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 붓다를 만나다] 15. 소혜 왕후의 사홍원과 불서 간행
유신에 맞서 불교 감싼 외호중(外護衆) 세조 맏며느리, 연산군·중종 친할머니 15세기 누구보다 주체적으로 헤쳐 나가 이름 확인되는 첫 〈내훈〉의 여성 저술가 학식 갖추고 도덕 실천하며 불교에 의지 불서 지속 간행한 불전 언해 참여 지식인
의경 세자(懿敬世子)의 빈, 세조(世祖)와 정희 왕후(貞熹王后)의 맏며느리이자 성종(成宗)의 어머니, 그리고 연산군(燕山君)과 중종(中宗)의 친할머니로 기억되는 한 여성이 있다. 이 여성은 동시에 공혜 왕후(恭惠王后), 연산군의 모후인 폐비 윤씨(廢妃 尹氏), 중종의 모후인 정현 왕후(貞顯王后)의 시어머니이기도 했다. 바로 인수 대비(仁粹大妃)로 더 잘 알려진 소혜 왕후(昭惠王后, 1437~1504)다.
부계, 그것도 왕계를 기준으로 짜인 이 촘촘한 관계망 속에 그녀는 누군가의 딸이자 아내, 며느리, 어머니이자 시어머니, 그리고 할머니이다. 조선 왕실의 격동기였던 15세기를 누구보다도 주체적으로 헤쳐 나갔던 소혜 왕후의 대중적 이미지는 그다지 좋지 않다.
소혜 왕후에게는 어떻게든 아들을 왕위에 올리고자 했던 정치적 야망가, 며느리 폐비 윤씨를 죽인 악독한 시어머니이자 그 업보로 연산군이란 폐주(廢主)를 만들어 낸 실패한 양육자라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꼬리표처럼 따라다닌다. 그러나 일곱 왕대를 거치며 장구한 삶을 산 그녀에게는 대중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면모가 있다.
소혜 왕후는 여성을 위한 규훈서인 〈내훈(內訓)〉을 남긴, 우리나라 역사상 이름이 확인되는 최초의 여성 저술가이다. 유교적 교훈서를 저술한 이 여성은 놀랍게도 신실한 마음으로 많은 불사(佛事)을 벌인 대시주(大施主)였으며, 유신들에 맞서 불교 교단을 적극적으로 감싼 외호중(外護衆)이었다. 또 한문 불전의 언해(諺解, 한글 번역)에 참여한 지식인이자, 불서를 지속적으로 펴낸 간행 주체이기도 했다.
효부(孝婦), 폭빈(暴嬪), 여후(女后)
소혜 왕후는 1437년(세종 10) 한확(韓確)의 막내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명나라 황실을 비롯해 조선 왕실과도 사돈 관계를 맺은 매우 특이하고 지위가 높은 명문가에서 성장했다. 소혜 왕후는 1455년(단종 3)에 수양 대군의 맏아들 도원군(桃源君) 장(暲)과 혼인해 군부인(郡夫人)이 되었다.
혼인 직후 시아버지 수양 대군이 왕위 찬탈에 성공하면서 남편은 의경 세자로 책봉되었고, 자신은 세자빈으로 봉해졌다. 세자빈 한씨는 처음에는 정빈(貞嬪)의 작호를 받았으나, 태종비 원경 왕후(元敬王后)도 세자빈 시절 정빈으로 불렸기에, 한씨는 후일 수빈(粹嬪)으로 호칭을 고쳤다.
그러나 세자빈 생활은 채 2년 3개월여에 불과했다. 1457년(세조 3), 의경 세자가 요절하자 시동생인 해양 대군(海陽大君, 후일의 예종)이 세자로 책봉되었고, 21살의 한씨는 어린 세 자녀와 함께 출궁했다. 비록 사가(私家)로 물러났으나 수빈 한씨는 궁 밖에서도 세조의 큰며느리로서의 위상과 신분을 유지하기 위해 큰 노력을 기울였다. 한결같이 시부모를 섬기는 맏며느리를 세조는 늘 효부(孝婦)라 칭찬했다. 한편, 세조 부부는 사소한 과실만 있어도 두 아들 월산군과 자을 산군을 엄히 꾸짖는 흐트러짐 없는 며느리를 ‘폭빈(暴嬪, 사나운 세자빈)’이란 별명으로 놀렸다.
