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일야의 시, 불교를 만나다] 14.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 한강의 ‘괜찮아’
한강이 전하는 작은 위로 아이 달래며 얻은 삶의 지혜 보여줘 마음 다르게 먹으니 상황 좋게 변해 “괜찮다”는 말 다음 물어도 늦지 않아
언젠가 KBS 프로그램 ‘인간극장’에서 산속에서 양봉하는 부부의 모습을 본 적이 있다. 그들은 꿀을 전혀 따지 못해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숲속에서 새 우는 소리가 마치 “괜찮다고!” 위로하는 것처럼 들려, 당시의 위기를 잘 넘겼다고 한다. 그때부터였다. 뒷산에 산책하러 갈 때마다 새소리가 정말로 “괜찮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모두가 힘들어하던 시절 새소리를 녹음해 부처님오신날 봉축 법회 시간에 들려주었다. 아무리 힘들어도 새가 괜찮다고 하니, 다 같이 힘내서 위기를 잘 극복하자는 취지였다. 법회에 참여한 학인들은 위안을 받은 듯 얼굴에 환한 미소를 띠었다.
물론 새가 그렇게 말한 것은 아닐 것이다. 사람들은 힘들 때 누군가에게 위로를 받고 싶어 하는데, 마침 새 우는 소리가 그렇게 들린 것뿐이다. 어찌 보면 나의 마음과 새소리가 묘하게 공명(共鳴)을 일으켜 괜찮다는 위로가 되었는지 모를 일이다. 공명은 함께[共] 우는[鳴] 마음의 소리다. 새가 나의 마음을 알아준다고 여기면 자연스레 위안을 받게 된다. 이처럼 같은 소리라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달리 들린다. 그래서 나온 말이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다. 흔히 모든 일은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말할 때 자주 쓰인다.
한강 작가의 ‘괜찮아’라는 시를 읽으면서 문득 이 말이 떠올랐다. 작가는 울음을 그치지 않는 아이에게 “왜 울어?”라며 달래 보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런데 문득 생각을 돌려 괜찮다고 말하니, 며칠 후부터 아이가 저녁 울음을 멈췄다고 한다. 이때의 경험을 담아 쓴 시가 바로 ‘괜찮아’이다. 평범한 일상에서 느낀 삶의 지혜다. 마음을 다르게 먹으니 상황 또한 좋게 변했다는 생각이 들어 일체유심조와 관련해 해석해 보았다.
한강은 누가 뭐라 해도 노벨문학상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는 작가다. 지난해 이룬 엄청난 쾌거는 우리에게 기쁨과 즐거움뿐만 아니라 위로도 함께 선사했다. 그녀에게 노벨상을 수여하는 이유를 한림원은 이렇게 설명했다.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서고, 인간 삶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강렬한 시적 산문.”
역사에 남을 만한 훌륭하고 멋진 문장이다. 쟁쟁한 후보들이 많았지만, 왜 한강이 수상했는지 분명히 보여 주고 있다. 아마 제주 4·3과 광주 5·18의 상처로 힘들어하는 이들에게 한강의 수상은 큰 위로와 치유가 되었을 것이다. 어찌 그들뿐이겠는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역시 마찬가지이다.
시인은 12·3 계엄으로 혼란스러웠던 우리 사회에 깊은 통찰을 주기도 했다. 과거가 현재를 돕고, 죽은 자가 산 자를 돕는다는 말에 많은 이들이 공감했으니 말이다. 그녀의 지적처럼 부산과 마산, 광주에서 죽어간 이들이 오늘의 우리를 구했는지 모를 일이다. 12월 3일 그날 밤 슬리퍼를 신고 반팔 차림으로 여의도에 모인 이들과, 응원봉을 들고 민주공화국 시민의 권리를 외친 MZ세대의 뒤에는 이처럼 든든하고 빛나는 역사가 있었다. 그 힘으로 지금 우리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위기를 극복하고 있다.
오늘 소개하는 한강의 ‘괜찮아’는 2013년에 출간한 시집 <서랍을 저녁에 넣어 두었다>에 실린 작품이다. 앞서 소개한 것처럼 우는 아이를 달래면서 얻은 삶의 지혜를 보여 주고 있다. 살면서 힘들 때마다 읽어 보면 위로가 되는 좋은 시라 할 것이다. 아이를 돌보는 마음으로 함께 읽어 보기로 하자.
“태어나 두 달이 되었을 때 / 아이는 저녁마다 울었다 / 배고파서도 아니고 어디가 / 아파서도 아니고 / 아무 이유도 없이 / 해질녘부터 밤까지 꼬박 세 시간 / 거품 같은 아이가 꺼져버릴까 봐 / 나는 두 팔로 껴안고 / 집 안을 수 없이 돌며 물었다 / 왜 그래. / 왜 그래. / 왜 그래. / 내 눈물이 떨어져 / 아이의 눈물에 섞이기도 했다 / 그러던 어느 날 / 문득 말해봤다 /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 괜찮아. / 괜찮아. / 이제 괜찮아. / 거짓말처럼 / 아이의 울음이 그치진 않았지만 / 누그러진 건 오히려 / 내 울음이었지만, 다만 / 우연의 일치였겠지만 / 며칠 뒤부터 아이는 저녁 울음을 멈췄다 / 서른 넘어야 그렇게 알았다 / 내 안의 당신이 흐느낄 때 / 어떻게 해야 하는지 / 울부짖는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보듯 / 짜디짠 거품 같은 눈물을 향해 / 괜찮아 / 왜 그래,가 아니라 / 괜찮아. / 이제 괜찮아.”
