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일야의 시, 불교를 만나다] 12. 김광섭의 ‘저녁에’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김광석 부고 오보, 김환기 名作 이끌어 가수 ‘유심초’ 노래로 널리 알려진 시 인연과 재회 기약 내용에 윤회 떠올라 윤회 사상, 인연 자애롭게 대하게 해
사람 일이라는 게 참으로 알 수 없는 것 같다. 자식이 성공해서 매스컴에 자주 나온다고 좋아했는데, 오히려 과거에 저지른 부모의 잘못이 드러나 곤욕을 치르니 말이다. 그러고 보면,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는 속담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 〈명심보감〉에서도 “사람이 살다 보면 어느 곳에서 서로 만날지 모르니, 원수를 맺지 말라[人生何處不相逢 讐怨莫結].”고 했다. 비록 전래동화지만 흥부는 부러진 제비 다리를 고쳐 준 작은 친절로 큰 부자가 됐다.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인생이다.
얼마 전 우연히 김광섭 시인의 ‘저녁에’를 읽게 됐다. 이 시는 대중에겐 가수 유심초가 부른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라는 노래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시를 읽으면서 문득 불교의 ‘윤회(輪廻)’란 단어가 떠올랐다. 윤회란 나고 죽는 과정을 되풀이한다는 뜻이다.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이 전생에 어떤 인연으로 맺어졌는지 알 수 없지만, 단순히 우연만은 아닐 거라고 많은 불자들은 생각한다. 그리고 지금 만나고 있는 인연이 다음 생에 어떤 관계로 이어질지 모르는 일이다. 오늘의 시 ‘저녁에’를 주목하는 이유다.
김광섭(金珖燮, 1905~1977) 시인은 함경북도 경성군 출신으로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 와세다대학 영문과를 졸업할 정도로 촉망받던 인재였다. 귀국 후에는 모교인 중동고등보통학교에 영어 교사로 부임해 학생들을 가르쳤다. 당시 그는 일제의 민족 차별 정책과 조선어 말살 정책을 강하게 비판했다. 이뿐만 아니라 총독부의 탄압으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폐간되는 것을 보고 일제의 언론탄압 정책에 대해 강력하게 문제를 제기했다. 이러한 차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조선의 독립이 필요하다고 그는 학생들에게 역설했다.
이를 그냥 바라만 볼 일제가 아니었다. 1941년 김광섭은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했다는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된다. 잔혹한 고문을 받은 시인은 특별보안법 위반죄로 기소돼 옥고를 치러야 했다. 이는 친일이나 현실 도피를 택하지 않는 한, 식민지에서 살아가는 지식인의 운명이지 않을까 싶다. 온갖 고초를 겪은 그는 1945년 8월 15일 그토록 바라던 해방과 함께 마침내 자유의 몸이 된다.
1948년 정부 수립 후 김광섭은 이승만 대통령의 공보 비서관을 지냈으며, 대전신문과 세계일보 사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또한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다양한 작품 활동을 했다. 김광섭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성북동 비둘기’는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널리 인정받은 작품이다. 그는 독립 유공자로 국민훈장 모란장과 건국 포장을 받기도 했다. 〈동경〉을 비롯하여 〈마음〉, 〈성북동 비둘기〉, 〈해바라기〉 등 여러 시집이 있다.
오늘의 시 ‘저녁에’는 추상 미술의 선구자 김환기(金煥基, 1913~1974) 화백과의 인연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시인과 화가는 어린 시절 한동네에서 자란 이웃이었다. 김환기가 뉴욕에서 활동할 때도 서로 편지를 주고받을 정도로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화백은 김광섭 시인이 뇌졸중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오보를 접하게 된다. 깊은 상심에 빠진 그는 시인을 생각하면서 붓을 들었고, 그렇게 탄생한 그림이 바로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라는 제목의 점화(點)였다. 시의 마지막 구절을 제목으로 삼을 만큼 벗에 대한 그리움이 컸던 것이다. 화백이 그린 수많은 점은 어쩌면 어린 시절 시인과 함께 바라본 밤하늘의 별이었을지 모를 일이다. 화백의 점화 시리즈는 이런 사연 속에서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이 그림으로 화백은 한국일보가 주최한 제1회 ‘한국미술대상전’에서 영예의 대상을 수상했다. 비슷한 시기에 그려진 ‘우주’라는 제목의 점화는 2019년 크리스티 홍콩 경매에서 132억원이라는 거액에 낙찰됐다. 한국 미술품 역사상 최고가를 갈아 치운 명화가 잘못된 오보로 탄생했으니, 인생이란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다. ‘저녁에’의 인연은 그림에서 그치지 않고 앞서 언급한 가수 ‘유심초’에 의해 명곡으로 새롭게 탄생한다. 이 노래로 ‘유심초’는 1981년 10대 가수 가요제에서 신인 가수상을 받았다. 고마운 인연의 연속이다. 직접 들어보기로 하자.
