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묻는 이에게] 마음의 슬기로운 그 묘법이 있는데 왜 바깥으로 끄달리는가

어렵고 괴롭게 살지 말고 좀 편안하게 사세요 무조건 당신을 믿고 당신을 지켜볼 수 있는 그런 마음, 모든 거를 그저 용도에 따라 오는 대로 너만이 해결 할 수 있다는 믿음,  물러서지 않는 마음, 그거라면 공부할 수 있겠죠.

2025-07-18     대행 스님
그림 최주현

생활 선의 이치에 대해
질문 저는 회사 생활을 하고 있는 불자입니다. 가끔 마음의 위안이 필요할 때 절을 찾아가곤 했었는데 불교방송에서 대행 스님 법문을 듣고 제대로 마음 도리를 배우고 싶어졌습니다. 스님께서는 생활 속의 참선 수행에 대해 설하셨는데 저와 같은 중생들도 그 생활 선의 이치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도록 다시 한번 가르침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답변 일단 여러 가지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단지 나한테서 나온 거 나한테다 다시 놓는다는 거밖에는. 그것만 알면 됩니다. 믿고 거기서 한다는 것만 알면, 이날까지 살아온 것도 내가 했고 내가 모든 것을 상대를 맺어 놓고 내가 거기에서 들이고 내고, 오관을 통해서 내가 들이고 내고 한 거지 누가 들이고 내 주는 게 없단 얘깁니다. 그럼 모든 것은 자기로서부터 이 세상에 나와서 자기가 한 거지 누가 한 겁니까? 그러니까 자기가 한 거를 자기한테 놔라 이겁니다. 그러면 “나는 부처도 아니고 중생인데 어떡합니까?” 아닙니다, 그게. 중생이 몸이라고 한다면 바로 이 마음 있기 이전, 마음 내기 이전은 부첩니다, 바로. 그렇다면 구태여 중생이다 부처다 따로 생각할 게 아니라 포함해서 삼합이 그, 삼위일체로 그냥 돌아가는 거죠. 

그래서 우리 이 지구도 그렇지만 우주의 섭류도 그 은하계로 인해서 그 은하계의 그 샛별 뒷면의 그 삼각으로서 이렇게 돼 있습니다. 이게 왜, 이렇게 컴퍼스 있죠? 이렇게 돌리는 거? 그러면 하나는 여기 짚었습니다. 하나는 옆으로 돕니다. 하나는 이렇게 땅으로 이렇게 그어야 둥글어지죠? 그런데 하나는 위, 이렇게 있거든요, 맞춰서. 하나는 위 맞춰서 있고 하나는 아래로 맞춰서 있고 하나는 중간으로 돌거든요. 그러니깐 우리는 이 땅으로 이렇게 컴퍼스를 똥그랗게 그으려면, 이렇게 되면은 이것도 땅 이것도 땅이 아닙니다. 이것이 전부, 이 우주의 섭류라는 것이 한 개의 덩어리 속에 우리가 집을 지어 놓고 그 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이 지금 지구가 태양을 끼고 이렇게 돌아가는 것이 삼각원형을 이루고 있는 겁니다.  

그럼 우리 한 몸뚱이가 살아나가는 것도 생명과 마음 내는 거와 육신이 그게 삼합이 한데 합쳐져서 지금 돌아가고 있는 겁니다. 우리 지금 움죽거리고 살고 있는 게 이게 돌아가는 겁니다. 이 돌아가는 것이 숨 쉬는 거나 마찬가집니다, 눈 깜빡거리고. 숨 쉬는 것은 자도 숨을 쉬고 깨서 이렇게 다녀도 숨을 쉬지 않습니까? 숨 쉬는 것이 끊어지지 않는 것은 당연하죠. 그러면 이렇게 사시면서 숨을 한 번도, 자면서도 깨서도 언제나 숨 안 쉬어 본 일이 없는데, 그게 참선이 아니겠습니까? 그게 진리고요. 끊어지는 게 아닙니다. 잠시 잠깐 자고 깨는 것뿐이에요. 항상 숨은 쉬고 있어요, 같이. 우주의 그 모든 일체 만물과 더불어 만생이 그냥 호흡을 같이 하면서 돌아갑니다. 잠잔다고 해서 숨 안 쉬고 자는 분 보셨습니까? 