1469년(예종 1), 예종은 왕위에 오른 지 불과 14개월 만에 승하했다. 예종이 붕어하던 날, 왕실의 가장 큰어른인 정희 왕후는 의경 세자와 수빈 한씨의 둘째 아들 자을산군(훗날의 성종)을 예종의 양자로 들여 대통을 잇게 했다. 신료들이 나이 어린 성종을 위해 정희 왕후에게 수렴청정을 청했다.
정희 왕후는 본인은 문자를 알지 못하지만 수빈 한씨는 문자도 알고 사리(事理)에도 통달했다며 그녀에게 수렴청정을 맡길 뜻을 연거푸 전하기도 했다. 그러나 수빈 한씨의 수렴청정은 원로 재상들의 반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 일화는 정희 왕후가 수렴청정을 양보할 만큼 수빈 한씨를 돈독히 신뢰했으며, 그녀의 정치적 감각과 학문적 교양을 높이 샀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성종의 즉위 이후 수빈 한씨는 13년 만에 궁으로 돌아왔다. 왕위에 오른 성종은 친아버지인 의경 세자의 위호를 높이는 일에 나섰다. 성종이 오랜 시간을 들여 이 작업을 추진하는 동안, 수빈 한씨는 1470년에 ‘인수 왕비(仁粹王妃)’, 1475년에는 ‘인수 왕대비(仁粹王大妃)’·‘덕종비(德宗妃)’·‘회간 왕비(懷簡王妃)’라는 존호를 얻었다. 이 같은 여러 칭호는 그녀가 겪었던 삶의 다양한 단계를 드러낸다.
유교적인 학식을 갖추고 도덕을 몸소 실천했던 소혜 왕후는 일찍 세상을 떠난 친정어머니와 남편의 명복을 빌고, 자식들의 무탈을 기원할 때에는 불교에 의지했다.
소혜 왕후는 개인의 차원을 넘어, 유신들에 맞서 불교를 옹호했고, 이를 언서(諺書)를 통해 공론화했다는 점에서 다른 비빈들과 큰 차이가 있다. 1492년(성종 23), 성종이 국가가 승려에게 신분증을 발급해 주는 도첩제(度牒制)를 폐지하자 소혜 왕후와 예종비인 안순 왕후(安順王后)가 이를 반대하는 언서를 내린 것이 그 좋은 예다.
이후로도 소혜 왕후는 최소 두 차례 이상 도첩제 폐지를 반대하는 언문(諺文)을 내렸다. 유신들이 소혜 왕후의 발언을 모후의 정치 간섭이라고 연일 비난했으나, 그녀는 굽히지 않고 계속해서 목소리를 드높였다.
추선(追善)의 마음을 새겨 찍다
세자빈 시절부터 대왕대비 시절에 이르기까지, 소혜 왕후는 50여 년에 가까운 오랜 세월 동안 다양한 형태의 불사를 후원했다. 소혜 왕후가 벌인 불사는 불상과 복장, 불화, 불교 경전의 필사와 간행, 범종의 발원에서 사찰의 중창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그중 귀한 재료를 내어 경전을 베껴 쓰고 장엄하는 사경(寫經)과 불교 경전을 다량으로 인쇄해 간행, 시주하는 인경(印經)은 소혜 왕후의 불사에서 가장 이른 시기부터 확인된다. 또 사경과 인경은 소혜 왕후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선호했던 불사이기도 했다.
세조의 시대는 명실공히 조선 전기 왕실의 지적, 재정적인 역량이 총동원된 불서의 편찬과 간행의 황금기였다. 또한 이 시기에는 아직 창제되지 얼마 지나지 않은 훈민정음을 이용해 한문 불전 언해가 활발히 진행되었다.
