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묻는 이에게] 내 상황에 따라 용도에 따라 여여하게 걸림 없이 가는 것이 법이다

어느 것 하나도 마음 빼놓고는 없는 것입니다 누가 몸이 비참하게 아프다고 해서 관하라고 가르쳐 줬어요.  그랬는데 직코스로 들어가는 사람은 백발백중이에요.  그러나 줬다 뺏었다 하는 사람은 그냥 쓰러집니다.

2025-07-25     대행 스님
그림=최주현

지난 호에 이어서

그리고 여러분이 자녀들을 많이 키우는데, 지금은 부부가 모두 나가서 일하는 가정이 많습니다. 그전에도 얘기했지만 미국이나 다른 나라 여러 군데를 다녀 봤지만 부부가 모두 나가서 일하는 사람들이 많습디다. 집을 비워 놓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애들은 애들대로 와서 자기네들이 꺼내 먹고 자기네들이 그냥 놀러 나가고 자기네들이 또 들어와서 엉망으로 해 놓고, 이렇게 하다 보면 나쁜 친구도 사귀게 되고 또는 자기대로 나가서 나쁜 일도 하게 되고, 이렇게 많은 일들이 벌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을 해 줬죠. 나가더라도 글씨를 좀 큼직하게 써서 냉장고 앞에 붙여 놓아라. 뭐라고 쓰느냐 하면 “아무개 아무개야, 너희들 사랑해! 여기다 너희들 좋아하는 것 해서 넣어 놓았으니까 꺼내 먹어. 그리고 올 때까지 기다려 줘. 참으로 사랑하는데 우리가 같이 살려니까 어쩔 수 없잖아. 너희들도 협조해 줘.” 하고 써서 거기다 뽀뽀도 좀 해서 냉장고에다 붙여 놓으면 애들이 들어와서 그걸 보고 말입니다, 마음에서 감동을 해서 절대로 나가서 나쁜 짓을 안 하게 됩니다. 나쁜 아이들하고 끄달리게 되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부모들하고 화목해집니다.

마음이 얼마나 무서운 줄 아십니까? 겉으로만, 돈만 주고 음식만 잘해 주면 그 모두가 사랑인 줄 아는데 그게 아닙니다. 진짜 사랑이란 건 그게 아니거든요. 그래서 돈을 많이 갖다 주는 것보다도 더 귀중한 사랑을 그렇게 하는 겁니다. 그렇게 해 놓으면 모두가 화목해지고 엄마 아빠 들어올 때까지 기다려 주면서, 엄마가 들어오거나 아빠가 들어오면 “아빠 엄마” 하고 부르고 야단법석이 나고 아주 착실해지죠. 그렇다고 얘기해 주니까 그렇게 한 분들은 다들 되찾았어요. 갈라섰던 자손들하고도, 부모 자식 사이에 갈라지고 부부 사이에 갈라졌던 분들이 다 화목하게 사랑을 하게 됐더라 이겁니다. 

마음이라는 게 얼마나 중요하고 미묘한지 여러분이 실험해 보시면 바로 체험을 하실 겁니다. 그리고 속속들이 나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모두가 그러한 까닭에 불교라는 자체가 얼마나 광대하고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그리고 한 가지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우리가 사찰에 들어가면 향을 피우고 초를 켜고 꽃을 공양하고 또 공양물을 공양하고 이럽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우리가 물질적으로 해 놓은 것만 생각하지 마시고 공양을 할 때도 ‘왜 공양이라고 했을까?’ 하고 한 번쯤은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볼 점이 있다고 봅니다. 그건 왜냐하면 일체 만물만생이 같이 한 그릇을 먹고도 되남는 것이 공양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음의 공양이라고 합니다. 참 미묘한 공양입니다. 