그렇게 끊어지지 않는 숨 쉼과 마찬가지로 진리가 그렇게 끊어지지 않고 돌아가거든요. 그 숨 쉬는 고놈이 바로 주인공이라고 한다면 끊어지지 않고 돌아가거든요. 그래서 그것이 영원한 생명의 근원이라고 봅니다. 그러면 바로 이 근원으로 하여금 내가 숨을 쉬고 이러는 것이 바로 쉬지 않고 돌아가니까, 우리 생활이 바로 이렇게 움죽거리게 되고 말을 하게 되고 이러니까, 모두가 그게 포함해서 원형을 이룬다 이겁니다. 그럼 과거도 원형 속에 있는 거고, 미래 사후에도 바로 원형 속에 있는 겁니다. 그럼 공 속에 있다는 얘깁니다. 그러면 과거 미래 현재가 바로 이 공 속에, 현재 우리가 생각하기에 달렸다 이겁니다.  

생각을 크게, 넓게, 걸리지 않게 한다면, ‘모든 것을 거기서 나온 거 거기다 다시 놓자. 놓고 믿자. 그리고 물러서지 말자.’ 마음이 물러서지 않는다면 이 공한 진리에 내가 모든 탐욕과 모든 창살 없는 감옥과 모든 그 애착과 모든 게 몽탕 끊어지게 돼 있습니다. 끄달리지 않게 되자 나는 훨훨 마음의 창살을 벗어나는 겁니다. 벗어나게 되면 그때는 너무도 이 우주의 섭류와 이런 인간의 살림살이, 모든 게 적합하게 공해서 돌아가는 거를 진실로 알게 된다 이겁니다. 내가 한생각이라면 그냥 이렇게 가다가도 만약에 ‘아, 저 사람을 구해 줘야지.’ 하는 생각이 무뜩 났다면 그것도 여기서 생각난 게 아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몽탕 들리는 겁니다, 몽탕! 그 힘이!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다양하게, 내가 아픈 사람을 불쌍해서 그렇게 생각을 했다면 그대로 보이지 않는 약이 글로 갈 것이고, 또 가난해서 불쌍하게 생각을 해 줬다면 바로 보이지 않는 데서 바로 그 가난을, 자기가 그 업보를 면해 주니까 바로 가난함을 없애죠. 그러니까 그걸 가지고 보이지 않는 데서 마음으로 하는 그 무주상 보시! 그 마음으로 한생각 냈기 때문에 한생각이 거기에 융합이 되고 통틀어 그 힘이 한데 가해지게 되자 그건 들리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이거 말로만 이렇게 할 게 아니라 실험을 통해서, 여러분들이 생활하시면서 실험을 통해서 지켜보세요. 실험해 보시고 체험하고 지켜보고 또 하고 이렇게…. 차 운전을 배웠는데 만약에 양면에 그 심봉이 끼워지지 않았다면 차를 끌고 갈 수도 없고 배울 수도 없습니다. 반드시 운전을 배웠어도 한번 해 보고, 내가 실천을 해 보고 또 경험하고 체험하고 이러면서 자기의 그 마음을 크게 만들고, 그걸 자꾸 해 봐서 경험이 돼야 자기가 늠름해지고 그거를 잡아도 떨리지 않지, 그걸 안 해 보면 떨리고 영 안 해집니다. 겁나서 못 해요. 그러니까 항상 숙달이 돼야 되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그냥 그대로 내가 항상 참선하고 있다는 걸 아셔야 됩니다. 숨이 끊어진 사이는 없으니까. 그 숨 쉬고 있는 것이 진리요, 길이요, 바로 부처님 법이요. 내가 만약에 이 몸이 없어진다 하더라도 숨은 쉬고 있는 거니까요. 그건 절대예요. 몸이 무너졌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그걸 비유한 건데 숨 쉬는 건 하나도 끊어지지 않는데 잠을 자도 그냥 몸만 자고, 잠깐 자고 일어나는 거 같은 거다 이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원한 너의 생명의 근본은 그대로 영원히 살아 있는데 네 몸만 없어졌다가 다시 모습을 갈아 가지고 다시 나올 뿐이지 죽고 사는 건 없다. 본래 살아났다고 하는 게 없기 때문에 본래 죽을 것도 없다고 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때에 따라서는 생활하는 데서 자기가 차를 타고 오고 가고, 회사에서 일을 하든지 장사를 하든지, 어쩌든지 자기가 한번 ‘아, 저건 한번….’ 이렇게 지켜보는 그런 사람이 돼 줬으면 좋겠어요, 자기 분야에 따라서. 그런다면 거기에 체험을 하게 되는 겁니다. 

