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보배의 24번의 계절] 14. 대서_제주길을 걷다(1)
사라진 뭇 생명, 푸른 파도 소리와 돌아오길
우주 만물이 상생하고 순환하는 과정을 목(木), 화(火), 토(土), 금(金), 수(水)의 다섯 가지 기운으로 설명한 음양오행 사상. 옛사람들은 뭇 생명의 본질을 자연의 다섯 가지 성질을 통해 이해하고, 계절의 흐름과 그사이의 미묘한 변화를 읽어 냈다.
그중에서도 일 년 중 땅의 기운이 가장 왕성해지는 때, 그것이 바로 토용의 시간이다.
일 년에 단 네 번. 입춘·입하·입추·입동이 시작되기 전 18일간을 ‘토왕용사(土旺用事)’ 혹은 ‘토용’이라고 부르는데, 이때 겨울은 혹한(酷寒), 여름은 혹서(酷暑)의 시기를 맞이하는 것이다.
입춘을 앞둔 여름의 마지막 절기인 대서(大暑)는 바로 그 혹서와 토용의 시간을 의미한다.
‘염소 뿔도 녹인다’는 대서는 삼복의 더위를 겪으며, 장마의 영향까지 받는 때. 그런 이유로 옛사람들은 작은 더위(소서)와 큰 더위(대서), 또 초·중·말복을 나누어 이 계절의 이정표를 세웠다. 극한에 달하는 여름의 한 뼘마다 잠시 멈추어 설 수 있도록. 또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모두 함께 이 혹독한 계절을 잘 넘길 수 있길 바라며.
이즈음 농촌은 김매기, 잡초 베기, 퇴비 준비 등으로 바쁜 시절. 하지만 무언가를 하는 것보다 하지 말아야 할 것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때이기도 하다.
‘토왕용사’는 토용의 첫째 되는 날에 흙일을 금한다는 뜻을 함께 가진다. 땅의 기운이 극에 이르렀을 때 흙일을 하면 도리어 해롭다는 것. 그것은 아마도 긴 시간 사람과 사람을 통해 전해진 오랜 지혜이자, 경고일 것이다.
하지만 흙이 아닌 바다에서라면 어떨까. 타오르듯 뜨거운 땅이 아니라 넘실대는 망망대해라면. 마냥 내어 주는 대지처럼, 무한히 베풀어 주는 푸른 바다를 ‘바당밭(바다 밭)’이라 부르는 곳. 불에서 태어나 검은 흙을 가진 탐라의 땅, 저 제주의 바다처럼.
‘듬북’ 거름이 밥 먹인다
완연한 여름, 밭갈이를 끝낸 소들은 한라산으로 올라 여름을 나지만 사람의 일은 끝이 없다. 과거 7~8월 제주 바다에선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 있었으니, 바로 거름을 위한 해초를 구해 올리는 일이다.
모든 경지 면적 중에서 논은 0.5%에 지나지 않는 화산섬. 빗물은 죄다 지반으로 스며들어 개간조차 불가능한 이곳에선 자연히 밭농사와 보리, 조, 메밀에 의지할 수밖에. 육지에서는 잡곡으로 취급받는 작물이 제주에서는 주곡의 위치를 차지한 이유다.
하지만 척박한 땅은 그조차 쉽게 내어 주지 않는 법. 거름을 하지 않으면 낟알은 달리지 않았다. 지금이야 언제든 손쉽게 비료를 구하지만, 과거 이 고립무원의 섬에서는 소똥 한 덩이도 쉬이 구하기 어려운 처지.
다시 바다로 눈 돌린 이들에게 바다는 제철을 맞은 풍성한 해초를 내어 주었고, 이는 돈보다 더 귀한 거름 살림으로 되살아났다. 저렴한 화학 비료가 제주를 점령하기 전까지, 푸른 바다풀은 이 섬의 뭇 생명을 먹여 살린 1등 공신이었다.
과거 대서 무렵 제주의 풍경은 너 나 할 것 없이 거름용 해초를 위해 바다로 뛰어들던 모습이다. 어부들은 모자반의 일종인 노랑쟁이(괭생이모자반), 고지기, 듬북(뜸부기) 등이 바다에 밀려오면 그물도 내던진 채 건져내곤 했다.
수시로 물에 들어가 해초를 구하고, 다시 거름을 만드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닌 터라, 땅이 없는 소작민들은 지주 밭에 듬북 거름을 대신해 주는 조건으로 땅을 부칠 수도 있었다고.
테왁에 몸을 기대어, 장낫으로 듬북을 베어오면 1m도 넘는 망사리 무게에 휘청대는 몸. 그렇게 얻은 수확물은 다시 긴 시간 외양간의 소 배설물과 삭힌 쉐걸름(소 거름), 돗통시(돼지우리변소)에서 섞인 돗걸름(돼지 거름), 주식용 밭에 뿌릴 듬북 거름 등으로 재생되어 땅으로 돌아갔다.
척박한 땅을 일구기 위해 더 거친 바다로 뛰어들어야 했던 해민(海民)의 땅.
