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일야의 시, 불교를 만나다] 15. 잘 간다[善逝]는 것 : 천상병의 ‘귀천’

소풍 같은 인생 삶·죽음 긍정적 세계관 담겨  소풍 즐거워야 평온히 돌아가 자신 성찰로 아름다운 마무리 

2025-08-15     이일야 전북불교대학 학장
해당 삽화는 생성형 AI를 통해 제작했습니다.

얼마 전 암 투병 중인 벗에게서 전화가 왔다. 밤하늘의 별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눈물이 나더라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울컥했지만, 꾹 참았다.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늙고 병들며 죽는 것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유한한 실존 앞에서 누군가는 절망하고 삶이 무의미하다 말하지만, 그 안에서 의미를 찾으려는 이들도 있다. 종교 역시 삶과 죽음에 대한 근원적 문제를 제기하고 그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그래서 종교를 으뜸가는[宗] 가르침[敎]이라고 말하는지 모르겠다.

부처님도 생로병사라는 인간의 실존에 문제의식을 느끼고 그 해답을 찾아 출가했다. 〈반야심경〉에서는 불생불멸(不生不滅), 즉 삶과 죽음이 본래 없다고 말한다. 삶과 죽음은 마치 얼음이 녹아 물이 되고 물이 수증기로 변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모두 형태만 변했을 뿐 수소 원자 두 개와 산소 원자 하나(H2O)라는 본질은 다르지 않다. 삶과 죽음은 하나라고 말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렇게 보면 누군가 세상을 떠났다고 해서 그리 슬퍼할 일은 아니다. 그러나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어도 막상 나의 문제로 다가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저 불안하고 두려울 뿐이다. 아는 것과 사는 것 사이에는 넓은 간극이 존재한다.

인생을 소풍에 비유한 시인도 있다. ‘귀천’이란 시로 널리 알려진 천상병 시인이 그 주인공이다. ‘귀천’은 “소풍 끝나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겠다는 부분이 인상적으로 다가온 시다. 시인의 말처럼 인생을 소풍이라 생각하면, 정말 삶에 대한 애착과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천상병은 ‘천진무구(天眞無垢)’라는 말과 가장 잘 어울리는 시인이다. 어린아이처럼 순수하고 티 없이 맑은 마음으로 살았다는 뜻이다. 본래 일본에서 태어난 시인은 광복과 함께 귀국해 마산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다. 당시 마산고등학교에 편입한 천상병은 ‘꽃’의 시인 김춘수와 스승과 제자의 관계로 만나게 된다. 제자의 습작 노트를 읽어 본 스승은 한눈에 시재(詩材)를 알아보고 유치환에게 추천한다. 이런 인연으로 천상병은 〈문예〉지를 통해 등단하고 창작 활동을 이어간다. 사제간의 운명적 만남을 기념하기 위해 몇 해 전 마산고등학교에 시비가 건립되었다. 시비에는 김춘수의 ‘꽃’과 천상병의 ‘피리’가 나란히 새겨져 있다.

1967년 일어난 ‘동백림 사건’을 빼놓고 천상병을 이야기할 수는 없다. 한 시인의 삶을 완전히 망가뜨린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는 독일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친구에게 술값을 받아 막걸리를 마시곤 했는데, 그것이 간첩에게 받은 공작금으로 조작된 것이다. 비록 선고 유예로 풀려나긴 했지만, 이때 받은 전기 고문의 후유증으로 그는 평생 힘들게 살아야 했다. 치아가 대부분 빠진 것은 물론 성기능 장애로 아이를 가질 수 없게 되었다. 한때 영양실조로 쓰러진 시인은 행려병자와 무연고자로 처리돼 정신병원에 갇히기도 했다. 당시 지인들은 그가 사망한 줄 알고 유고 시집을 출간했는데, 그것이 바로 〈새〉다.

다 죽어 가는 시인을 구원한 사람은 알려진 것처럼 목순옥 여사다. 그녀는 천상병과 결혼해 지극히 간병해 주었다. 또한 주변의 도움으로 ‘귀천’이라는 찻집을 열고 생활을 이어 나갔다. 그 덕분에 시인은 행복하게 살다가 즐거운 마음으로 하늘로 돌아갔다. 그는 ‘행복’이란 시에서 예쁜 아내가 찻집을 경영해서 생활 걱정도 없고 또한 자신이 좋아하는 막걸리를 사 줘서 행복하다고 노래하기도 했다.

‘귀천’은 천상병의 대표적인 시로 오늘까지도 대중에게 널리 사랑받고 있다. 1970년 발간된 〈창작과 비평〉에 발표한 시다. 〈천상병 전집 : 시〉와 〈새〉에도 함께 실려 있다. 귀천(歸天)은 글자 그대로 하늘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누군가 세상을 떠났을 때 돌아가셨다고 하는데, 바로 이를 의미한다. 시인의 묘비 뒷면에도 이 시 마지막 구절이 새겨 있다. 대개 죽음은 슬프고 우울한 느낌이지만, 이 시에서는 그런 분위기를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하는 느낌이다. 삶과 죽음을 긍정적으로 바라본 시인의 세계관이 드러나는 시라 할 것이다. 직접 들어 보기로 하자.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 노을빛 함께 단둘이서 /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하늘로 돌아가는 길 
이 시를 읽으면서 “몸은 아침 이슬 같고[身如朝露] 목숨은 지는 해와 같다[命若西光].”라는 〈수심결(修心訣)〉의 구절이 생각났다. 그만큼 우리의 삶이 짧고 유한하다는 뜻이다. 시에서는 새벽빛에 스러지는 ‘이슬[朝露]’과 ‘노을빛[西光]’으로 표현하고 있다. 삶이 무상(無常)하다고 허무주의나 염세주의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아침 이슬과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저녁노을과 함께 놀다가 소풍이 끝나면 하늘로 돌아가겠다고 시인은 노래한다. 죽음을 두려움이 아니라 평온하고 ‘쿨’하게 받아들이는 낙천적인 모습이 담겨 있다.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이처럼 아름다운 마무리가 가능한 것일까?