몸이 아파도 관을 하면…
질문 저는 몸이 많이 아파도 관을 하면 아픔이 스르르 사라지는 것을 몇 번 체험을 했었는데 요번에는 관을 해도 소용이 없어서 병원을 찾았습니다. 제가 간절히 관하지 않은 탓일까요?

답변 여러분이 가정에서 이러니저러니, “나는 주인공을 찾는데도 이렇게 안 됩니다.”, “주인공을 찾았더니 잘되다가 또 안됩니다.” 이러거든요. 여러분이 한 발짝 떼어 놓는 것만 알았지 한 발짝 또 놓고 드는 것을 모릅니다. 우리가 한 발짝을 들었으면 한 발짝은 놓고 한 발짝 들었으면 한 발짝 놓고, 이게 정상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안 되는 것도 알아야, 드는 것만 알아서 되는 게 아니라 놓는 것도 알아야, 들고 놓고 들고 놓고 하는 작용을 자유스럽게 할 수 있는 그런 창조력을 기를 수 있다 이 소리입니다. 

그런데 주인공을 찾으니까 어느 만큼 되더니 안 되더라고 합니다. 뒤로 물러서는 것도 알아야지 전진하기만 하면 빠져 죽죠? 때에 따라서는 전진하기만 하면 구덩이에 빠질 텐데 그때는 물러서야 빠져 죽지 않죠? 그러니 드는 것도 법, 들지 않는 것도 법. 그래서 “안 되는 것도 법, 되는 것도 법이니라.” 한 것입니다. 

왜 안 되는 것도 법이라고 했느냐? 구덩이에 빠지겠으니까 빠질 일은 물러서야 한다 이 소리입니다. 그러니 물러서서 다시 굴려서 놓으면 빠지지 않을 데로 갈 수가 있으니까 안 되는 것도 법, 되는 것도 법이라 했습니다. 이거를 지혜롭게 잘 굴릴 수 있어야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생사에서도 벗어나야 한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모든 가정에서 몸만 아파서 아픈 게 아니라 천차만별로 아픔을 가지고 가는데 바로 그 아픔이라는 재료가 지금 거기서 벗어날 수 있는 공부 길에 들어선 걸 뜻합니다. 그냥 맨손으로 들어설 수가 없으니까 그 재료를 가지고 들어선 겁니다. 그 재료가 아니면은 이 길에 들어설 수가 없습니다. ‘이만하면 살지.’ 하는 마음이면 이 길을 들어서려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이 모든 것은 공했다고 했습니다. 수없이 얘길 하지만 프로펠러가 돌아가는데, 그 시공을 초월해서 돌아가는 거기에 먼지 앉을 자리가 어딨습니까? 네? 먼지 앉을 새가 없습니다, 사실은. 그런데 병이 생겼다고 합니다. 병이 났다 하고, 여러 가지 아픔이 생겼다 합니다. 내가 이런 걸 당했다, 내가 가졌다, 내가 병났다, 모두가 ‘내가’입니다, 내가! 내가 공했다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이 뜻을 아시겠습니까? 

