뺨, 작은 입으로 미소를 지은 표정은 귀여운 인상을 준다. 이 불상군은 소조불과 목조불이 주류를 이루던 17세기, 왕실 여성의 재정적 지원과 깊은 신앙심을 바탕으로 조성된 다수의 소형 금동불상으로서 중요하다. 또한 선대에 불상을 봉안했던 석탑을 열어 그 안에 추가로 불상을 봉안했다는 점에서 영험한 왕실 기도처로서 수종사의 위상을 엿볼 수 있다. 

금동비로자나여래좌상, 조선 1628년, 높이 12.0㎝, 수종사(불교중앙박물관 기탁), 보물.사진 제공=국가유산청

▶한줄 요약 
수종사에는 누대에 걸쳐 기도를 올린 조선 왕실 여성들의 자취가 서려 있다. 대웅전 오른편에 자리한 조선시대의 사리탑과 석탑 안에 이들의 이야기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