그래서 꽃을 공양할 때도 꽃공양이라고 하죠. 이건 일체 만물만생의 아름다운 마음씨를 말하는 겁니다. 아름다운 마음씨를 바친다 하는 뜻입니다. 이 촛불을 켜는 거는 우리 일체 만물만생이 밝게 돌아가고 있다, 여여하게 그냥 밝게 돌아가는 그 자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밝은 마음을 말입니다. ‘밝은 마음을, 부처님과 내 마음과 둘 아닌 공양을 바칩니다.’ 하는 겁니다. 부처님이 따로 있고 내가 따로 있다면 얼마나 멀고, 얼마나 잘못하고 잘하고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부처님 마음이 내 마음이고 내 마음이 부처님 마음이니 바로 부(父)와 자(子)가 둘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 말을 몇 번째 했습니다만, 내가 예전에 어디를 가다가 보니까 묘지가 두 개가 있는데, 내 자생 부(父)가 하는 소립니다. ‘이거는 자식의 묘고 이거는 애비의 묘니라. 그런데 애비가 자식한테로 오면 자식으로 하나가 되고 자가 부한테 가면 부로 하나가 되니 그건 무슨 까닭인고?’ 하고 묻더라 이겁니다. 난 그때 시절에 너무 갑작스러운 말이라 도대체 감을 잡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감을 못 잡을 때에는 거기 앉아서 일어나지를 못합니다. 누가 말려서 못 일어나는 게 아니라 내가 그거를 해결을 못 했으니까 못 일어나는 거죠.

보세요. 일을 할 때는 그냥 자로 하나가 되고, 가만히 있을 때는 부로 하나가 되는 겁니다. 마음은 체가 없어서 수천수만으로도 모습을 바꿔서 화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이라는 그 자체가 가만히 있을 때는 부로 하나가 되고 일을 할 때는 자로 하나가 돼서 자와 부가 둘이 아니다.’ 이런 뜻입니다. 그런데 부처님과 내 마음이 항상 둘이라고 한다면 하나는 높고 하나는 낮은 겁니다. 그러니 항상 창살 없는 감옥에서 노예가 돼서 빌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알아듣습니까, 못 알아듣습니까? 그러니 아주 가깝게, 아버지는 아들과 둘이 아니다. 일을 할 때는 한 아들이 돼 버리고 일을 안 할 때는 한 부가 돼 버리니 이 미묘한 법은 바로 말로는 할 수 없는 법이죠.

그러니까 여러분께서 법당에 가서 칠정례를 하든 팔정례를 하든 백팔 배를 하든 삼천 배를 하든 하시지만 그거는 자기가 여유가 있을 때에 하는 거죠. 마음공부 하는 분들은 자기의 상황에 따라서 해야 합니다. 집에 불도 꺼 놓지 않고 왔는데, 불을 꺼 놓든 안 꺼 놓든 뭐, 집이 타든 말든 하던 백팔 배를 해야 한다는 법은 없어요. 법이 따로 없어요. 내 상황에 따라서 용도에 따라서 그렇게 여여하게 걸림 없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법당에 가서 절을 할 때도 내가 여유가 있으면 칠정례를 하든지 삼정례를 하든지 하고, 내가 여유가 없고 아주 급박할 때는 삼정례를 일정례로 해도 된다는 얘기예요.

과거심, 현재심, 미래심이 바로 현재심 하나로 오고, 바로 과거가 현실이고 미래가 현실이니까요. 현실도 바로 공했으며 찰나찰나 고정됨이 없이 돌아갑니다. 지금 고정되게 보는 게 있습니까, 고정되게 듣는 게 있습니까, 고정되게 먹는 게 있습니까? 고정되게 만나는 게 있습니까, 고정되게 가고 오는 게 있습니까, 고정되게 말하는 게 있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그러니까 여러분이 어떤 거 할 때 내가 했다고 할 수 없는 것이 여러분의 지금 살림살이입니다. 그대로 그렇게 하고 있는 겁니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 그 뜻이 이해가 잘 안되더라도 잘 생각을 해 보십시오.

그렇게 해서 우리는 내 몸과 내 몸속에 있는 자생 중생들과 같이 둘이 아니요, 법당에 가도 부처님 형상이 내 형상이요, 부처님 마음이 내 마음이요, 부처님 생명이 내 생명이요, 근본 자체가 둘이 아닙니다. 그리고 향 한 개비 켜 놓는 것도 아름답고 밝은 마음으로써 아주 착한 마음을 내는 그 자체가 바로 향입니다. 더함도 덜함도 없는 마음을 내는 그 자체가, 마음을 일으키는 그 자체가 바로 향을 피우는 겁니다. 그래서 향의 양식을 먹고 산다고 아까도 노래를 했죠? 

