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원의 불교미학산책]13. 정각원 중단(신중단) 1

법당에 스며든 불교 외적 요소 불교신앙 속 독특한 위치 차지 외부신앙의 존격 수용 고민 필요 사상적 배경 문헌서 찾아 봐야

2025-07-04     서정원 박사
 정각원 신중단에 봉안된 통일찰해도.

앞선 산책에서 우리는 둥국대학교 정각원의 상단(불단), 중단(신중단), 하단(영가단)의 순서를 거꾸로 올라가 보기로 했다. 뜬금없지만, 그룹 ‘W.H.I.T.E’의 ‘네모의 꿈’이란 노래를 아는지 묻고 싶다. 둥근 지구에서 둥글게 살라는 충고를 듣고 살지만 네모로만 이루어진 세상 속에서 그건 꿈이라고 말하는 노래다. 나름 세상을 거꾸로 보자는 내용인데 법당 예절과는 반대로 산책을 하고 있는 우리에게 잘 어울리는 노래다.

정각원의 신중단에는 네모난 모양의 탱화가 봉안돼 있다. 그것은 네 방향을 수호하는 사천왕을 중심으로 4신수, 8괘, 12지신, 12궁 별자리, 여러 불보살, 그리고 한반도를 후광으로 두른 비로자나불을 주존으로 묘사한 불화, ‘통일찰해도(統一察解圖)’이다. 12지신이 불교 문화에 깊이 스며들었다지만, 청룡·백호·주작 같은 상징들과 함께 건곤감리의 괘는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12궁은 누구를 붙잡고, 왜 그 자리에 있는 것인가? 그리고 왜 이런 요소들을 신중단에 그려 넣었을까? 전통적으로 모셔졌던 39위, 104위의 불교 신중님들은 다 어디로 가신 걸까? 이 같은 의문이 절로 든다. 거꾸로 보기로 한 김에, 신중단도 삐딱하게 바라보기로 하자. 

신중단, 신중신앙은 우리 불교 신앙 속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사찰 운영에서 초하루 기도의 중요성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신중기도의 영험함이 사찰 살림살이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 모르는 사람은 없다. 반대로 신중은 삼보(三寶)의 보호자이기에 신앙의 대상이라 볼 수 없다는 주장도 심심치 않게 접하게 된다. 사실 39위든, 104위든 오랜 세월 불교 안에 잘 녹아들었을 뿐이지, 외도의 신격에서 유래했다는 점에서 정각원 신중단의 여러 존격(尊格)들과 차이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이런 불교 외적인 요소들을 불교가 받아들이는 원리는 무엇일까? 첫째로 완전한 거부의 원리다. 이는 불교의 종취에 맞지 않는 모든 것을 배격하는 태도다. 필자는 이에 심정적으로는 동조하나 이천 년이 넘는 불교 역사 속에서 주류의 태도는 아니었던 듯하다. 둘째로 첫째와 반대되는 다원주의적 태도다. 사실상 다원주의적 태도가 대부분 지역불교에서 관찰된다. 그런데 다른 외도들도 전파된 지역의 문화를 어느 정도 받아들이는 것은 보편적으로 관찰된다. 제사를 지내는 교회도 있고, 천주교도 49재와 비슷한 것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렇지만 자신의 판테온(만신전) 안에 다른 종교의 신격을 들이는 세계 종교가 불교 외에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유일신을 믿는 기독교는 그렇다고 치더라도, 유교와 같이 괴력난신을 거부하는 경우도 있지 않은가?

복잡한 문제다. 힌두교의 시바, 비슈누는 마혜수라천, 대자재천과 같은 모습으로 신중단에 잘만 모시면서 불교의 포용적 성격을 부각하는 데 반해 왜 한국의 산신 신앙을 절에 모시는 것은 기복신앙이라면서 비불교적이라고 비판받을까? 위에 말했듯 필자는 이들을 거부, 배격하는 것에 심정적으로는 동조한다. 하지만 똑같은 구조, 즉 외도의 신격을 불교 안에 위치시킨다는 것은 똑같은데, 전자에 비해 후자가 혹독한 비판을 받는 것도 이해가 잘 가지 않는다. 동일 구조는 동일 논리이다. 해석학에서는 동일한 구조라도 상황마다 다른 맥락이 있겠다지만 이는 기만이다. 자신의 실수에 맥락을 보아 달라 할 수 있는 사람, 혹은 맥락에 따라 선해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약자가 아니라 강자다. 

