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성미의 심심톡톡] 피해 아동에 “잘못 없다”는 확신 줘야
45 육군비구를 제재한 부처님, 학교 폭력(1) 폭력, 가해자 힘 과시·집단 결속 구실 날짜·상황 기록해 공식 기관에 알려야
학교 폭력은 언제나 한쪽의 문제가 아니다. 어제까지 웃음 많고 인기 있던 아이가 오늘은 가해자로 불리고, 조용하고 배려심 깊은 아이가 하루아침에 피해자가 돼 홀로 고통 속에 빠진다. 교실 안에서는 가해와 피해의 경계가 순식간에 바뀌며 그 속에서 아이들은 깊은 상처를 받는다. 이번 글에서는 그중에서도 가장 큰 고통을 감당해야 하는 피해 아동의 자리를 먼저 살펴보고자 한다.
초등학교 5학년 한 여자아이는 친구들에게서 “넌 왜 그렇게 행동해?”라는 말을 반복적으로 들어야 했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 며칠이 지나자 아무도 말을 걸어 주지 않았고 점심시간에도 혼자 남겨졌다. 아이는 “내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어요. 그냥 제가 없어졌으면 좋겠어요”라고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작은 따돌림이 곧 존재 자체를 부정당하는 두려움으로 이어진 것이다.
학교 폭력을 말할 때 우리는 종종 ‘그 아이가 달라서 당하는 게 아닐까?’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피해 아동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잘못된 시선이다. 아이들이 폭력을 당하는 이유는 없다. 폭력은 피해자의 성격이나 행동 때문이 아니라, 가해자가 힘을 과시하거나 집단이 결속하기 위해 만들어 낸 구실일 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왜 그 아이가?”라는 질문 대신 “왜 아무도 막지 않았는가?”라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피해 아동의 심리는 단계적으로 무너진다. 두려움과 불안이 일상에 스며들고 곧 자존감 저하와 자기 비난으로 이어진다. 이 과정에서 고립감과 외로움이 깊어지고 결국 우울과 무기력 속에서 극단적인 생각까지 품게 된다. 또래와 함께 있어도 마음은 늘 긴장 속에 있으며, 누군가 웃는 소리만 들어도 ‘나를 비웃는 건 아닐까’라는 과잉 경계가 불안을 더 키운다. 이 고통은 단순한 일시적 반응이 아니라 성장 과정 전체에 남아 관계 맺기와 미래를 흔들어 놓기도 한다.
따라서 피해 아동에게는 무엇보다 즉각적인 보호 조치가 필요하다. 안전한 공간을 보장하고 심리적 안정을 회복할 수 있는 전문 상담과 돌봄을 제공해야 한다. 다시 교실로 돌아가더라도 두려움 없이 생활할 수 있도록 제도적 장치가 마련돼야 한다.
피해 아동은 또한 작은 신호로 도움을 요청한다. 갑작스러운 두통이나 복통, 반복되는 멍, 잦은 눈물, 등교 거부나 성적 저하, 학교 이야기를 회피하는 모습까지 모두가 도움의 신호일 수 있다. “괜찮다”라는 말 뒤에 숨겨진 목소리를 놓쳐서는 안 된다.
피해 아동을 지켜 내기 위해서는 현실적인 대처가 뒤따라야 한다. 무엇보다 즉시 알리고 기록하는 것이 중요하다. 아이의 말과 행동, 몸에 난 상처를 세심히 관찰하고 작은 변화라도 날짜와 상황을 기록해 둬야 한다. 증거를 바탕으로 담임 교사, 학교 전담 경찰관, 교육청 신고센터 등 공식 기관에 알려야 한다. 피해 아동 혼자 문제를 감당하도록 두지 않고, 제도적 보호망을 가동하는 것이 첫걸음이다.
가정에서는 아이를 다그치거나 원인을 추궁하지 말고 “네 잘못이 아니야”라는 확신을 반복해서 전해 주어야 한다. 또래 집단에 복귀하도록 성급하게 재촉하기보다 안전한 대안 공간(상담실, 지역 아동센터, 신뢰할 수 있는 친척 집 등)을 마련해 아이가 숨 쉴 수 있게 하는 것도 필요하다. 학교는 가해 학생을 징계하는 데 그치지 않고 피해 아동의 자리 배치, 등·하교 안전 동행, 보호 교사 배정 등 구체적인 조치를 취해야 한다. 상담 전문가와 연계해 피해 아동이 스스로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기회를 보장하는 것도 필수적이다.
이럴 때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아이에게 “너는 잘못이 없다”는 확신을 주는 일이다. 피해 사실을 부정하거나 무시하지 말고, 아이가 두려움과 분노를 안전하게 표현할 수 있도록 들어주어야 한다. 이후 전문 상담과 치료를 통해 회복의 과정을 함께 걸어야 한다. 무엇보다 시간이 흘렀다고 상처가 저절로 아물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꾸준히 곁을 지켜 주고 지지할 때 아이는 다시 세상에 대한 믿음을 회복할 수 있다.
부처님 당시에도 공동체 안에는 늘 문제를 일으키는 이들이 있었다. 바로 ‘육군비구(六群比丘)’라 불리던 스님들이다. 이들은 출가자의 본분을 저버리고 무리를 지어 다니며 갖가지 악행을 저질렀다. 수행은 뒷전이고 어떻게 하면 더 좋은 공양을 받을지, 마음에 들지 않는 스님을 어떻게 몰아낼지만 몰두했다. 때로는 공동체의 화합을 깨뜨리고, 때로는 다른 이들을 상처 입히는 일을 서슴지 않았다.
그들의 행동은 결국 공동체를 어지럽히는 요인이 되었지만 동시에 제재와 교육의 대상이 됐고 새로운 계율이 제정되는 계기가 됐다. 즉, 문제를 일으킨 이들은 꾸지람과 지도를 받아야 할 존재였으며 공동체는 그들을 단호히 다루면서도 제도를 정비해 전체가 더욱 건강하게 설 수 있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의 일탈이 공동체 속에서 오래도록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피해자에게 책임을 전가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잘못은 가해자에게 있었고 공동체는 그 잘못을 바로잡는 데 힘을 모았다.
학교 폭력 역시 다르지 않다. 가해자는 분명히 공동체 안에 존재한다. 그들은 제재와 교육의 대상이 돼야 하며, 폭력의 책임은 언제나 폭력을 행사한 쪽에 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여전히 “피해자가 소극적이어서, 혹은 눈에 띄어서”라는 식의 왜곡된 인식을 갖기도 한다. 이는 잘못된 시선이며, 피해 아동에게 또 다른 상처를 남긴다. 아이가 다른 점이 있었다 해도 그것은 존중받아야 할 개성이자 다양성이지, 폭력의 구실이 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