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성미의 심심톡톡]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시무외자 부모
41 불가촉천민 니디를 바꾸신 부처님, 부모 교육 ‘자존감’ 아이의 불안은 문제 아니라 ‘신호’ 기질 차이 품는 마음이 두려움 극복
“선생님, 저 잘하고 있는 거 맞죠? 진짜 괜찮은 거 맞아요?”
한 문장을 몇 번씩 되묻는 아이. 선생님의 고개 끄덕임과 “괜찮다”는 말이 확인되어야 비로소 마음이 조금 놓인다.
이 아이는 조용하고 반듯하며 누구보다 열심히 하려는 태도를 보인다. 하지만 그 안에는 늘 긴장이 감돌고 실수나 예고 없는 변화 앞에서는 쉽게 무너진다. 불안이 높은 아이는 평범한 일상에서도 늘 ‘혹시’라는 생각으로 마음을 졸인다. 무언가 틀리면 관계가 깨질까 두렵고, 작은 실수조차 “나는 부족한 사람”이라는 판단으로 이어진다.
그럴 때 우리는 아이의 기질을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다. 불안이 높은 아이들은 대체로 감각이 예민하고 낯선 환경에 민감하며, 변화에 취약한 타고난 기질을 갖고 있다. 쉽게 말해, 세상을 마주하는 ‘기본 설정’이 다른 것이다.
이 아이들은 세상을 ‘재밌고 신나는 모험의 장’으로 보기보다 “내가 실수하면 어떻게 하지”, “사람들이 날 어떻게 볼까”라는 질문이 먼저 떠오른다. 경계심을 품고 주변을 살피며 불확실한 상황은 위협으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미리 걱정하고 확인하며 마음을 단단히 다지려 애쓴다. 그 모든 노력은 결국 “안전하고 싶어서”이다.
이런 기질은 약점이 아니라 다른 방식의 민감성이다. 위험 감지 능력이 뛰어나고 조심성이 깊으며 공감 능력 또한 섬세하다. 하지만 동시에 자극에 쉽게 압도되고 낯선 관계에서는 마음의 긴장을 늦추지 못한다.
아이의 기질만큼 중요한 것이 있다. 바로 부모의 기질이다. 우리가 아이를 이해하려 한다면, 먼저 나 자신을 이해해야 한다. 내가 어떤 성향의 사람인지, 세상을 어떻게 해석하는 사람인지 알지 못한 채 아이를 바라보면, 자칫 내 기준과 감정을 아이에게 덮어씌우게 된다.
기질이 다르다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하지만 그 차이가 말하지 않은 감정을 왜곡되게 전달할 때, 관계 안에서 보이지 않는 틈이 생긴다. 부모는 아이를 지지하고 있다고 느끼지만, 아이는 그 안에서 ‘내 감정은 틀렸다’고 해석한다.
예를 들어 자극을 추구하고 걱정이 적은 부모는 “그냥 해보면 되잖아”라는 말로 용기를 주려 하지만, 불안이 많은 아이는 그 말 속에서 “나는 너무 이상하게 반응하고 있구나”라고 받아들인다. 위험을 가볍게 넘기고 새로운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부모, 감정 표현에 무던한 부모는 아이의 걱정과 불안을 ‘예민함’이나 ‘오버’로 받아들이기 쉽다.
반대로 부모 자신도 불안이 높은 기질이라면, 아이의 불안을 너무 잘 이해한 나머지 대신 걱정해 주거나 과잉 개입하게 되기도 한다. 이것 역시 아이의 불안을 줄여 주기보다는, 스스로 감정을 견디고 조절할 기회를 빼앗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기질의 차이’가 서로에게 어떤 메시지로 전달되고 있는지를 자각할 필요가 있다. 기질 자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이 관계 안에서 어떤 오해를 만들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아이의 불안은 행동의 문제가 아니라 ‘신호’다. 그 신호를 무시하거나 빨리 없애려하기보다, 그 속에 담긴 의미를 읽고 머물러 주는 태도가 필요하다. 불안은 고쳐야 할 결함이 아니라 아이가 세상을 해석하는 방식이며, 그 나름의 조심성과 진지함이 담긴 조건이다.
아이를 돕고 싶다면 먼저 내가 쓰고 있는 색안경을 벗어야 한다. 불안을 과장하지도, 축소하지도 않고 있는 그대로의 아이를 바라보는 일. 그렇게 부모가 먼저 조율하고 기다릴 수 있을 때, 아이는 자기감정을 믿을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관세음보살은 ‘두려움 없음을 베푸는 이(施無畏者, 시무외자)’로 불린다. ‘시무외자(施無畏者)’란 말 그대로 ‘두려움 없음’을 베푸는 사람을 뜻한다. 즉 불안, 공포, 위협 속에 있는 이에게 마음 놓을 수 있는 안전함과 신뢰를 실천하는 존재이다.
‘보문품’에 따르면, 관세음보살은 고통받는 중생에게 가장 필요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누군가가 부처의 가르침에서 위안을 얻는다면 부처의 모습으로, 성문이나 벽지불의 법문을 따르는 이에게는 성문과 벽지불의 모습으로, 장자나 동자, 혹은 하늘의 신령한 존재로도 응현해 그가 마음을 열 수 있도록 다가간다.
관세음보살이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이유는 단순한 변신이 아니라, ‘두려움 없음을 베푸는 이(시무외자)’로서의 자비 실천이다. 두려움은 낯섦에서 온다. 고통 속에 있는 사람은 낯선 존재 앞에서 쉽게 마음을 닫는다. 관세음보살이 익숙한 모습으로 다가간다는 것은 마음의 문턱을 낮추는 배려이다. 또한 같은 모습은 연대감을 준다. “나는 너와 다르지 않다”는 침묵의 메시지를 통해 마음을 열고 안도할 수 있는 신뢰가 생긴다. 신뢰할 수 있는 방식으로 다가옴 자체가 위로임을 알아야 한다. 관세음보살은 상대가 가장 편안히 받아들일 수 있는 얼굴로 다가가며, 그 마음에 맞춰 자비를 실천한다.
불안이 많은 아이 앞에서 우리는 얼마나 자주 조언하고 고쳐주며 설득하려 했는가. 오늘 부모로서 우리가 아이 곁에 머무는 방식, 아이의 불안과 함께 살아가는 태도, 그리고 기질의 차이를 넘어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는 그 모든 노력이 바로 불안감이 높은 아이의 ‘시무외자’가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