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성미의 심심톡톡] “완벽이라는 외줄 위 아이와 함께해 주세요”
42 불가촉천민 니디를 바꾸신 부처님, 부모 교육 ‘자존감’ (7) 칭찬도 부담 되는 완벽주의 아이 속마음 결과보다 존재 지지하는 어른 역할 중요
완벽하지 않으면 자격 없는 존재처럼 느끼는 아이들이 있다. 겉으로는 자존감이 높아 보이지만, 그 안에는 ‘완벽해야만 가치 있다’는 보이지 않는 잣대가 자리 잡고 있다. 늘 최선을 다하고 성실함이나 성적도 부족하지 않지만, 마음 깊은 곳에는 “나는 결국 실패할 거야”란 불안이 자라난다. 그러나 이 아이들이 정말 실패하고 있는 걸까?
실패라기보다 애초에 도달할 수 없는 기준을 스스로에게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잣대는 너무 높고 완벽해서 현실에서는 닿을 수 없다. 이들이 말하는 ‘성공’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신기루와 같다. 다가가면 멀어지고 닿는 순간 사라진다. 그래서 아이에게 실패는 하나의 경험이 아니라, 예정된 결말처럼 느껴진다. 아무리 해도 부족하다는 감정만 남고, 매번 스스로에게 낙제를 선언하게 된다. 바로 이런 마음의 구조가 아이를 ‘예정된 실패자’로 만들어 버린다.
상담실에서 만난 초등학교 6학년 아이 예슬이(가명)는 성적도 좋고 예의도 바르며 친구들에게도 인기가 많았다. 부모는 늘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교사도 “정말 모범생이에요”라고 말한다. 그런데 아이는 심리검사 중 연필을 꼭 쥔 채 작은 실수에도 얼굴이 빨개졌다. 칭찬도 부담이라고 했다. 다음에는 더 잘해야 할 것 같아서 차라리 아무 말도 안 해주는 게 낫다고 했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자존감이라는 외줄 위를 아슬아슬하게 걷고 있었다.
완벽주의 아이들은 작은 실수에도 쉽게 무너진다. 그림을 여러 번 지우고 다시 그리거나 숙제를 끝없이 고치며 밤늦도록 책상 앞에 앉아 있고, 완성된 과제를 “아직 덜 됐어요”라며 숨기기도 한다. 시험지를 제출하고도 “틀렸을지도 몰라요”라고 불안해하고, 틀린 문제를 보고는 종이를 찢어버리기도 한다. 칭찬을 들어도 “운이 좋았어요”라며 스스로를 낮춘다.
어른은 실패와 자기를 어느 정도 분리할 수 있다. “이번엔 잘 안 됐지만 난 괜찮아”라고 말할 수 있는 힘이 있다. 그러나 아이는 아직 자기 개념이 자라나는 중이며, 실수와 자기를 쉽게 동일시한다. 그래서 작은 실패가 존재 전체를 흔들어 버린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아이들에게 어떻게 도움을 줄 수 있을까? 핵심은 세 가지다. 마음을 있는 그대로 알아주는 ‘심리적 공감’, 결과가 아닌 과정을 지지하는 ‘부모의 언어 변화’, 그리고 잘했을 때뿐 아니라 흔들릴 때도 곁에 있어 주는 ‘존재적 수용’이다.
이 감각은 작고 구체적인 실천에서 시작된다. 아이가 틀린 문제나 어긋난 하루를 만났을 때 “왜 그랬어?” 대신 “그땐 어떤 마음이었어?”라고 물어보자. 그런 다음 함께 ‘실수 노트’를 만들어, 그날의 감정과 스스로를 다독이는 문장을 적어 본다. “3번 문제 틀림. 속상했지만 끝까지 풀었음. 다음엔 더 침착하게 해보자.” 실수를 부끄러움이 아닌 살아낸 순간으로 전환하는 도구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부모가 먼저 실수하는 모습을 자연스럽게 보여주는 일이다. 반찬을 태웠을 때 “오늘은 좀 엉망이야. 그래도 이대로 괜찮지?”라고 웃으며 말해보자. 아이는 실수한 어른도 평온하게 살아간다는 모습을 통해 실수해도 괜찮은 존재라는 메시지를 배운다.
결과보다 ‘시도’에 반응하는 태도는 아이의 자존감을 살리는 열쇠가 된다. 아이가 발표를 망설이다 손을 든 순간, “맞았는지보다 그 마음이 정말 멋졌어”라고 말해주자. 여기에 ‘감정 스티커’를 붙이며 “오늘의 번개: 떨렸지만 끝까지 해낸 나”와 같은 기록을 남기면, 아이는 자신을 평가가 아닌 존재로 받아들이게 된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말은 말로만 전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가 직접 느끼는 경험으로 배워야 한다. 아이들이 외줄 위를 걷는 듯한 불안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면, 가장 필요한 것은 그 옆을 함께 걸어주는 어른이다. 흔들릴 때, 틀렸을 때도 “네가 있어 줘서 고마워”라고 말해주는 단 한 사람. 그 따뜻한 말 한마디가 아이의 내면 대화를 바꾸고 결국 아이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방식이 된다.
똥통을 들고 다니며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존재라 여겼던 니디. 실수 하나에 온몸을 웅크리던 그의 모습은 사실 많은 아이들의 마음속에도 자리하고 있다. 내성적인 아이는 니디처럼 눈에 띄지 않으려 숨고 충동적인 아이는 수치감을 감당하지 못해 폭발하며, 불안이 높은 아이는 자신과 다른 세상을 예측하지 못해 두려워하고, 완벽주의 아이는 실수 하나에 모든 자격을 잃은 듯 무너진다. 겉모습은 달라도 그 안엔 “나는 괜찮은 사람일까?”라는 같은 질문이 있다.
부처님은 똥물이 튄 니디를 꾸짖지 않았다. 대신 조용히 그의 눈을 마주했고, 온몸을 웅크린 니디를 일으켜 세웠다. “그런 너도 괜찮다”라는 말 없는 수용이 니디를 바꾸었다. 자존감은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된다. 실수해도 불완전해도 여전히 괜찮은 존재로 받아들여지는 경험. 그 경험을 아이 곁에서 만들어 주는 어른 한 사람이 있다면, 아이는 언젠가 스스로에게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괜찮은 사람이다. 그대로의 나여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