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묻는 이에게] 안 되는 일도 되는 일도 다 버린다면 안 되는 일은 없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시급한 문제는 정진하는 일입니다 진실한 마음, 기대지 않는 마음, 남을 헐뜯지 않는 마음,  남을 증오하고 업신여기고 둘로 보고 앙심을 먹고 이러한 마음이 몰락 없어져야 이름해서 도에 이를 수 있는 것입니다.

2025-08-22     대행 스님
그림=최주현 작가

오늘은 우리가 지나 내려온 역사로부터 현재의 불교는 어떠하며 앞으로 어떻게 해 나가야 한다는 거, 우리는 살면서 어떻게 해야 한다는 거, 부처님 법이 따로 있지 않고 생활이라는 거를 조금 말씀 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유구한 역사라고 모두들 말을 합니다. 그러나 유구한 역사라기보다는 그 역사 속에서 얼마나 피를 흘렸으며 아픔의 길을 걸어왔는가를 볼 때에 아주 슬픔의 역사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그 역사는 누가 가져왔던가? 여러분이 잘 생각해 보시면 아시겠지만, 옛날에는 도교를 받아들이지 않고, 즉 유교로만 나갔기 때문에 도교를 하는 사람들의 말과 그 법을 따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 법을 따르지 않아서 국력도 대처 못 했고, 반면에 무기도 개발하지 못했던 겁니다. 무기는 그때 말마따나 창이나 칼이나 활을, 그나마도 여유 있게 대처를 못 했던 겁니다. 승군(僧軍)이 일어났다 할지라도 승군도 그러하지마는 우리 백성들도 역시 무기가 모자랐고, 무기도 모자랐지만 반면에 한마음 한뜻으로 뭉쳐지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 당시에는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몸으로 대처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지금은 몸으로 대처를 하는 시대가 아니라 앉아서 버튼으로 대처를 하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볼 때에, 지금 불교가 따로 있고 우리 생활이 따로 있고 어느 종교든지 따로 있다고 봐서는 절대 안 된다는 것만은 여러분이 더 잘 아시리라고 믿습니다. 우리 생활 법이, 생활 행이 그냥 유(有)의 행이라고 볼 때 우리가 부처님 법을 잘 배워서 증득한다면 무(無)의 행과 유의 행이 첨보돼서 대처할 수 있는 그런 여건이 생긴다 이 소립니다. 그 여건이 생기지 못할 때 우린 뭘로 대처를 하겠습니까? 예전과 같이 그렇게 대처를 못 하는 거나 똑같습니다. 

국력이 아무리 튼튼하다 할지라도 그것은 유의 행으로써, 유의 법으로써 대처를 해야만 하는 문제가 거기에서 생기는데 지금은 어떠한가. 꼭 기계로써, 물질로써 해결을 해야만이 100% 가능성이 있는 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로켓을 쏴 올리고 인공위성을 쏴 올린다 할지라도 그것은 100%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역시 70%, 80%밖에는 되지 않을 테죠. 100%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100%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우리 국민들이 어떠한 일에도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것뿐입니다. 

이렇게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겠지마는 한 가정에서도 그렇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내 몸을 병원에 맡기면 의사가 나를 고쳐주겠지 하고 밀어 던지는, 자기의 고귀한 생명을 아무 데나 내맡기는 그런 습관이 많고, 또 이차적으로는 내 가정이 가난하고 어떠한 문제가 생기면 누가 나를 좀 도와주겠지 하는 그런 바람을 갖고 삽니다. 그뿐인 줄 아십니까? 국가가 어떻게 되든지 간에 누가 어떻게 다 대처하겠지 하고 전부들 그렇게 생각하거든요. 

