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관사 태극기, 국보 승격하고 태극기 박물관에 모셔야”

6월 29일 백초월 스님 학술 세미나서 “근대 태극기史 새길 최초 박물관 필요” 사찰서 최초-일장기 개조 최고 “국보 충분”

2025-06-29     여수령 기자
6월 29일 서울 한문화체험관에서 열린 ‘초월 스님 순국 81주기 및 광복 80주년 기념 학술 세미나’에서 이광표 서원대 교수는 진관사 태극기 박물관 건립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이재명 대통령이 취임 후 공식 석상에서 배지로 착용해 국민적 관심이 고취되고 있는 ‘진관사 태극기’의 국보 승격과 태극기 박물관 건립이 필요하다 주장이 제기됐다.

6월 29일 서울 진관사 한문화체험관 흙다움에서 열린 ‘초월 스님 순국 81주기 및 광복 80주년 기념 학술 세미나’에서 이광표 서원대 교수는 태극기 박물관 건립의 필요성을, 송명호 전 중부대 교수는 진관사 태극기의 국보 승격의 당위성을 각각 발표했다.

진관사 태극기 역사·문화적 가치 조명

사단법인 백초월스님 선양회(이사장 법해 스님)와 진관사(주지 법해 스님)가 주최한 이날 대회는 일제의 폭압 속에서도 불교의 호국정신을 실천하며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백초월 스님의 숭고한 뜻을 기리고, 진관사 태극기가 지닌 역사·문화적 가치를 재조명하기 위해 마련됐다.

첫 번째 발제자로 나선 이광표 교수는 ‘진관사 태극기의 기억과 향유 : 태극기 박물관의 필요성’에서 진관사 태극기의 문화유산적 가치를 살피고 태극기 박물관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이 교수는 “진관사 태극기의 발견 과정과 태극기의 제작 방식, 함께 발견된 동반 자료 등은 모두 이례적이며 극적”이라고 평가하고 “이러한 특징은 앞으로 진관사 태극기를 수용하고 기억하며 선양하고 활용하는 과정에 그 방향을 설정하는 데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강조했다.

이어 진관사 태극기의 발견 과정과 이후 언론보도 등을 예로 들며 “진관사 태극기에 얽힌 스토리는 그 어떤 문화유산보다 대중과 소통할 수 있는 역사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갖추고 있다”며 “이러한 스토리가 대중과 공유될 때 대중은 문화유산을 더 기억하고 향유하며 후대에 전승하게 될 것”이라고 의미를 짚었다.

“제작부터 발견까지, 역사·대중성 갖춰”

태극기 박물관의 역할은 두 가지로 제시했다. 하나는 진관사 태극기를 보존‧연구하고 전시‧활용하는 역할이고, 다른 하나는 국내 유일의 태극기 박물관으로 근대기 태극기의 기원과 전개 양상, 의미와 상징성, 태극기에 얽힌 다양한 인물과 에피소드를 한자리에서 이해하고 체험할 수 있는 공간으로 역할하는 것이다.

이 교수는 “태극기 박물관은 진관사 태극기와 그것이 오랜 세월 감싸고 있었던 독립운동 관련 신문과 문건 등 동반 자료를 유기적으로 연결함으로써, 근대기 태극기의 정체성과 상징성을 생동감 넘치게 이해하고 경험하는 공간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국내 유일 박물관…근대 태극기 정체성 함의

논평자로 나선 김시덕 을지대 교수는 1991년 발견된 미라 ‘외치’를 전시하는 남티롤고고학박물관의 스토리텔링을 예로 들며 “진관사 태극기 박물관이 건립된다면 독립운동사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미술사‧민속학 등 학제간 연구를 통해 또 하나의 스토리를 생산하는 밑거름이 될 것”이라고 제언했다.

태극기 전문가인 송명호 전 중부대 교수는 진관사 태극기가 국보로 승격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송 교수는 ‘진관사 태극기의 재조명-보물에서 국보로’ 주제 발표에서 진관사 태극기의 발견에서 보물로 지정되기까지의 과정을 살피고, 문화유산의 지정기준에 근거해 승격 필요성을 고찰했다.

태극기 전문가인 송명호 전 중부대 교수는 ‘진관사 태극기의 재조명-보물에서 국보로’ 주제로 발표했다.

사찰 최초 발견-일장기 개조 “국보 기준 충족”

송 교수는 진관사 태극기가 △우리나라 사찰 중 태극기가 최초로 발견된 점 △일장기 위에 태극기를 덧그린 것 중 가장 오래된 현존 태극기라는 점 △일제강점기의 자료들을 태극기에 접어 싸서 숨겨둠으로써 보존시킨 점에서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크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진관사 태극기의 이러한 배경과 의미는 당시 사찰에서 보여준 독립의지와 항일투쟁의 한 단면이자, 태극기 제작 기법 등 변천 과정을 연구하고 국가 정체성과 애국심을 고취하는 교육 자료로 아주 희귀하고 소중하다”고 강조했다.