고정됨이 없이 돌아간다고 했죠. 여러분이 그걸 짐작하시죠? 고정됨이 없이 보고 듣고 행하고 말하고 만나고 먹고, 고정됨이 없이 말입니다. 그랬으니까 우리가 한시 반시도 그냥 고정되게 있는 게 하나도 없습니다. 변하고 부서지고 모든 게 돌아갑니다. 그런데 거기 먼지 앉을 자리가 어딨겠느냐 이겁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모두 ‘내가, 내가, 내가, 내가’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내가’가 아니라 전체 포함해서 돌아가는 길에 그런 것이 마음에 따라서 부딪치게 되고, 그 업식으로 인해서, 인연에 따라서 업식이 돼서 나한테 자꾸 연관이 되는 거니까 또 부딪치게 됩니다. 그러나 그걸, 내 몸속에 들어서 자꾸 그 용도에 따라서 나오는 것을 말입니다, 업식이라고 하고 업보라고 하고 유전이라고 하고 영계성이라고 하고 이런 거를 다, ‘아픔이 아니다. 내가 인간으로 태어나서 이 모습을 가지고 공부할 수 있는 길을 인도하기 위해서 나한테 공부할 수 있는 재료로 생긴 거다. 업보가 붙어서 그런 게 아니고 병고가 붙어서 그런 게 아니고 공부할 수 있는 재료를 나한테 이렇게 감사하게도 준 것이다. 이끌어 주는 재료가 주어진 거다.’라고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이 재료를 가지고 나는 관찰하고 거기다가, 내 마음의 주인한테다 맡겨 놓고 관찰하면서 실험하면서, 지켜보고 체험하면서 돌아가는 것이 바로 참선입니다. 그냥 틀고 앉아서 ‘이게 뭣고?’라든가, 의정을 강제로 내 가지고 한다든가 이런다면은 그것은 참선이 못 됩니다. 하나하나 지켜보고 체험하고 돌아가는 것이, 그것이 일체 만법의 근원이며 그 근본을 해탈하는 방법입니다. 

그러니 말로만 그냥 “나는 주인공을 찾았는데도 이렇습니다.” 하지 말고, 찾는 게 아니라 발견하는 겁니다. 본래 있는 거니까. 본래 없는 것을 찾는 것이라야 이게 문제가 되지만 여러분이 본래 가지고 있는 거를 발견하는 겁니다. 즉 암흑 속에서 밝음이 불끈 솟아서 불이 일어나면 모두가 밝게 살듯이 말입니다. 

그러니 말로 이러고 저러고 이러고 저러고, 이 병원을 가 봐야 옳을까, 여길 가 봐야 옳을까 저길 가 봐야 옳을까 이러지 마시고, 내 중심에서 ‘이거는 병원을 좀 갔다 와야 되겠다.’ 한다면 그대로 가는 것도 법이고, ‘병원엘 안 가도 이 한마음 속에 이 모든 생명들이 한마음으로 작용을 해 주면 될 수 있다.’ 이렇게 생각이 들면 그대로 거기다 놓고 실험을 하고 지켜보고 이렇게 하는 것이 도리인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과 마음이 통해야지, 내 속에 들어 있는 의식의 그 마음들과. 여러분이 따지고 보면 하나가 아니죠? 이 속에 든 수십억의 그 모습들이 다 여러분의 모습들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그 여러 가지의 모습들이 한데 합쳐서 작용을 해 주는 바람에 여러분이 걸어 다니고 말도 하고 나라고 그러기도 하고, 그러니까 말입니다.

그러니 나를 보러 오더라도 나에게 말을 해서 해결을 하려고만 하지 말고, 그 마음과 마음이 통해서 내 이 마음에다, 모두 한마음에다 넣고 ‘저 마음도 더불어 같이 한마음인데 어찌 스님의 마음인들 이 속에 아니 계시랴. 일체 만법이, 또는 만인의 마음이, 또는 일체제불의 마음이 다, 내가 아파서 응해 달라고 하는데 어찌 응하지 않으랴.’ 그렇게 믿고 마음으로 통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다면 모두가 응신이 돼서 약사가 돼 가지고 여러분의 병을, 몸에 들어 있는 여러 의식과 더불어 같이 한마음이 돼서 고쳐 주시고, 어떠한 애로가 있다면 관세음이 돼 주시고 명이 짧다면 칠성이 돼 주시고, 응신으로 찰나에 드셨다 나시고 드셨다 나시고, 그리고 좋은 데로 못 간다 한다면, 그래서 좋은 데로 가게 해 달라고 이렇게 정성을 지극하게 한다면 바로 지장이 돼서 여러분의 그 의식과 더불어 한데 합쳐서 그 지옥문을 다 허물어뜨리고 나가게 해 줄 수 있는 그런 여건이 생긴다 이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명료한 마음의 슬기로운 그 묘법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여러분이 바깥으로 그렇게 끄달리고 그런다면 어떻게 사람 노릇을 하며 어떻게 모든 것에서, 그 암흑 속에서 벗어나서 이 태양을 다 보고 행하시렵니까?