그러나 바로 여러분이 주인이며, 여러분이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몸을 끌고 다니는 것도 자기 자신이 아니라면 끌고 다닐 수가 없습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한 것은 내 마음이지 부부지간이라 할지라도 부모자식지간이다 할지라도 그렇게 참사랑을 줄 수는 없습니다. 끊어짐이 없이 말입니다. 그럼으로써 사회로나 국가적으로나 우리가 대처해 나갈 수 있는 문제를 거론할 때에, 우리는 육안으로 눈을 뜨고 보고 귀로 듣는 것보다는 바로 내 한마음 한눈이라면 세계를 똑바로 볼 수 있고, 똑바로 들을 수 있고, 일체 전력에 의해서 마음대로 조정을 할 수 있으니 그것이 바로 대처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생각할 때는 우스울지 모르지마는 ‘부처님 법’ 이러면 그저 부처님한테 가서 빌고, 기복으로서 내가 잘되게 해 달라고 하고, 또는 물건을 갖다 놓고 잘되게 해 달라고 빌고, 물건으로 이렇게 공을 들였으니깐 해 주실 테지 하는 의지심, 그런 것도 여기에는 붙지 않습니다. 자기가 이 세상에, 지난번에도 얘기했지만 억겁을 거쳐서, 광년을 거쳐서 모습을 바꿔 나퉈 가면서 진화돼서 이날까지 끌어온 자기의 주인공의 뜻을 배신 아닌 배신을 하면서 바깥에서 찾으려고 한다면 그것이 찾아질까 모르겠습니다. 

지금 국가적으로 볼 때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일어나는 모든 일을 극복하는 데 있어 ‘나 아닌 누가 하겠지’라고 미루면 안 됩니다. 불법에서는 나와 사회가 한 치도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국민의 일이요, 그것이 다 사람이 하는 노릇입니다. 역사를 태평성대로 끌고 오는 것도 바로 사람들입니다. 그 여건이 부족하다면 예전보다도 더 처참한 역사를 가져올지도 모르죠. 그러니까 인간이 천부적으로 천연적으로 만법의 근원을 모두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깊이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부처님이 사십구 년 동안 그렇게 행을 보여 주셨고 법을 설해 주셨는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 뜻을 몰라서 행을 제대로 못 한대서야 어떻게 불제자라고 하며, 어떻게 국민이라고 하며, 어떻게 사람이라고 하겠습니까? 우리는 부처님의 뜻과 더불어 둘이 아닐 때, 또 불과 법이 둘이 아닐 때 승보는 그렇게 부지런히, 죽을래야 죽을 시간도 없고 살래야 살 시간도 없다 하게 되지요. 생사가 둘이 아니라는 그 뜻은 몰락 놓고 뛰어넘어라 하는 문제를 잘 생각해 보면 아실 겁니다. 

왜 죽을래야 죽을 시간도 없고 살래야 살 시간도 없다고 하나? 이 시대와 더불어 우주의 근본 삼천대천세계는 조금도 쉬지 않고 활발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런 것을 우리는 마음으로 항상 끄달리고 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걸리면 걸리는 대로 몸이 병들고, 마음이 병들고, 한 치도 던져 보지도 못하고 들이지도 못하는 그러한 사람이 될 수밖엔 없는데, 그러면 이 도리를 모르는 사람은 좌천이 되고, 짐승이 되고, 짐승이 또 승진해서 사람으로 되고, 이렇게 오르락내리락하는 고통은 영원히 벗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이 도리를, 부처님의 그 뜻을 잘 알아서 자성을 깨쳐서 유의 법, 무의 법을 한 손에 쥐고서 행할 수 있다면 우리는 과학적인 문명과 문화, 정치, 사회가 다 붙어 돌아갈 수 있는 문제를 너무나 역력하게 알게 되는 겁니다. 만약에 그 도리를 알면 국력이 튼튼치 못하다거나 수효가 적다거나 마음이 부족하다 할 때 주장자 하나를 던져서 그 수효대로 수만 개의 주장자를 만들 수가 있는 것입니다. 들일 수 있고 낼 수 있는 그 자유자재권은 여러분에게 다 달린 것입니다. 그뿐입니까? 

