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법일기] ‘행복’이라는 그늘 아래 깊숙이 자리한 나의 탐욕
어린 시절 부모님 그늘에 있었을 땐 세상 걱정이란 게 없었다. 성인이 되어 직장 생활을 하며 보낸 시간도 나름 행복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행복해지고 싶은 마음에 출가한 나는 지금 어떤가?
처음엔 날마다 행복할 줄 알았다. 또 수행자의 삶 속에선 모든 욕망과 걱정이 사라질 줄 알았다. 그러나 이내 나의 내면에 깊숙이 자리한 욕망과 탐욕을 마주하게 되었다. 출가 이전에 느꼈던 ‘행복’이라는 감정은 돌이켜 보면 단지 재물이나 편안함이라는 조건이 충족되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말한다. “출가하면 행복해질 거야. 수행하면 괴로움이 사라질 거야.”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교육, 사회, 환경 등 변화하는 시대 흐름 속에서 재물에 대한 욕구는 여전히 존재한다. 늘 만족시키긴 어렵고, 마음은 쉽게 흔들린다.
태초부터 지금까지 인간은 생·노·병·사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고통을 딛고 행복을 찾고자 애써 왔다. 그 과정에서 인간은 정신과 육체의 욕구를 충족시킬 때 비로소 ‘행복하다’고 말한다. 이 욕구는 ‘소유냐 존재냐’의 물음처럼 “그것은 나에게 있다”, “나는 그것을 가지고 있다”는 집착으로 이어진다. 결국 재화의 획득과 소비는 권력의 수단이 되고, 지나친 탐욕으로 고통을 자초한다.
현대 사회는 물질주의를 성공의 척도로 삼는다. 재물을 많이 가진 사람을 ‘성공한 사람’으로 부르지만 정신적 가치, 즉 ‘행복지수’는 뒷전이 된다. 물질적 성취에만 집착한 결과, 사람들은 끊임없는 결핍과 허무 속에서 방황한다.
불교는 재물에 대한 가르침을 분명히 한다. 종종 불교는 재물에 부정적인 것으로 오해받지만, 그것은 출가자와 재가자의 구분을 무시할 때 생기는 오해다. 부처님은 출가자에겐 최소한의 물질과 사무량심[자(慈)·비(悲)·희(喜)·사(捨)] 외 선행(善行), 선법(善法)의 추구에 있는 비물질만을 허용하고, 재가자에겐 정당한 경제 활동을 장려하셨다.
“제자는 열정적인 노력으로 얻었고, 팔의 힘으로 모았고, 땀으로 획득했으며, 법에 따라 얻은 재물로 네 가지 일을 한다.” <앙굿따라니까야>
이처럼 부처님은 재가자에게 법답고 정당한 방법으로 재물을 모으는 것을 권하셨다. 특히 바른 획득, 바른 소비, 바른 생활의 방식으로 재물을 취했을 때 비로소 ‘부를 획득함으로 얻는 행복, 소비함으로 얻는 행복, 부채 없는 행복, 그릇된 행위가 없어 비난받지 않는 행복’인 네 가지 행복을 가져다 준다.
그러나 현대인은 이 가르침을 잊고 더 많이 소유하고 소비하려는 끝없는 욕망, 탐욕에 사로잡힌다. 물론 탐욕은 주관적이기에 그 경계를 정하기란 어렵다. 그러나 재물을 어떻게 소유하고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따라 우리의 삶은 크게 달라질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에게 말한다. “정신 차려!” 그러곤 놀란 마음으로 깨닫는다. “그래도 괜찮아, 지금 알아차렸으니….” 오늘도 나는 나의 행복을 위해 내 마음의 세상으로 조심스레 한 발 내디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