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 붓다를 만나다] 16. ‘암탉이 울 때’: 문정 왕후와 불교 중흥
왕실 안녕 빈 불심(佛心), 불화(佛츐)로 꽃피우다
“사신은 논한다. 윤씨는 천성이 강한(剛狠)하고 문자(文字)를 알았다 … 윤비(尹妃)는 사직의 죄인이라고 할 만하다. 〈서경(書經)〉 목서(牧誓)에 ‘암탉이 새벽에 우는 것은 집안의 다함이다.’ 하였으니, 윤씨(尹氏)를 이르는 말이라 하겠다….”
(〈명종실록〉 31권, 명종 20년 4월 6일 임신 두 번째 기사)
1565년(명종 20) 4월 창덕궁 소덕당에서 문정 왕후 윤씨(文定王后 尹氏, 1501~1565)가 승하한 날, 사관들은 위와 같은 기록을 남겼다. 문정 왕후가 누구인가. 문정 왕후는 조선의 제11대 왕인 중종(中宗)의 계비(繼妃)이자, 중종과 장경 왕후 윤씨(章敬王后 尹氏)의 소생인 인종(仁宗)의 계모요, 열두 살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친아들 명종(明宗, 재위 1545~1567)을 대신해 수렴청정을 펼치고 정국을 운영한 왕실의 웃어른이었다.
사관들의 눈에 문정 왕후는 큰 옥사를 일으켜 사림(士林) 세력들을 제거하고 한도 없이 불사(佛事)를 봉행해 내외의 재정을 고갈시키며 민가의 어머니처럼 왕을 꾸짖은, 사직의 죄인이었다. 성리학적 이념이 자리 잡은 16세기 조선에서 ‘천성이 강한하고 문자(文字)를 아는’, ‘여주(女主)’의 정치는 암탉이 새벽에 우는 것처럼 용납할 수 없는 이변이었다.
그러나 조선시대를 돌아보면, ‘암탉이 울 때’야말로 불교 교단이 공적 영역 안에서 존재를 인정받고 불교미술이 찬란히 꽃피운 시기였다. 이를 제일 잘 보여 주는 때가 바로 16세기, 문정 왕후의 시대였다.
‘암탉이 울 때’: 문정 왕후와 불교 중흥
문정 왕후는 윤지임(尹之任)의 딸로 17세가 되던 1517년에 왕비로 간택, 책봉됐다. 4명의 공주를 낳은 후, 1534년(중종 29)에 34세의 나이로 비로소 아들(후일의 명종)을 낳았다.
젊은 시절부터 신심이 돈독했던 문정 왕후는 1545년에 명종이 즉위한 이후에는 섭정의 위치에서 불교를 외호했다. 왕후는 척신(戚臣) 세력의 동의를 얻어 불교 중흥 정책을 시행했고, 이를 통해 사림파의 독주를 제재하려는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굳세고 거칠다’고 비판 받은 그녀의 강인한 성품은 빗발치는 견제에도 흔들림 없이 호불 정책을 결행할 수 있는 원동력이었다.
〈명종실록〉에 의하면, 불교를 일으키는 대업을 수행할 승려를 모색하던 문정 왕후에게 내수사(內需司)에서 허응당 보우(虛應堂 普雨, 1509~1565)를 천거했다고 한다. 내수사는 왕실의 재정 관리를 담당하는 관서로, 중종대와 명종대에는 왕실 불사를 실행하는 데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다.
문정 왕후는 1548년(명종 3) 12월 명종대 왕실과 인연이 깊은 봉은사(奉恩寺) 주지로 보우를 임명할 정도 신임했다. 봉은사는 선릉을 수호하는 능침사찰(陵寢寺刹)이었다. 선릉은 곧 명종의 조부인 성종(成宗)의 능이다. 유생들은 지속해서 보우를 비방하고 참소했으나 문정 왕후는 승하하는 그날까지 흔들림 없이 보우를 신임했다. 조선시대에 불교를 신앙했던 왕실 여성 중 문정 왕후가 가장 특별한 이유는 그녀가 섭정의 위치에서 정책적으로 불교를 중흥했기 때문이다. 문정 왕후는 1550년(명종 5) 12월 15일 상진(尙震)에게 비망기(備忘記)를 내려 연산군대에 붕괴한 선종과 교종의 승정체제(僧政體制)와 승과를 부화시킬 것을 명했다. 비망기를 내린 1550년 12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 이를 반대하는 상소문이 400여 회나 이어졌을 정도로 유생과 신료들의 반대는 극심했다. 그러나 유림의 반대도 문정 왕후의 강인한 의지를 꺾지 못했다.
문정 왕후의 마지막 대작 불사, ‘회암사 400탱’
문정 왕후는 젊은 시절부터 불심이 깊어서 중종이 살아 있을 때부터 내수사를 통해 많은 불사를 벌였다. 문정 왕후의 불사는 현존하는 불화의 화기(畵記)나 보우의 문집인 〈나암잡저(懶庵雜著)〉에 수록된 여러 글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현재까지 알려진 문정 왕후 발원의 불화는 대부분 1560년대에 조성된 것들이다. 화기의 내용을 보면, 국왕인 명종의 무병장수와 자손 번창 등 왕실의 안녕을 위해 발원한 것이 대다수이다. 이는 명종이 병약했다는 점과 그의 후사가 귀했다는 점과 직결된다. 명종은 평생을 통틀어 인순 왕후 심씨(仁順王后 沈氏)와의 사이에서 아들 한 명을 두었을 뿐이다.