그러니 여러분이 법당에 가서도 항상 내 마음과 부처님의 그 뜻을 같이 한마음으로 뭉쳐서 둥글게 놓고 진실하게 참배를 하고 지극하게 초를 켜고, 밝은 마음을 비유하는 거니까 말입니다. 물을 한 그릇 떠 놓더라도, 즉 말하자면 다기를 모셔 놓더라도 그 다기는 바로 지혜인 것입니다. 지혜, 지혜로운 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어느 것 하나도 마음 빼놓고는 없습니다.

하여튼 마산의 여러분께서 생활 자체를 그대로 참선으로 알고 가셔야 합니다. 즉 말하자면 행선 입선 와선 좌선, 이것이 한데 합쳐서 그냥 여여하게 생활하는 것이 참선입니다, 참선! 왜냐하면 모든 것이 자기가 하는 게 없이 자기가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기가 너무 많아서 어떤 거를 할 때 내가 했다고 할 수 없으니까요. 

그전에도 그랬죠? 남편 노릇을 했다가 “아버지!” 하고 들어오면 한순간에 “어!” 그러고 아버지 노릇을 하고, 말도 아버지의 말이 나가고 행도 아버지의 행이 나가고 뜻도 아버지의 뜻이 나간다. 그렇게 하듯 “얘, 아무개야!” 그러면 아들 노릇을 하고 “여보게!” 하면 사위 노릇을 하고 “형님!” 하면 벌써 형님 노릇을 하고, 이렇게 천차만별의 그 마음에 의해 바뀌어서 화해서 나투는 그런 살림살이를 우리가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우리 이 생활 자체도 그렇게 나투면서 돌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경을 보되, 즉 말하자면 자기가 봤다고 해서는 안 되죠. 자기 주인 놈이 다 하는 거죠. 보게 하고 듣게 하고 만나게 하고 가고 오게 하고 이러는 거죠, 다.

누가 몸이 비참하게 아프다 해서 관하라고 가르쳐 줬죠. 그랬는데 직코스로 들어가는 사람은 백발백중이에요. 그러나 줬다 뺏었다 줬다 뺏었다 하는 사람은 그냥 쓰러집니다. 허! 심부름을 시키는데 서류를 줬다 뺏었다 줬다 뺏었다 하면 그 서류 작성이 다 됩니까, 어디? 그와 같이 진짜로 믿고 진짜로 맡길 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물러서지 않는 마음이라야만이 되겠죠?

하여튼 우리가 제대로 알아서 벗어날 수 있어야죠. 즉 말하자면 관습이나 업식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세세생생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그 굴레에서 벗어나야, 오신통이라는 이 자체의 굴레에서 벗어나야 오신통을 굴릴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생활을 그냥 굴릴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신통이라는 것도 이름이죠. 우리가 살림하는 자체가 그대로 오신통입니다. 그러니까 오신통에서 벗어나야 오신통을 자유스럽게 굴릴 수 있다 이 소립니다. 오신통이라고 한다고 해서 통이 어디에 있는 줄 알고 두리번두리번 찾지 마시구요. 허허허….
 
그러면 한마디만 더 하고 끝을 내겠습니다. 우리가 살다가 죽으면 어떻게 되는 줄 아십니까? 여러분이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요다음 생에, 미래에 모습을 가지고 나옵니다. 미래라고 하지만 다음이 오늘입니다. 도로 오늘이 되는 겁니다. 다음 생이 오늘, 현생이 되는 겁니다. 그런다면 자기가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모습이 주어집니다.