송 교수는 다른 나라에서 국기를 국보로 지정한 다양한 사례를 제시하고 “백초월 스님이 저항과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방법과 수단으로 일장기를 개조해 태극기를 만든 희소성과, 그 시대적 배경이 100년을 훌쩍 넘는 역사적·학술적 가치를 갖는 만큼 국보로 승격 지정 보존하는데 모두가 힘을 모아야 할 때”라고 말했다.

“진관사 태극기 보존 연구 위해 승격 필요”

김상엽 경기도 문화유산위원은 “진관사 태극기는 불교계뿐만 아니라 국내외 독립운동의 활동상과 그 의의를 밝혀줄 수 있는 중요한 증거”라며 “진관사 태극기를 잘 보존하고 연구해 의의를 밝히는 작업은 우리에게 남겨진 소중한 책무이고, 이를 위해 국보 승격 지정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논평했다.

이어 김광식 동국대 교수가 ‘백초월 독립운동의 이념-호국불교에서 민족불교, 세계주의로’ 주제 발표를 통해 초월 스님의 독립운동이 서산‧사명대사의 인식을 계승, 실천한 것이라 평가했다.

앞서 개회식에서 진관사 주지 법해 스님은 “올해는 광복 80주년이자 백초월 스님의 순국 81주기가 되는 해”라며 “조국의 독립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신 백초월 스님의 숭고한 희생과 헌신으로 오늘의 자유와 평화를 누리고 있음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고 당부했다. 또 “오늘 세미나는 미래를 향한 실천의 길을 함께 모색하는 자리”라며 “스님의 숭고한 독립정신과 나라사랑이 널리 선양되길 기원한다”고 말했다.

조계종 총무원 사회부장 혜공 스님.

“태극기 박물관 건립에 조계종도 적극 지원”

조계종 문화부장 혜공 스님은 축사에서 “오늘 세미나를 기점으로 진관사 태극기의 소중한 가치가 더욱 널리 알려지길 바란다. 더불어 태극기 박물관을 건립해 진관사 태극기에 담긴 염원과 가치를 국민과 공유하고 미래세대를 위해 보존 전승하는데 종단도 적극 지원하겠다”고 말했다.

김미경 은평구청장은 “이제는 ‘은평구에 있는 진관사’가 아니라 ‘진관사가 있는 은평’이라고 말할 정도로 진관사는 역사적 문화적 가치가 높은 곳”이라며 “앞으로 초월 스님의 드높은 정신을 확산해 나갈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임돈희 동국대 석좌교수는 “진관사 태극기가 국보로 승격된다면 그 의미를 더욱 널리 알려질 수 있을 것”이라며 “진관사 태극기가 역사 속에만 머물지 않고 그 정신을 오늘날에도 이어갈 수 있도록 박물관 건립 등 다양한 활동이 이어지길 바란다”고 축사했다.

초월 스님 순국 81주기 다례재도 봉행

한편, 이날 오전에는 백초월 스님의 순국 81주기와 광복 80주년을 기념하는 추모 다례재가 진관사 대웅전에서 봉행됐다. 다례재에는 주지 법해 스님과 김미경 은평구청장, 백초월 스님의 증손 백외식 씨 등이 참석했다.

 

 

진관사 태극기는?

국가지정문화유산 보물 ‘서울 진관사 태극기’는 2009년 5월 26일 서울시 은평구 진관사의 부속건물인 칠성각(七星閣)을 해체·복원하는 과정에서 내부 불단(佛壇) 안쪽 벽체에서 발견됐다. 당시 태극기에 보자기처럼 싸인 독립신문 류 19점이 함께 발견됐다. 신문류는 ‘경고문’, ‘조선독립신문’, ‘자유신종보(自由晨鐘報)’, ‘신대한(新大韓)’, ‘독립신문’의 5종이다. 이 신문들이 1919년 6월 6일부터 12월 25일까지 발행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진관사 소장 태극기 역시 3.1만세운동이 일어나고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된 1919년경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태극기를 숨긴 인물은 진관사 승려였던 백초월(白初月) 스님으로 추정된다. 백초월 스님은 3.1만세운동 직후 비밀 지하신문인 ‘혁신공보’를 발간해 독립의식을 고취했으며, 불교계의 자금을 모아 임시정부와 만주 지역의 독립군 부대에 제공하는 등 국내 불교계의 독립운동을 실질적으로 총괄한 인물이다.

진관사 태극기의 가장 큰 특징은 기존 일장기 위에 태극과 4괘의 형상을 먹으로 덧칠해 항일 의지를 극대화했다는 점이다. 특히, 왼쪽 윗부분 끝자락이 불에 타 손상됐고 여러 곳에 구멍이 뚫린 흔적이 있어 만세운동 당시 혹은 그 이후 현장에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따라서 현재 1919년에 제작된 태극기가 거의 알려지지 않은 상황에서, 이 태극기는 1919년에 제작된 실물이라는 자체만으로도 중요한 의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