“저렇게 많은 중에서 /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 밤이 깊을수록 /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 이렇게 정다운 / 너 하나 나 하나는 / 어디서 무엇이 되어 / 다시 만나랴”
모든 인연을 자애심으로 대하라
언젠가 교회를 다니는 지인이 불교의 윤회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고 말한 적이 있다.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어떻게 전생의 자식이 지금의 아내가 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이는 인간의 질서를 무시한, 한마디로 콩가루 집안이라는 것이다. 이야기를 듣고 보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닌 것 같았다. 기독교뿐만 아니라 가족 간의 윤리를 중시하는 유교(儒敎)에서도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다. 과연 윤회는 인간관계를 콩가루로 만드는 사상일까?
알려진 것처럼 윤회는 인간이나 동물, 아귀(餓鬼) 등으로 반복해서 태어나는 것이다. 우리가 인간으로 태어난 것도 전생에 살생과 도둑질, 음행, 거짓말, 음주를 금하는 오계(五戒)를 지키면서 비교적 선하게 살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다음 생 역시 금생에서 어떻게 사느냐에 달려 있다. 나쁜 짓을 하면서 악하게 살면 지옥에서나 축생의 몸으로 태어나고, 착하게 살다 죽으면 하늘에서나 지금보다 좋은 환경에서 나게 된다.
이러한 윤회를 불교의 고유 사상이라 생각하는 이들이 많은데, 실은 그렇지 않다. 불교가 태동하기 훨씬 이전부터 인도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끝이 아니라 또 다른 모습으로 반복해서 태어난다고 믿었다. 불교에서는 이러한 인도의 전통 사상을 수용해 새롭게 정립했다. 특히 부파불교에 이르면 윤회설(輪說)이라는 하나의 학설로 자리잡게 된다. 그들은 사람이 죽으면 살면서 몸과 말, 마음으로 행한 업(業)에 따라 다음 생이 결정된다고 믿었다. 죽은 다음 선업(善業)과 악업(惡業)의 결과를 계산하기까지 보통 10일에서 49일 정도 걸린다고 하는데, 절에서 49재(齋)를 지내는 것도 여기에서 유래되었다.
한때 출가해서 스님 생활을 했던 벗이 내 전생이 보인다고 전화한 적이 있다. 자신이 애정하는 사람을 생각하면서 참선에 들면 가끔 전생의 모습이 보인다는 것이었다. 벗에 의하면 내가 전생에 티베트의 학승이었다고 한다. 웃으면서 전화를 끊었지만, 어쩌면 그 말이 사실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내 전생에 대한 사실 여부를 확인할 방법은 없다. 윤회는 검증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믿거나 말거나, 둘 중 하나라는 뜻이다. 다만 한 개인의 삶의 내용과 의미를 결정한다는 점에서 믿고 안 믿고의 차이는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인생을 아무렇게나 살 수 있다. 자신의 행위에 대한 과보를 받지 않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윤회를 믿는다면 결코 가볍게 행동할 수 없다. 악한 행위를 하면 지옥으로 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믿음이 있으면 자연스레 좀 더 선하고 의미 있게 살려고 노력하게 된다. 결국 윤회에 대한 믿음에 따라 삶의 양식이 달라진다는 점에서 이는 매우 중요하다 할 것이다.
시인은 어떤 인연이 있기에 수많은 별들 가운데 유독 하나가 자신과 눈을 마주치는 것인지 놀라워하면서 밤하늘의 별을 바라본다. 어찌 보면 기적 같은 일이라 할 수 있다. 수천억 분의 1의 확률이라고 말하면 조금 실감이 날지 모르겠다. 불교에서는 이러한 인연을 ‘희유(稀有)하다’고 말한다.
이처럼 소중한 인연이라 해도 영원할 수는 없다. 아침이 밝아오면 그 별이 사라지듯 우리의 삶도 때가 되면 이별해야 한다. 이렇게 정다운 인연인데 여기서 끝이라면 너무 서운한 일이다. 그래서 시인은 다음을 기약하면서 노래한다. 너 하나와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날지 모른다고. 가수 ‘유심초’는 시에는 없는 ‘나비와 꽃송이 되어’라는 가사를 넣어 다시 만나자고 노래했다. 통속적이지만 좋은 관계로 재회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다.
다음에 좋은 인연으로 만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말할 것도 없이 지금 만나는 사람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오늘 좋은 인연을 맺는다면 다음도 좋을 것이고, 나쁜 관계가 지속된다면 악연은 피하기 어렵다. 선한 인연을 쌓을 충분한 이유가 있는 셈이다.
서두에서 기독교인이 말한 콩가루 집안은 좀 더 상징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윤회에는 지금 만나는 인연이 전생에 어쩌면 나의 부모일 수도 있으니,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도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어려운 상황에 놓인 이웃이 전생에 나의 가족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냥 지나칠 수 없을 것이다. 작은 도움이라도 주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을까. 이처럼 내가 만나는 모든 인연을 자애심으로 대하라는 것이 윤회 사상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메시지다. 참으로 좋은 인연이다.
▶한줄 요약
이 시를 읽으면서 ‘윤회(輪廻)’란 단어가 떠올랐다. 지금 내 옆 사람이 전생에 어떤 인연이었는지, 다음 생에 어떤 관계로 이어질지 모르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