방편으로 하나를 비유해서 얘기한다면, 어떤 사람이 얼마나 잘못하고 살았던지 개로 탄생을 했더랍니다. 지금도 많이들 그렇게 하고 가죠. 개로 탄생을 했는데 가만히 보니까 허, 전자에 형제였고 부모자식지간이었는데 자기를 얼마나 무시하고 그러는지 모르겠더랍니다. 개로 인연이 돼서 새끼로 태어나서 컸는데 보니까 그렇더랍니다. 그래서 개란 놈이 ‘야! 언제 적에 그렇게 모른다 했고 언제 적에 그렇게 너만 살았어?’ 하고 막 짖으니까 “이놈의 개가 왜 이렇게 짖어?” 그러곤 그냥 발길로 탁 차더랍니다. 하하하…. 그러니 아무리 ‘내가 아무개라, 내가 아무개라, 내가 이렇다’ 해도 알 수가 없는 겁니다. 자기가 개 모습을 쓴 거를 전혀 생각지 못하고 자기가 전자에 살던 의식만 가지고 그냥 한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해 보십시다. 아무리 짖어도 짖어도, 아무리 이렇고 저렇고 사유를 말을 해도, 그걸 알아듣는다 하더라도 개 모습을 쓰고 나왔으니까 개 대접밖에는 할 수 없지 어떡합니까, 네? 그러면 개로만 비유해서 얘기했는데 천차만별의 모습들이 다 그렇단 말입니다. 왜, 옛날에 무당들이 “국내 밥내도 못 맡는다, 너!” 이러죠? 그렇게, 하여튼 지옥에 갈 일을 했다면 지옥고가 벌어지겠죠. 오간지옥이라는 게 뭡니까? 땅속에서 꿈틀대면서 국내 밥내도 못 맡는 것이 그게 아귀지옥도 되지만 오간지옥에서 허덕이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과거에 있었던 옛날얘기냐 하면 그게 아닙니다. 지금 현실입니다. 현실에서 그렇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내일 일을 모르고 어저께 일을 모르니까 그렇지, 만약에 안다면 살인 납니다. 사람이 독사같이 살았다면 독사로 모습을 가지고 나올 것입니다. 여러 가지 모습이 많지만 하나로 규정을 지어서 방편으로 해 봅시다. 우리 모습이 그렇게 개 모습으로 나오면 개 대접밖에 못 받을 것이고 뱀으로 나오면 뱀 대접밖에 못 받을 것입니다. 그리고 축생으로 태어나면 축생 대접밖에 못 받을 것이고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 그렇게, 자기가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모습이 주어지는데, 그 모습을 가지고 말입니다, 거기에서 습이 붙어 가지고 그 모습 벗어나기가 상당히 어렵습니다. 닭이라면 닭의 짓을 하던 습이 있어서, 뱀이라면 뱀의 짓을 하던 습이 있어서, 그 습이 붙어 가지고 그 모습의 무명을 벗기가 상당히 어렵습니다. 그러니까 오백 세를…, ‘오백이다’ 하는 거는 아주 세세생생을 말하는 겁니다. 그냥 숫자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거기서 그 무명을 벗고 턱턱 털고 일어나기가 상당히 어렵습니다. 인간 환생 하기가 상당히 어렵고, 인간 환생이 돼 가지고 어떻게 살았느냐,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또 모습을 가지고 나오게 돼 있으니 그저 아래로 위로 아래로 위로 그냥 돌아가는 겁니다. 지금 그렇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한 생각을 잘해서 구덩이에서 나오게 해야지 한 생각을 잘못해서 구덩이에 들어가게 한다면 여러분이 여러분을 긁어먹고 그냥 구덩이에 빠뜨리는 것이죠. 빠뜨리고 나서 ‘내가 무슨 죄를 지어서 이러냐’ 하고 울고불고 아무리 해 봤던들, 버스 지나간 뒤에 아무리 그래 봤던들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몸뚱이 하나를 우주라고 해도 되고 국가라고 해도 됩니다. 그러니까 잘 생각하셔서, 또 지원의 스님네들한테 모르는 건 물어서 항상 잘 관해서 체험을 하도록 하세요. 49년 동안 부처님께서 설해 주시고 길을 인도해 주신 그 뜻을 말로는 다 감사하다고 못 합니다. 그러니 부처님 자체가 얼마나 감사하고 또 일체 중생들, 풀 한 포기도 곤충 하나도 스승 아닌 게 없다는 것을 아셔야죠.

