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보배의 24번의 계절]15. 입추_제주 길을 걷다(2) 

뭇 작물이 여무는 가을의 문턱

2025-08-08     장보배 작가
 제주 남국사 전경. 1980년대에 이르러 온전히 자리를 잡은 남국사 도량의 모습은 여느 사찰과는 다르다.

 

칠월이라 맹추 되니 입추 처서 절기로다
화성은 서쪽으로 흐르고 미성은 중천이라
늦더위 있다 한들 절서야 속일소냐
비 끝도 가벼웁고 바람끝도 다르도다

19세기 조선, 정학유(丁學游, 1786∼1855)의 ‘농가월령가’가 전하는 가을의 시작. 저 오랜 노래 속 계절이 흐르는 모양은 하늘과 땅, 대지를 흘러 뭇 생명의 눈과 피부, 코끝을 돌아 나간다. 
흐르는 별의 길에서, 질기고 질긴 더위와 그 진득한 열기를 툭 치고 가는 변해 버린 바람 끝에. 시간은 그렇게 살아 있는 모든 것에 오고 감의 흔적을 남긴다. 그 흔적을 따라 한 걸음, 한 걸음 걷다 보면 어느새 또 한 번 우주의 문턱을 넘는 시간. 다시 새로운 계절은 시작된다. 


가을에 들어서다
모든 것이 그대로인 것만 같은 일상. 하지만 연일 이어지는 불볕더위에도 계절은 꼬박꼬박 흘렀던 모양이다. 어느새 절기는 가을의 시작, 입추(立秋)의 문 앞으로 우리를 데려다 놓았다. 

태양 황경은 135도, 보통 양력 8월 초 무렵에 시작되는 이 절기는 여름의 끝자락을 지키고 선 말복과 함께 서서히 가을에 스며들 것이다. 

가을의 초입이라고는 하나, 여름의 기세는 대단해서 옛사람들은 ‘삼복지간(三伏之間)에는 입술에 붙은 밥알도 무겁다’는 속담으로 이 절기의 고됨을 대변했다. <고려사(高麗史)>의 기록을 보면 이즈음 진상된 얼음을 조정 대신들에게 나눠 주고, 또 입추 날에는 관리들에게 휴가를 주었다고. 

오늘날의 휴가철이 7월 말부터 8월 초에 집중되는 이유도 어쩌면 고려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셈이다. 

그도 그럴 것이 삼복(三伏) 중 마지막 몸부림 같은 말복이 바로 입추 직후, 이때는 누구라도 잠시 납작 엎드리는 지혜가 필요할 수밖에. 이 오랜 풍속을 보낸 뒤에야 한 계절을 호령했던 여름은 슬며시 저물 것이고, 가을은 다시 제힘을 찾을 것이다. 

아주 멀고 먼 옛날, 저 먼 지중해의 나라들은 밤하늘에 시리우스(Sirius)의 별이 가장 강하게 빛나는 7월부터 8월 초 무렵을 ‘개의 날들(Dog Days)’이라 불러왔다. 

시리우스, 빛나는 화염의 별이자 영원히 사냥꾼 오리온의 곁을 지키는 충견. 여름 밤하늘을 지배하는 이 강력한 별은 지금도 동서양을 아울러 이 절기를 대표하는 가장 오래된 하늘의 안내자다. 
 

제주에서 가장 늦게까지 수국을 볼 수 있는 남국사 경내로 향하는 수국길.

 


별을 따라서 
여름날 동이 틀 무렵 태양과 시리우스가 동시에 보이는 40여 일의 시간. 이때가 바로 그리스를 비롯한 지중해 연안의 유럽 국가들을 뜨겁게 달구는 ‘개의 날들’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시리우스가 하늘에 출현하면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되고, 식물이 시들거나 사람이 허약해진다고 믿었다. 또 그 빛이 가장 강해지는 시기에는 보통의 개들마저 행동이 이상하게 바뀐다고 말이다.

‘타오르는 자’라는 뜻을 가진 이 별은 충성과 헌신을 상징하는 동시에, 여러 문화의 신앙과 더해져 다산, 농경, 죽음과 부활 등 생로병사를 관장하는 별로 전해져 왔다. 하여 과거 에게해 연안의 국가와 로마에서는 시리우스에 제물을 바치며 전염병을 막고, 농작물의 피해가 없기를 기원했다고. 

그렇다면 같은 시기, 지구 반대편의 나라들에서는 어땠을까. 천랑성(天狼星), 영성(靈星), 용성(龍星) 등으로 불린 이 별은 그 빛이 닿는 곳마다 저마다의 이름과 의미를 지니며 인간의 삶과 함께해 왔다. 여름을 상징하는 별인 만큼 비와 태양의 힘이 부여되는 것은 당연지사. 또 고대 상나라에서는 불운을 가져오는 오랑캐의 별로 여기고, 반대로 상나라를 삼킨 주나라에서는 자신들의 시조인 견융(犬戎)족과 연관시킨 신성한 조상의 별로 여겼다. 