“새벽에 듬북 한 짐 해 와야 아침밥을 먹을 수 있다”는 제주의 옛말은 듬북이 곧 식량이요, 생명이었음을 잘 보여 준다. 바다와 땅, 사람이 손잡고 함께 살아가던 시절, 그날의 제주 바다는 지금과 분명 다른 모습이었을 것이다.
그 풀이 사라진 곳에
1929년 5월 27일 새벽 2시. 독일인 탐험가 발터 스퇴츠너는 산지항을 통해 제주에 입도했다. 그는 이미 20년 전 조선을 찾아 그 아름다움을 익히 기억하고 있었지만,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적 변화와 일본의 강압적 태도에 도망치듯 제주로 향한 것이다.
2025년 여름, 드레스덴 박물관에 소장됐다가 근 백 년 만에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에 돌아온 그의 기록물들은 오래전 그날의 제주를 증명한다.
‘이곳에는 가축에서 나오지 않은 거름 더미들이 있다. 매번 폭풍이 지나면 해변에 거대한 양의 해조류가 쌓인다. 이 해조류를 더미로 쌓고, 그 위에 짚으로 그늘을 만들어 둔다. 이것을 거름으로 사용하면 축산 거름만큼이나 농작물에 효과적이다’ <1929년 한국 전역을 가로지르며(Kreuz und Quer durch ganz Korea 1929)>
망종 무렵부터 대서까지, 제주에서 두 달간의 여름을 보낸 스퇴츠너는 이곳에서 제주만의 고유하고 아름다운 생업 기술을 꼼꼼히 기록하고 있었다. 하지만 점점 커지는 일제의 야욕, 그로 인한 제주의 무분별한 산업화, 그리고 나날이 퍼져가는 화학성 비료와 환경의 파괴를 보며 그는 연민과 안타까움이 섞인 글로 제주의 미래를 걱정했다.
‘결국에는 이 회복 불가능한 아름다움이 완전히 사라질지도 모른다. 그러면 결국 이 섬에는 단 하나의 거대한 산, 한라산만이 존재할 것이다’라고. 그의 예언 같은 우려는 결국 맞아가고 있는 것일까.
이제 제주 바다에서 미역, 파래, 감태, 톳과 같은 해조류는 침묵 속에 소멸한 지 오래다. 노랑쟁이와 듬북을 찾는 사람들도 이제는 없다. 바다 숲이 사라지며 그 안에 더불어 살던 물고기, 구쟁기(소라), 오분자기(떡조개)도 자취를 감췄다. 토용의 기운마저 뛰어넘는 저 들끓는 바다에서 그들이 설 자리는 없다. 다만 갈 곳 잃은 쓰레기와 기이하게 커져 버린 낯선 바다풀만이 그 빈 곳을 끝없이 잠식해 가는 것이다.
인드라망의 세상
제주시 이도2동, 과거 이곳은 ‘독짓골’이라는 이름으로 맑은 하천이 흐르고 푸른 숲과 기암절벽이 자리했다는 마을. 하지만 맑은 물이 흐르던 냇가는 아스팔트로 뒤덮이고, 울창했던 산세는 크고 작은 빌딩과 공동 주택으로 변한 지 오래다.
그러나 그 안의 작은 섬처럼 푸르름을 지키고 있는 절집 하나. 바로 조계종 제23교구본사 관음사의 말사인 제석사다.
제석사는 제석 신앙을 뿌리로 한 도량으로, 지금도 한라산에서부터 흘러내린다는 석간수가 ‘제석샘’이 되어 이곳을 지킨다. 그리고 저 고적한 대웅전 곁, 제석당에는 순백색의 소조 여래좌상과 오래전 이곳의 시작이었던 석불 3기가 머무르는 것이다.
마치 돌하르방처럼 투박하고 푸근한 제석사의 석불. 지그시 두 눈을 감은 표정은 이제는 사라진 옛 제주의 모습처럼 아련하다.
불법을 수호하고 뭇 중생의 수호신이 되어주는 제석천. 본디 인드라(Indra)라는 이름을 지닌 그의 궁전에는 신비의 그물 ‘인드라망’이 펼쳐져 있다고 한다. 그 그물에는 매듭마다 구슬이 있어, 하나의 구슬이 또 다른 구슬을 비추며 무한히 서로를 투영하는 것이다. 각각의 존재로 되어 있지만 결국 하나로 이어진 세계.
이제는 너무 변해버린 땅과 바다, 그 너머로 숱한 인간의 욕망이 교차한다. 하지만 그 너머에 푸른 파도 소리와 함께 되돌아올 또 다른 마음이 있다고, 간절히 바라보는 것이다.
타오르는 토용의 시간도, 이제는 잃어버린 바다도, 이 절기도 그렇게 함께 손을 잡는다.
[참고]
어느 식솔들의 삶과 ‘듬북’(고광민<제주 해조류와 생활사>), 헤드라인 제주, 기후위기 최전선, 제주 바다 인터뷰(오마이뉴스)
▶한줄 요약
입춘을 앞둔 여름의 마지막 절기인 대서(大暑)는 심한 더위인 혹서와 일 년 중 땅의 기운이 가장 왕성해지는 토용의 시간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