곤충이라고 깔보지 마세요. 자기 배 속을 잘 들여다보면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 알 것입니다. 자기 육체 속을 들여다보면 자기가 온 곳이 증명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지혜를 좀 더 넓혀서 둘로 보지 않고 전체를 본다면 둘 아닌 도리가 착 나올 것이나, 요 한 그릇 안에서만 본다면 너 나가 아주 뚜렷하게 갈라져 있으니까요, 천차만별로. 그러니까 그렇지 않도록, 지혜로운 마음으로써 관하는 법을 세밀하게 잘 아셔서 내가 급할 때 실천에 옮겨 보세요. 

생활하시면서 아프든지 애고가 오든지 어떠한 것이 오든지, 그거를 고(苦)로 생각을 하지 마시고 재료로 알고 관하세요. 예를 들어서 “네가 고를 안다면 고를 없앨 수도 있느니라.”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고로 알지 마시고 모든 것을 닥치는 대로 ‘아, 이거는 내가 마음의 관법을 공부하라고, 마음공부를 하라고 이 재료가 나한테 닥쳤구나.’ 이렇게 생각하시고 그 재료를 다 거기다가, 용광로에다 넣고 재생돼 나가는 것을 한번 지켜보고 이렇게 한다면 체험이 될 것입니다. 그런다면 자기 주인공을 ‘이게 뭣고?’ 하고 무의미하게 두리번두리번하진 않을 겁니다. 그러니까 꼭 그렇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질문자1(남) 사람마다 불법에 드는 인연이 다르지만 저는 교통사고를 당하여 3년 동안 무척 어려운 생활을 하다가 1년 전부터 불법을 만나게 돼서 제게 닥친 이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안목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다 큰스님의 밝은 가르침 덕분으로 생각하며 언제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질문드리겠습니다.

제가 병원에 입원해 있으면서 보니 사고를 당하거나 또 오랜 지병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사람들이 이런 고통을 당했을 때 생각을 어떻게 지니고 다스려야 궁극적으로 고통에서 벗어날 수가 있는지 좋은 가르침 부탁드리겠습니다.

큰스님 부처님이 나투시는 법을 여러분의 육안으로는 못 보실 겁니다. 불이 들어오고 꺼지는 것만 보지 전력이 들어오고 나가는 거는 못 보듯이 말입니다. 그와 같이 예를 들어서 천지와, 즉 말하자면 우주 전체 삼라만상이 직결돼 있는 그 마음, 가설이 돼 있는 직결처에다가, 즉 자기 안테나에다가 모든 거를 놓았을 때, 아픈 것도 ‘너밖에 낫게 할 수 없어.’ 하고 거기에다 놨을 때는 말입니다, 부처님 마음이 따로따로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부처님이 순간 한 찰나에 약사로 나투어서, 즉 말하자면 낫게 할 수가 있다 이 소립니다. 자기 마음의 그릇이 돼 있음으로써 부처님의 마음이 응신으로 나투어서, 즉 그냥 약사로 화해서 나툰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자기의 마음속에 같이하는 거죠. 둘이 아니니까요. 그렇게 해서 낫게 될 수 있다는 얘깁니다.

이 뜻을 잘 모르시겠지만 이것은 심성 과학이라고 해도 아마 틀린 말은 아닐 겁니다. 과학적으로도 지금 그 심오한 뜻을 모르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관할 때에 ‘너만이 네 몸을 건강하게 이끌고 갈 수 있잖아.’ 할 때에 바로 부처님의, 일체제불의 마음은 한 찰나에 드십니다. 이거는 그릇 없는 그릇을 만들어 놓은 사람이라야만이, 즉 깨친 사람이라야만이 찰나찰나 왕래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직코스로다가 거기에다가 그냥 관하신다면 그대로 약사로 화하셔서 거기 응해 주십니다.

질문자1(남) 감사합니다.

※위 법문은 대행 선사 법문집 ≪허공을 걷는 길≫ 중 1993년 7월 24일 국내지원법회 법문의 일부를 정리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