우리는 조그마한 손가락 하나 같은 나라에 살면서 그나마 또 반을 쪼개서 사는 형편입니다. 이러한 문제를 놓고 우리가 지금 이 시대 이 땅에 태어나서 자기 자리도 지키지 못한대서야 어디 자기 몸 하나인들 지킬 수 있겠습니까? 자기 몸을 지키지 못함으로써 자기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자기 자리를 지키지 못함으로써 대인은 될 수가 없고, 대인보다도 자유인이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부처님이 그렇게 몸을 불사르면서까지 가르치신 본의가 하나도 없고 인간 될 자격도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그 도리를 좀 더 역력히 음미하고 좀 더 생각해서 완벽하게 터득하신다면 바로 자기 스승이 생겨서 자기를 이끌어 줄 것입니다. 여러분이 짐작할 수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다는 모르지만 말입니다. 그러면 자기 스승이 생겨서 자기를 이끌 때에, 보임하면서 체험하면서 돌아갈 때 완벽하게 보임이 되어서 그 보임 자체도 없어야 할 때, 바로 주장자는 이름은 붙이지 않겠습니다마는 물론 이름을 붙여도 좋습니다. 

소련에서도 그렇고 미국에서도 그렇고 어느 강대국에서는 지금 설치를 세 군데 네 군데씩 해 놓고, 물가에도 물을 견주어서 해 놓고, 과학이 발전이 돼서 이미 그렇게 대처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건 당연하겠죠. 그 대처 위에 또 누가 대처를 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그러나 그건 어쨌든 기계화기 때문에 100%가 아니 되고 70%, 80%밖에는 갈 수가 없다는 얘깁니다. 그러면 보세요. 칼도 사람을 죽이는 칼이 있고 살리는 칼이 있죠. 칼은 하나지마는 사람 마음먹기에 달렸다 이겁니다. 죽이느냐 살리느냐도 마음먹기에 달린 것입니다. 칼은 하나입니다. 칼 하나에 죽이는 법도 있고 살리는 법도 있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대처를 하는 것도, 인공위성을 띄운다 하더라도 100%를 할 수 없습니다. 어차피 70%, 80%뿐이 안 되죠. 내가 이렇게 말을 하면 과학자들이 어떻게 생각할지들 모르겠지만, 아주 톡 꼬집어서 말한다면 70% 안심할 수 있는 그런 문제입니다. 그건 왜냐? 허공에도 생명들이 많아서 나투기 때문입니다. 또는 그 생명들이 한데 합쳐져서 만약에 그 궤도를 제대로 돌지 못한 채 왕래한다면, 줄창 그러는 거는 아니겠지만 때에 따라서 그렇게 된다면 인공위성이 똑바로 어떠한 궤도에 오를 때에 제대로 정리를 못 하고 딴 데로 회전을 해야 되니깐요. 또 부딪칠 수도 있는 법이 있구요. 

이러한 문제들은 바로 우리 인간 자체의 능력이 아니라 부처님의 뜻을 받아서 깨닫는다면 주장자는 아무 데고, 인공위성에도 급하면 뛰어들게 돼 있습니다. 그리고 또 그 생명들이 한데 합쳐져서 돌아가는 그 속에도 둘 아니게 뛰어들 수 있는 것입니다. 지난번에도 얘기했지만 요것은 거론하고 넘어가야 되겠어서 하는 건데, 인공위성을 띄운다 하더라도 어떠한 방편에 의해서 위협을 주기 위한 문제가 붙어 돌아갈 때는 심각한 문제가 붙어 돌아가지 않을 수가 없는 겁니다. 

천지개벽이라는 말이 어떻게 나왔겠습니까? 인간의 생명체가 다 부서지고 없어지고 할지언정, 집은 남는다 하더라도 그럴 수도 있고, 여러분이 왜, 벼락을 맞거나 전기에 붙으면 사람 껍데기만 남고 몽땅 빨아들이고 말라 버리는 거 있죠? 그런 형국이 될 수도 있는가 하면 부서질 수도 있는 거죠. 우리 집은, ‘우리 집’ 하는 건 지구를 말합니다. 우리 집은 튼튼히 궤도를 돌게끔 어느 여건에 안치돼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의 일은 모르죠. 그것을 언제나 안일하게 생각하기보다 항상 대처를 하고 있는 것이, 우리가 영원히 보람 있게 생동력 있게 살 수 있는 근거를 만들어 놓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떠한 조그마한 나라를 지키기 위함이요, 조그만 나라를 지키기 위함보다는 전체 생명들이 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생명들뿐만 아니라 몸도 둘이 아니게 공용을 하고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독불로서 돌아가는 게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경제난을 극복하지 못할 때는 경제난을 극복할 수 있는 주장자를 던지는 그러한 묘법이 우리들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당연히 주어져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정치를 하는 사람들을 둘이라고 볼 때에는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화합을 이루지 못하지만, 역시 던졌다 거뒀다 할 수 있는 능력만 있다면 앞으로는 조화가 잘 이루어질 거라고 믿습니다.