그 숱한 이야기들은 또 다른 이야기와 더해져 별은 신이 되고, 인류의 간절한 믿음과 함께 더 큰 광휘를 내뿜었으리라. 

우리나라에서도 그 영향을 받아 삼국 시대부터 입추 후 첫 진일(용의 날)에 한 해 농사에 감사하는 ‘영성제(靈星祭)’를 지냈다. 하지만 조선 시대에 이르러 천문학이 발전하며 별을 신성시하는 신앙은 점점 설 자리를 잃고, 마침내 영성제는 자연스레 사라지고 만다. 

그러나 별과 인류가 쌓아 온 그 내밀한 여정은 신앙 이상의 의미를 지닐 것이다. 그러므로 인류는 여전히 하늘을 보고, 별자리를 따라 우리 생명이 가야 할 길을 묻고 또 묻는 것이다. 

땅 위의 별 
제주시 아라일동에 자리한 한라산 남국사(조계종 대각회). 이 고적한 사찰을 유명하게 한 것은 무엇보다 사찰 초입에 자리한 아름다운 숲길일 것이다. 곧게 뻗은 삼나무 숲길, 그 곁을 따라 한없이 만개한 코발트 빛의 수국 군락은 그야말로 이곳이 남국의 사찰임을 깨닫게 한다. 제주에서 가장 늦게까지 그 모습을 보인다는 남국사의 수국은 7월이 반이나 저문 때에도 여전히 만개한 모습이었다. 

1980년대에 이르러 온전히 자리 잡은 남국사 도량은 그 모습도 여느 사찰과 다르다. 제주 4·3사건 이후 섬의 사찰들은 그 모습도 다소 변화를 거쳤다고 하는데, 남국사 대웅전 돌법당이 그러하다. 

제주에서만 볼 수 있다는 돌벽의 단아한 전각, 울창한 나무들 사이로 펼쳐진 이끼 융단과 켜켜이 자리한 현무암 길. 용천수와 빗물이 더해져 만들어진 연못 위로 고요히 선 ‘무량수각’까지. 마치 원시림 속에 머무는 듯한 이곳에선 그 누구라도 한여름의 더운 숨을 식힐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 안에 머무는 붓다의 모습. 인류의 등불로, 스스로 가장 위대한 별이 된 붓다는 그 어느 곳보다 가혹한 불교 말살의 역사를 겪은 이곳 탐라의 땅에서 더욱 눈부시다. 

여름의 끝을 장식할 푸른 수국 길을 뒤로하고, 다시 남국사를 나서 달리는 제주의 길. 저 멀리 거대한 초록의 밭이 바다처럼 넘실댄다. 국내 대표적인 노지 수박 생산지 중 하나인 제주시 애월읍 신엄리. 늦여름의 이글대는 태양 아래 이 땅의 산물들이 달게 익어 가는 중이다.
 

애월읍 신엄리 수박밭. 제주 수박은 풍부한 일조량과 바람 등 자연조건 덕에 당도가 높기로 유명하다. 

제주는 1970년대까지도 수박 접목 기술이 도입되지 않아 얼마 되지 않는 재배지마저 소멸하는 중이었다고. 하지만 이곳 농민들의 노력을 통해 지금은 전국에 출하되는 수박 산지로 다시 태어났다. 제주의 수박은 척박한 땅을 이겨 낸 이곳 사람들의 지난 시간이자, 삶 그 자체일 터다.

여름과 함께 태어나 삼복의 더위를 달래 주고 다시 여름과 함께 사라지는 초록빛 생명. 이맘때 논밭은 뭇 작물이 여무는 시기이므로, 과거에는 입추 무렵 비가 닷새 이상 계속되면 비를 멎게 해 달라는 기청제(祈晴祭)를, 또 가뭄이 들면 기우제(祈雨祭)를 올리는 것이 일이었다. 

하지만 최근처럼 이상 기온으로 몸살을 앓는 때에는 어떤 바람을 전해야 할까. 저 대지 위에 흩어진, 온 힘을 다해 반짝이는 땅 위의 별들을 보며 가만히 먼 하늘을 떠올린다. 

이 여름의 가장 오랜 안내자를 향해, 그리하여 저 충실하고도 빛나는 시리우스의 별이 오늘 밤 자비의 손길로 이곳을 비추어 주기를. 

남국사 경내의 삼존불.

 

▶한줄 요약 
양력 8월 초, 태양 황경이 135도에 이르는 가을의 초입인 이 절기에도 여름의 기세는 여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