지금에서도 필자는 인도와 변지(중국, 한국 등)의 차이로 이 문제가 보인다. 인도에서 만들어진 경전과 신앙은 진실이고, 중국, 한국에서 만들어진 경전과 신앙은 거짓이라는 주장은 빈약하기 짝이 없다. 그렇기에 만약 산신각이 비불교적이라고 철폐해야 한다면 마땅히 신중단도 치워 버려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외도의 신격을 불교에 안치시킬 방법은 없는 것일까? 이에 대해서 조심스레 말해보자면 이 신격이 깨달음, 즉 불교적 구원과 일치할 수 있다면 불교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반대라면 망설일 필요가 없다. 불교 밖으로 추방해야 한다. 신격이 인도에서 유래했는지 그 외에서 유래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렇기에 우리는 신중단을 향한 우리의 예경이 깨달음의 진주가 될 수 있다고 항변을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신중단의 사상적 배경이 되어 주는 ‘화엄경약찬게’와 같은 문헌에서 사색을 시작해야 할 것 같다. 그런데 ‘화엄경약찬게’에는 그저 〈화엄경〉에 나타나는 여러 존격의 이름과 각 품의 명칭만 나열될 뿐이다. 인도의 원어를 거친 한자음에 맞춰 음역한 여러 이름을 부르는 행위에서 어떤 지혜를 얻을 수 있으며, 어떤 논리를 추구할 수 있을까?

천태지의(天台智)는 산스크리트 화자(話者)가 아니면서도 불교 경전의 이치를 깨달은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교상판석이라는 경전들과 교리 간의 관계를 설정하는 데 제일인자로 그의 교상판석은 고래로 가장 타당한 것이라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천태지의의 경전 이해는 경전 간의 관계와 같은 거시적 부분보다 경전의 문구 하나하나를 분석하는 미시적 부분이 더 압권인데, 간단히 말하면 한자 한 글자마다 모두 깨달음으로 개현(開顯)하는 것이다. 즉, 여시아문(如是我聞)이라고 한다면 여(如)한 글자에 깨달음이 모두 나타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런 독창적 언어관이 잘 드러나는 것이 〈묘법연화경문구〉, 줄여서 〈법화문구〉이다. 이 책은 총 10권의 대작으로 그중 1/4이 제1 서품에 대한 한 글자, 한 글자의 해석이다. 〈법화경〉이 총 28품이니, 그중 1품의 한자만 열심히 연습해도 깨달음에 충분히 다다를 수 있다고 본 것이다. 특히 〈법화경〉 서품에는 ‘화엄경약찬게’에 나타나는 여러 신들이 공통되게 나타나는데, 예를 들어 천태지의는 범천(梵天)의 ‘범(梵)’ 한 글자에 이욕(離欲), 즉 욕심을 벗어나는 교리와 관법을 동시에 제시하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외도의 브라흐만이 이욕의 수도행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는 사실 인도에서는 불가능한 이해이다. 굴절어인 산스크리트에서 ‘범’이란 글자는 인식되지 않는다. 반면 고립어인 한자에서만 ‘범’자는 그 글자 자체로 다른 의미로 나아갈 수 있게 된다. 네모 안의 한자인 ‘범’이 둥글게, 원만히 욕심을 여의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이다. 
또 말이 너무 길어져 신중단을 불교로 만드는 데 지면이 부족해졌다. 하지만 아직 더 신중단을 바라보며 ‘네모의 꿈’을 조금 더 얘기하고 싶다. 왜냐하면 도형학의 미학은 언급조차 못 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