여러분이 다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얘기합니다. 우리는 절대 이 공부를 게을리해서는 안 되고, 정진을 게을리해서도 안 됩니다. 정진을 게을리해서 세세생생에 끄달리는, 고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이 돼서는 안 된다는 얘깁니다. 사람이라고 다 사람의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지난번에도 얘기했지만 사람의 허물을 썼어도 하루가 모자라서 짐승으로 도로 돌아갔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진실한 마음, 기대지 않는 마음, 남을 헐뜯지 않는 마음, 남을 증오하고 업신여기고 둘로 보고 앙심을 먹고 이러한 마음이 몰락 없어져야 이름해서 도에 이를 수 있는 것이지, 내가 둘로 보고 항상 증오하고 이것 끄달리고 저것 끄달리고 한대서야 어찌 도에 이를 수 있겠습니까? 이 세상의 색(色)을 보고서 물질 50%만 가지고 이게 다라고 하면서 살 수밖에 없죠. 

무(無)의 진지한 세계에 찰나찰나 나투면서, 온 누리를 가고 옴도 없이 가고 오며, 찰나에 나 아님이 없이 그렇게 묘한 도리가 우리에게 다 주어져 있는데도 그것을 모를 때에는 무전통신기를 내가 가지고 있으면서도 쓸 수가 없어. 수레바퀴 다섯 개가 그냥 한데 합쳐서 돌아가는 그 이치를 정돈해서 내가 책정을 한다면 이것은 만년묵이로서 영원히 굴려도 굴려도 줄지 않고, 굴려도 굴려도 늘지 않는, 바로 이러한 대도의 뜻이 거기에 서려 있는 것입니다.

이 마음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여러분은 마음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생각 안 하고 함부로 말을 해 버리고 함부로 생각해 버리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개미 한 마리를 보더라도 절대 업신여기면 안 됩니다. 개미의 생명도 개미의 살림도 개미의 자식도 개미의 부모도 친척도 다 있습니다. 크고 작을 뿐이지요. 

그런데 우리가 지금 넘기지 못하는 아주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예전에는 우리가 그것을 몰라서 의정을 냈지만 지금은 의정을 낼 필요도 없습니다. 세상이 공했고 내 자체가 공했는데, 공했다는 걸 번연히 알면서도 거기에 끄달린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가 안 갑니다. 고정된 관념이 없고, 고정된 말이 없고, 고정되게 보는 게 없고, 고정되게 듣는 게 없고, 다니는 것도 고정된 게 없고, 만남도 고정된 게 없어요. 그렇게 고정된 게 없기 때문에 공이라고 했는데, 그게 없어서 공한 것이 아니거든. 너무도 철두철명하게 너무도 역력하게 찰나찰나 나투고 돌아가기 때문에 공이라고 했고 무라고 했지 그게 없어서 그런 건 아닙니다, 절대.

생사라는 것도 생과 사가 그렇게 쉴 사이 없이 돌아가기 때문에 어느 곳에 생이라고 붙이고 어느 곳에 사라고 붙일 수가 없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생사에도 걸림 없다. 생사도 둘이 아니다. 윤회도 둘이 아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공부하는 것은 하나의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만도 아니고 나를 위해서만도 아닙니다. 그도 나와 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를 위함도 아니고 그를 위함도 아닙니다. 그대로 살아나가는 우리 인간의 도리가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으로서 이 도리를 모르면 아니 되죠. 무의 법의 그 묘한 도리가, 광대무변한 그 도리가, 만법의 무의 도가 지금 생활에 바로 접근해서 돌아가고 있다는 점을 여러분은 잘 아셔야 합니다. 또 어떠한 문제든 우리가 무심으로써 모든 걸 몰락 놓고서 나를 깨쳤을 때는, 물론 여러분이 한 번쯤 아니면 몇 번쯤 체험을 해 보고 가시는 분들은 아마 이 도리를 아실 겁니다.