개인적으로 위대한 종교가나 철학자는 어떤 죽음을 맞이했을까 궁금해서 60명을 선택해 살펴보고 2권의 책으로 출간한 적이 있다. 선사들이 죽기 직전에 남긴 임종게를 분석한 〈죽음을 철학하는 시간〉과 동서양 철학자와 종교인의 묘비명에 담긴 글을 해석한 〈마지막 말의 철학〉이 그것이다. 이들을 분석하면서 느낀 점이 있다. 모두 자신의 삶에 대한 자부심이 매우 컸다는 사실이다. 그들이 죽음을 미련이나 회한 없이 평온하게 맞이할 수 있었던 이유가 아니었을까 싶다. 이때 내린 결론은 잘 살아야 잘 죽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부처님을 가리키는 호칭 중에 잘 가셨다는 의미의 ‘선서(善逝)’가 있는 것도 결코 우연만은 아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잘사는 것일까? 이에 대해 모두가 공감하는 정답은 없다. 다만 이 물음에 대해 깊이 성찰한다면, 자신만이 내리는 답은 있게 마련이다. 이를 우리는 인생관이나 세계관, 혹은 자기 철학이라 부른다. 이것을 지니고 사는 것과 그냥 사는 삶이 결코 같을 수는 없다.
천상병은 ‘인생은 소풍’이라는 자신만의 철학을 가지고 살다 간 인물이다. 인생을 소풍이나 여행으로 생각하면, 삶과 죽음을 바라보는 시선도 조금은 다를 것이다. 소풍을 마치면 집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우리의 삶이 끝나면 하늘로 돌아간다고 여길 테니 말이다. 소풍이 끝나면 아쉬움은 남아도, 괴로움이나 슬픔, 회한이 남지는 않는다.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공통으로 하는 말이 있다.

“집에 돌아오니 참 좋다. 역시 집이 좋아.”

소풍을 마치고 가는 곳이 하늘이든 어디든, 본래 왔던 곳으로 돌아간다 생각하면 죽음을 훨씬 평온하게 받아들이지 않을까? 정작 중요한 문제는 우리가 소풍을 제대로 즐기고 있느냐는 것이다. 소풍이 재미없으면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 또한 무거울 수밖에 없다. 누구나 알고 있는 ‘돼지들의 소풍’이라는 이솝우화가 있다. 돼지들이 소풍을 떠났는데 대장이 자신만 빼고 숫자를 센다는 이야기다. 옆에 있던 돼지가 하도 답답해서 자신이 세겠다고 나섰다가 그 역시 자신을 빼는 바람에 인원 점검을 마치지 못한다. 결국 소풍을 즐기지도 못하고 돌아오게 된다.

비록 우화지만, 우리들 삶 또한 별반 다를 게 없다. 정작 자신은 보지 못하고 다른 돼지들만 세고 있으니 말이다. 다른 돼지로 상징되는 돈이나 물질, 고가의 자동차와 유명 브랜드의 아파트만 좇다가 정작 중요한 자신은 소외시키며 살고 있다. 내가 주인공인데 엑스트라인 돈만 나오는 이상한 영화를 찍고 있는 셈이다. 그러니 삶이라는 영화가 흥행에 성공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귀천’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메시지는 소풍이 즐거워야 돌아가는 발걸음이 가볍다는 것이다. 다만 문제는 평소에 이런 생각을 하기 힘들다는 데 있다. 왜냐하면 다른 돼지만 세면서, 그러니까 돈 벌 생각만 하면서 살기 때문이다. 그러다 병에 걸리는 등 삶에 심각한 문제가 생기면, 그때 비로소 자신의 삶을 돌아본다. 우리가 시나 소설, 철학 관련 책을 통해 인문적 사유를 하면서 자신을 성찰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시인은 다른 돼지들을 센 것이 아니라, 자신을 돌아보면서 주체적으로 소풍을 즐겼다. 이는 물질로부터 자유로운 삶을 살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삶을 ‘소유’라는 관점에서 보면 가난일지 몰라도, 그것은 시인에게 분명히 ‘존재’하는 행복이었다.

“오늘 아침을 다소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 한 잔 커피와 갑 속의 두둑한 담배 / 해장을 하고도 버스값이 남았다는 것.” 

‘나의 가난은’이라는 시의 한 구절이다. 자족(自足)하는 마음으로 소풍을 즐겼으니, 하늘로 돌아가는 길 또한 가벼웠을 것이다. ‘귀천’을 통해 삶을 반추해 본 사람이라면, 훗날 자신의 무덤에 이런 묘지명을 세워도 좋을 것 같다. 

‘소풍 왔다 간다.’

소풍 나왔으니, 잘 놀다 가는 게 인생에 대한 예의 아닐까. 암 투병으로 힘들어하는 벗이 ‘귀천’을 읽고 평온한 마음으로 남은 소풍을 즐기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