‘왜 그래’가 아니라 ‘괜찮아’
이 시는 남성보다 육아의 어려움을 잘 아는 여성이 더 깊이 공감할 것 같다. 한밤중에 아이가 울면 아버지는 울지 말라고 하면서 잠에 들지만, 어머니는 아이가 새벽까지 울어 대도 잠들지 않고 돌본다. 시인 역시 아이가 울음을 그치지 않아 매우 힘들었던 것 같다. 오죽하면 자신의 눈물이 떨어져 아이의 눈물과 섞였겠는가. 시인 엄마가 아이에게 할 수 있는 말은 이것밖에 없었다.
“왜 그래, 왜 그래?”
하지만 아이는 도무지 울음을 그치지 않는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몸과 마음 모두 지친다. 그러던 어느 날, 시인은 생각을 바꿔 아이에게 이렇게 말했다.
“괜찮아, 괜찮아.”
‘왜 그래’에서 ‘괜찮아’로 바꾸자 작은 변화가 일어났다. 며칠이 지나면서 아이가 저녁 울음을 멈춘 것이다. 시인은 우연이라고 했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한 생각 달리 하자 새로운 상황이 전개되었으니 말이다. 어쩌면 엄마의 ‘괜찮아’라는 마음의 소리를 아이가 들은 것은 아니었을까. 그렇게 엄마와 아이의 마음 주파수가 서로 맞아 공명을 일으키고 울음을 그친 것이라 믿고 싶다. 엄마는 왜 우느냐고 묻는 대신 우는 아이를 있는 그대로 마음에 품으면서 울어도 괜찮다고 말한 것이다.
시인의 작은 마음 변화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정도만 다를 뿐 우리 모두 누군가에게 괜찮다고 하기보다는 “너 왜 그래?”라고 하면서 산다. 예컨대 부모의 뜻과 달리 노래에 관심 있는 자식에게 아무렇지 않은 듯 이렇게 말하곤 한다. 아이가 받게 될 상처는 생각하지 않은 채.
“너 왜 공부 안 하고 음악만 해. 나중에 뭐가 되려고 그래.”
‘음악’에 다른 내용만 넣으면 가정에서 많이 듣는 소리다. “왜 그렇게 게임만 해. 왜 그렇게 유튜브에 빠져 있어.” 등 온통 “왜 그래?”뿐이다. 이때 필요한 것은 바로 음악과 게임을 하는 아이를 있는 그대로 마음에 품고 ‘그래도 괜찮아’라고 생각을 바꾸는 일이다. 그러면 시인의 지적처럼 아이가 울음을 그칠지 모르는 일이다.
‘달마야 놀자’라는 영화에 나오는 장면이다. 밑 빠진 독에 물을 채우는 게임에서 조폭들이 연못에 항아리를 무심코 던지는 바람에 스님들을 이기고 절에 남게 된다. 조폭 두목은 말썽만 피우는 자신들을 왜 감싸 주는지 그 이유를 묻자 주지 스님은 아무렇지 않은 듯 무심하게 답한다.
“너희들이 밑 빠진 항아리를 물속에 던진 것처럼 나도 밑 빠진 너희들을 그냥 내 마음속에 던졌을 뿐이야.”
이 영화의 전체 내용을 압축하는 명대사다. 부처님이나 성인을 제외하고 완벽한 항아리를 갖춘 사람은 드물다. 깨진 위치와 정도만 다를 뿐 우리는 모두 결점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간다. 영화에 등장하는 스님들을 포함해 우리들 대부분은 상대의 깨진 부분을 가리키면서 왜 그렇게 사느냐고 말한다.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주지 스님은 험하게 살다가 여기저기 깨진 조폭 항아리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왜 그래?”가 아니라 “그래도 괜찮으니까 쉬었다 가.”라고 한 것이다. 그러자 조폭들의 마음에 변화가 일어난다. 영화이긴 하지만, 그중 한 사람은 출가해서 새로운 길을 걷는다. 생각의 차이가 변화를 이끈 셈이다.
영화 속 조폭이나 시에 등장하는 아이 역시 완전하지 않은 존재다. 특히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아이는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 다른 포유류와 달리 걷는 데도 몇 년씩 걸린다. 적어도 3년 동안은 엄마 품에서 자라야 한다. 유교에서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삼년상을 지내는 이유이기도 하다. 시도 때도 없이 울어 대는 아이는 깨진 부분이 많은 항아리와 같다. 왜 그렇게 우느냐고 하는 것은 왜 그렇게 많이 깨졌냐고, 왜 그렇게 사느냐고 묻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때 필요한 것은 바로 “왜 그래?”가 아니라 “그래도 괜찮아”라는 작은 위로다. 처음부터 “왜 그래?”가 아니라 “괜찮다”는 따뜻한 말 다음에 “그때 왜 그랬어?”라고 물어도 늦지 않다.
우리는 한 번이라도 ‘왜 그래?’가 아니라 ‘그래도 괜찮아’라는 시선으로 상대를 바라본 적이 있을까? 영화 속 주지 스님과 시인이 우리에게 던지는 근원적인 질문이다. 생각 한번 바꿔 보자. 그러면 어느 드라마 제목처럼 “사이코지만 괜찮아.”, 혹은 “다른 사람들과 많이 달라도 괜찮아.”라는 말이 먼저 나올 것이다. 혹시 알겠는가. 상대가 정말로 울음을 그칠지. 삶의 변화는 이렇게 찾아온다.
▶한줄 요약
우리는 한 번이라도 ‘왜 그래?’가 아니라 ‘그래도 괜찮아’라는 시선으로 상대를 바라본 적이 있을까? 한강 시인이 이 시를 통해 우리에게 던지는 근원적인 질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