그러나 급하다고 한생각에 아무 데나 칼을 빼는 게 아닙니다. 만약에 타신이 들려서 아는 소리나 하고, 환상이나 보고 이게 도라고 하는 그런 사람의 뜻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그런 거는 몰락 놔 버려서 녹여 버려야 되겠지마는, 이 뜻을 완벽하게 알아서 주장자를 하나 탁 던질 때에는 어디고 적응이 돼. 전체 우주에도 적응이 되지만, 정치에도 적응이 되고, 모든 과학적으로도 전부 거론이 되고, 전체가 거기 적응이 되죠. 그러니까 전체가 나 아님이 없고, 전체가 내가 하지 않는 것이 없을 때에 비로소 우리나라를 지킬 수 있는 그런 여건이 생겨요. 그리고 세계를 조화롭게 화합을 이루게 하는 마음을 낼 수 있다면 또 그렇게 되죠. 

언젠가 그런 말을 했습니다. 몇 해 전 일입니다마는 중공이나 세계 다른 나라들과 무역이나 상업의 거론이 있었을 때에 정치도 거론이 되고, 마음이 한마음 한뜻으로 융화돼서 돌아가고 부처님 법으로서 돌아간다면 우리가 좋은 불국토를 이룰 수도 있으며, 마음들이 제대로 돼서 인의롭게 순리적으로 평화스러운 역사를 가져올 거라고. 

지금 우리에게 시급한 문제는 정진하는 일입니다. 시급한 문제가 정진하는 겁니다. 정진을 해야만이 그것이 성립이 되니까. 정진을 하되 정진이라는 그 자체까지도 놓으라고 했습니다. 앉으나 서나, 자나 깨나, 변소엘 가나 법당엘 가나 참선이라고요. 이름을 지어서 와선이니 좌선이니 행선이니 또는 입선이니 하지만 모두가 참선 아님이 없습니다. 또 간화선이니 묵조선이니 하고 나누어 왔지만 우리가 움죽거리고 살아나가는 것이 그대로 참선이에요. 

그러니 정진하면서 물러서지 않고, 믿고 안으로 굴리고, 남을 원망하지 않고 남한테 물으려 하기보다 자기 주인공에 놓으세요. 그리고 남한테 듣는 거는 거름 삼고 주춧돌 삼아서 내 거를 만들고, 또 내 거를 만들고 나서도 붙들고 있으면 아니 됩니다. 느꼈으면 느낀 대로 그냥 놔 버려야 되겠죠. 그래서 “당기는 거는 먹고 놓고, 안 당기는 거는 믿고 놔라.” 이런 말을 했죠. 당기는 거는 먹을 때에 맛있으니 감사하게 먹고, 안 당기는 거는 믿고 놔라. 그 뜻이 뭐냐 하면은 안 되는 것은 믿고 놓고, 되는 것은 감사하게 놔라 이 말입니다. 이렇게만 한다면 참선 못 할 분이 없고, 싱싱한 몸을 가지고 나를 끌고다니면서 조금도 허탕한 일이 없이, 또 안 되는 일도 되는 일도 다 버린다면 안 되는 일은 없습니다. 지난번에도 얘기했지만 날이 궂었다고 해서 항상 궂어 있는 게 아닙니다. 금방 볕이 듭니다. 그러니 볕이 들어서 좋다고 붙들고 있고, 날이 궂었다 해서 또 붙들고 있고 이런다면은 얼마나 공부에 지장이 가겠습니까? 

※위 법문은 대행 선사 법문집 ≪허공을 걷는 길≫ 중 1986년 8월 24일 정기법회 법문의 일부를 정리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