세조가 누구인가. 세조야말로 대군 시절인 1446년에 부왕인 세종의 명을 받아 돌아가신 어머니 소헌 왕후(昭憲王后)를 추모하기 위해 〈석보상절(釋譜詳節)〉을 편찬하고 이를 훈민정음으로 번역한 장본인이 아닌가. 세종은 〈석보상절〉을 보고 손수 찬불가인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을 훈민정음으로 지었다.
세조는 왕위에 오른 뒤에도 불서 사성(寫成)과 불경 인출을 이어갔다. 1457년(세조 3)에는 의경 세자가 죽자 명복을 빌기 위해 친히 불경을 사성했으며, 많은 불경을 경판으로 찍고, 여러 종류의 불경을 활자로 인출했다고 한다. 또한 1459년에는 〈석보상절〉과 〈월인천강지곡〉을 합하여 〈월인석보〉를 간행했다. 1461년(세조 7)에는 왕명으로 간경도감(刊經都監)을 설치해 불경의 언해, 판각, 인쇄, 간행을 전담하게 했다. 간경도감은 1471년(성종 2)에 폐지될 때까지 11년간 존속했다.
세조의 아낌을 받는 맏며느리였던 소혜 왕후는 누구보다도 가까운 거리에서 세조의 간경 사업을 지켜보고 거기에 직접 참여했다. 1460년 5월, 세조가 친히 언해와 간행을 주도한 〈능엄경언해(楞嚴經諺解)〉는 이 같은 정황을 알려준다. 〈능엄경언해〉 권10의 ‘어제발언해주(御製跋諺解註)’에는 간행 경위와 언해 과정에 대해 언급돼 있다.
이에 의하면, 1461년(세조 7) 5월에는 회암사(檜巖寺)에서 석가모니의 분신사리(分身舍利) 100여 매가 나타난 데다가, 효령 대군(孝寧大君)의 청도 있어서 세조가 친히 〈능엄경〉을 언해했다.
구체적으로는 세조가 한문에 구결(口訣)을 달면, 혜각존자 신미(慧覺尊者 信眉)가 구결이 현토된 문장을 확인하고, 그 문장을 소리 내어 읽으며 교정하는 역할을 ‘정빈 한씨(貞嬪 韓氏)’등이 맡았다. 여기 보이는 ‘정빈 한씨’가 바로 소혜 왕후이다. 세조는 너무나 이른 나이에 청상이 된 영민한 맏며느리에게 법문을 탐구하면서 공덕을 닦을 기회를 일부러 주었던 것은 아닐까. 언해의 마지막 단계에서 확정된 번역문을 어전에서 소리 내어 읽은 사람이 ‘전언(典言, 내명부 소속의 궁관) 조두대(曹豆大)란 점도 흥미롭다.
소혜 왕후의 사홍원(四弘願)
소혜 왕후는 간경도감이 폐지된 이듬해인 1472년(성종 3)에는 승하한 세조와 예종의 명복과 정희 왕후, 성종, 공혜 왕후의 장수를 빌고자 〈법화경〉 등 29종의 불경을 인출하게 했다고 한다. 이때 간행된 〈불조역재통재(佛祖歷代通載)〉의 발문에는 소혜 왕후의 사홍원(四弘願)이 인용되어 있다. 그녀는 발원문에서 대승경전을 널리 세상에 펴내 모든 사람이 다 부처의 가르침을 듣게 하고자 한다는 원을 세웠다. 그녀가 36세 되던 해의 일이다. 소혜 왕후는 노년에 이르기까지 각종 불서를 힘써 간행하며 스스로 세운 원을 이뤄 나갔다.
▶한줄 요약
유교적 학식을 갖추고 도덕을 실천한 소혜 왕후는 불교에 의지했고, 언서를 통해 불교를 옹호하며 공론화했다는 점에서 다른 비빈들과 구별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