너무 힘든 인연을 만났는데
질문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많은 인연을 만나 봤지만 크게 마음 일으키는 인연이 없었는데 요즘은 어떤 상대로 인해서 내 인내심이 바닥나고 있습니다. 살다 살다 이런 나쁜 사람은 처음 겪어 봅니다. 마음공부를 하려고 마음먹었더니 공부 인연인 것 같다고 생각은 드는데 마음으로는 너무 힘이 듭니다. 어떻게 마음을 다스려야 하나요?

답변 이렇게 하세요. 이게 전력은 있는데 이 가설만 만들어 놓고 전력이 없으면 불이 안 들어오죠? 그런데 이 세상만사가 전부 인간의 마음의 근본에 다 가설이 돼 있어요. 그러니까 내가 불을 켜는데 그쪽에 어떻게 불이 안 들어오겠느냐 이겁니다, 나하고 벌써 근원이 되는데. 그러니까 어떤 악이 들어온다 하더라도 내 주인공에 탁 맡겨 놓고 그냥 지켜보고 있어 봐요. 그리고 만나걸랑 부드럽게 말해 줘요. 뭐, 이 몸뚱이 가지고 얼마나 삽니까? 모두 가지고 갈 건가요? 내 몸뚱이도 버릴 텐데 뭐 가지고 갈 게 있다고 그렇게 아웅다웅 그래야만 합니까? 편안하게 사세요. 

그러니까 어떠한 걸, 재산을 하늘땅만큼 가졌다 하더라도 내 이 진실한 마음하고는 바꿀 수 없습니다. 그게 부처님 뜻이에요. 그러니까 모든 거는 그 주인공, 찰나찰나 화해서 돌아가는 주인공에 다 이렇게 맡겨 놓고 그렇게 ‘우리가 한마음으로 그저 규합돼서 얼굴 붉히지 않고 살게 해 주는 것도 너 아냐? 이 영원한 친구야!’ 이렇게, ‘한마음 친구야!’ 이래도 좋아요.

이 공부 하는 사람은 선도 없고 악도 없습니다. 선이라고 ‘내가 이렇게 하면 선이 되지.’ 이런 생각조차도 그냥 다 놓으세요. 행이 중요하지 말이 중요한 게 아니에요. 그러니까 하나하나 행하다 보면 그 만 가지, 자기 나무에서 익은 실과가, 한 실과가 만 가지 맛을 낼 때 그 즐거움이란 말로 못 해서 하늘을 보고 한나절을 웃고 땅을 보고 한나절 울었대요. 어때요? 그래서 앞뒤 터진 대피리 소리는 우주 법계를 두루 하더래요. 

좀 그렇게 무조건 당신을 믿고 당신을 지켜볼 수 있는 그런 마음, 모든 거를 그저 용도에 따라서 오는 대로 너만이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 물러서지 않는 마음, 그거라면 공부할 수 있겠죠. 

좌선이라고 하는 것도 내 마음이 편안해야 좌선이고, 망상이라는 것도 나를 이끌어 갈 수 있고 참나를 발견하게 이끌어 주는 바로 과정이거든요. 그런데 망상이라고 생각하니까 그 망상이라고 하는 관념 그것도 놔 버려야죠. 아, 분별이 없으면 어떻게 사람이 됩니까. 분별이 없으면 목석인데 목석이 돼도 아니 되니까 분별을 하더라도 분별을 분별이라고 하지 말고 망상을 망상이라고 하지 말고 그걸 감사하게 생각해야만이 열반으로 직결 들어가는 코스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어렵고 괴롭게 사시지 말고 편안하게 사시라 이거죠. 사람이 한 번 이 세상에 났다가 한 번 옷 벗기는 마찬가진데 옷 벗기 전에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좀 알고나 갔으면 좋지 않겠습니까? 그냥 갈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