예컨대, 문정 왕후는 1562년(명종 17)에 나라의 평안, 자신과 명종의 무병장수, 자손의 번창을 기원하며 200점의 나한도를 조성해 삼각산 향림사(香林寺)에 봉안하게 했다. 미국 LA 카운티 미술관(LACMA)에 소장된 ‘향림사’명 제153덕세위존자도가 바로 200점의 나한도 중 하나이다. 한 폭에 한 분의 나한을 배치한 작은 크기의 불화로, 섬세한 필치, 금니의 사용에서 16세기 왕실 발원 불화의 화격을 여실히 느낄 수 있는 수작이다.
이처럼 문정 왕후는 왕실의 안녕을 빌며 수백 점으로 구성된 불화 세트를 일시에 조성해 봉안하게 했다. 1565년(명종 20)의 ‘회암사 400탱(檜巖寺 四百幀)’ 조성은 문정 왕후가 말년에 봉행한 대규모의 불화 불사이다. 왕실의 숭불에 대한 유생들의 비판이 빗발치는 가운데 문정 왕후가 이 불사를 봉행한 배경에는 당시 왕실의 절실한 위기의식이 있었다. 명종의 유일한 후손인 순회 세자(順懷世子, 1551~1563)가 1563년에 요절한 후, 왕실에는 왕통을 이을 세자가 부재했기 때문이다. 이에 문정 왕후는 아들인 명종의 장수와 선정, 왕실의 안녕, 그리고 며느리인 인순 왕후 심씨가 세자를 낳기를 바라며, 보화를 내어 대불사를 벌였다. 석가, 미륵, 약사, 아미타 그림을 각각 금으로 50점, 채색으로 50점씩 제작하게 한 것이다. 이렇게 제작된 총 400점의 불화는 왕실의 원찰이었던 회암사(檜巖寺)의 중수를 경축하는 자리에서 법에 따라 점안(點眼)하도록 했다. 400점의 불화는 경찬법회 후에는 왕실의 내원당(內願堂)을 비롯한 여러 사찰에 분산 봉안됐던 것으로 추정된다.
400점의 불화 중 현재 소재가 확인되는 것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약사삼존도, 일본 히로시마현 호주인(寶壽院) 소장 약사삼존도, 일본 나고야현 도쿠가와미술관 소장 약사삼존도, 일본 고치시 류조인(龍乘院) 소장 약사삼존도, 일본 효고현 고젠지(江善寺) 소장 석가삼존도, 미국 메트로폴리탄미술관 소장 석가삼존도 등 6점이다. 이 6점의 불화에는 동일한 위치에 보우가 지은 발문(跋文)이 금자(金字)로 적혀 있다. 이 외에 일본 교토시 사이묘지(西明寺)에 소장된 약사삼존도를 회암사 400탱의 일부로 보는 의견도 있다.
조선시대에 수백 폭에 달하는 불화를 일시에 조성해 봉안하는 대규모 불사는 문정 왕후의 불사를 제외하고는 다른 사례를 찾아보기 어렵다. 이는 1560년대에는 불사의 발원과 기획, 재원의 동원과 불화 재료의 수급, 불화의 실질적인 제작과 점안에 이르기까지 초대형의 불사를 차질 없이 실행할 수 있는 여건이 갖추어져 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즉, 문정 왕후가 원(願)을 세우면 보우가 불화의 도상을 기획하고 내수사에서 왕실 소유의 재산으로 비용을 수급하며 양공(良工)을 동원해 불화를 제작하고, 완성된 불화를 이운해 각지의 사찰에 봉안하는 일련의 체계가 확립되어 있었을 것이다. 현존하는 ‘회암사 400탱’의 화기에는 양공의 이름이 적혀 있지 않지만 전반적인 구도, 본존의 표현과 세부 묘사에서 많은 공통점을 찾아볼 수 있다. 본존의 뾰족한 육계와 그 위에 올려진 계주, 오밀조밀한 이목구비, 허리가 긴 신체 등은 회암사 400탱 외에도 16세기 조선 왕실에서 발원한 불화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표현이다. 이는 당시 궁정을 중심으로 미술 양식이 공유되고 있었으며, 회암사 400탱이 궁정 화가인 도화서(圖署)의 화원들에 의해 그려졌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금빛으로 남은 왕후의 불심
1565년(명종 20년) 4월 6일, 창덕궁 소덕당(昭德堂)에서 문정 왕후는 6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문정 왕후는 “불교가 이단이긴 하지만 조종조 이래 있어 왔고, 교종과 선종도 또한 나라에서 승려들을 통솔하기 위해 설립한 것”이니, 끝까지 옛날 그대로 보존하라는 유교(遺敎)를 남기고 타계했다. 비록 문정 왕후의 사후 일시에 급변했지만, 불교를 외호하고 나라의 안녕을 빈 대비의 마음은 금으로 그린 불화 속에 지금도 변함없이 우리 곁에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