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원의 불교미학산책] 12. 정각원 하단(영가단)
허물어지는 모든 것 관조하는 자리 영가와 인연 기억하는 영가단 ‘동국상방대광명’은 ‘추억하는 빛’ 주련 세 구절, 깨달음으로 이어져
지난 회에 이어 우리는 정각원 주련의 세 구절이 해석되지 않은 채 법당 안으로 들어선다.(해당 구절은 ‘동국상방대광명東國常放大光明[동국대학교에 항상 부처님 대광명이 비추고]’, ‘법륜상전어법계法輪常轉於法界[부처님의 법이 더욱 빛나 온 누리에 쉼 없이 구르며]’, ‘자타일시성불도自他一時成佛道[나와 네가 모두 함께 성불하리라]’이다.)
보통 법당은 부처님과 보살님, 혹은 여러 성자나 호법신 등 해당 법당의 주존을 모신 상단(불단), 불법을 지키는 신중을 모신 중단(신중단), 영가를 모신 하단(영가단)으로 이뤄져 있다. 법당에 들어가면 주존을 모신 상단에 먼저 인사를 드린 다음, 법당을 지켜 주시는 중단에 인사를 올리고 유주무주의 영가와 인연 있는 분들을 기억하는 하단, 즉 영가단에 시선이 머물게 된다.
처음 사찰 예절을 배울 때 법당의 상·중·하단에 삼배를 올리는데 몇 가지 궁금증이 생겼던 게 기억난다. 불교를 믿으니 부처님께 예경 올리는 것은 당연하게 느껴지지만 왜 갑자기 신중과 같은 ‘비현실적 존재’에게도 절을 해야 하는 것인지, 남의 집 영가들에게 왜 예경을 올려야 하는지, 남의 집 제삿날에 가면 같이 절을 올리는지 등이다. 이해가 가지 않으니 중· 하단의 예경이 생경하기만 했다. 그래서 법당에 들어가 상단 부처님을 향해 절도 하고 한참 올려다보며 기도를 드리지만 중단에는 가볍게, 하단은 거의 스치듯 예경을 올렸다.
그런데 나에게도 십수 년의 시간이 흐르니 주변의 많은 것들이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힌두교에서는 파괴, 그것도 궁극적 파괴의 여신 이름을 ‘마하칼리(Mahkl)’라고 하는데, 우리말로 풀면 ‘위대한 시간’이다. 즉, 시간의 여신이 파괴의 여신이고, 모든 것은 시간 앞에서 파괴된다는 뜻이라 할 수 있겠다. 나의 아버지도 그랬고, 외조부, 외조모님도 시간 앞에서 허물어져 지금은 정각원 하단, 영가등 명표에 이름으로만 남아 계신다. 같이 이름을 올리신 둘째 고모님은 대단한 불자셨는데 큰 산만 보이면 반드시 그 안에 절이 있을 것이라면서 보이지도 않는 부처님을 향해 예경을 올리시던 분이셨다. 그렇게 열심히 불교를 믿어도 허물어지는 것을 막을 수 없다. 아니 불교를 믿는다는 것은 허물어지는 모든 것에 대한 믿음일지도 모른다.
허물어지는 모든 것에 대한 믿음을 생각할 일이 많아지자, 어느 순간 법당에서 가장 오래 바라보고 사색하게 되는 곳이 영가단이 되었다. 앞으로도 주변 많은 것들이 허물어지면 더 오래 바라보게 될지도 모른다. 아니, 사실 나라 할 것도 없는 게 다 무너져 영가단의 흔적으로 남는 게 빠를 수도 있지 않을까. 지은 것은 허물어진다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면서도 이에 사무치게 된 건 실재하는 타인의 죽음들 속에서다.
20세기 작가 버지니아 울프를 다룬 영화 ‘디 아워스’에서 예민한 천재인 자신에게 모든 것을 헌신하는 남편 레너드를 보고 울프는 짓궂게 말한다. “내 소설에서는 누군가 반드시 죽어야 해.” 이에 레너드는 왜 누군가가 죽어야만 하며 죽음은 슬프지 않느냐고 묻는다. 이 질문에 진지해진 울프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죽은 이들로 인해 남은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어.”
우리는 앞서 정각원 주련의 세 구절을 해석되지 않은 진주로 품고 들어왔다. 여기서 사람을 살게 하는 사람의 죽음에 대해 사유하고, 진주알을 염주로 묶어 굴려 보고자 한다. 본래 인도인의 심상에서 동쪽은 과거를, 서쪽은 미래를 은유한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가 미래에 가야하는 극락세계는 서쪽에 있는 것이라고도 한다. 반대로 〈법화경〉의 서막인 ‘서품’을 보면, 부처님께선 동쪽으로 일만팔천의 세계를 비추시며 그 안에서 있었던 모든 일들을 낱낱이 밝히신다. 이는 모든 과거의 인연일체 그대로를 비추는 숙명통의 빛이다. 동쪽으로 상징되는 본인이 걸어오신 모든 과거를 돌이켜 보시고 부처님께선 결심을 하신다. 자신께서 이 세상에 오신 유일한 목적을 이제는 실천하실 때라고. 지금이야말로 결정적인 그때이며 허물어 간 과거는 지금을 위해서라고. ‘그대들 모두 붓다가 될 것이다’라고 선언할 시간이라고.
나에게 동쪽이란 이런 진주알이며 ‘동국상방대광명’은 지금 삶을 가능하게 한 허물어져 간 다른 모든 이들을 추억하는 빛이다. 부처님께선 이 세상에 오신 이유, 자신이 깨닫고서 바로 열반에 들지 않고 범천권청에 따라 덧없음을 아심에도 45년을 버티신 단 하나의 이유를 말씀하시기 위해 허물어져 간 일체의 모든 것을 상기하셨다. 마치 옛날 영사기 필름이 릴 사이를 지나가듯, 서쪽에서 온 미래는 동쪽의 과거로 흘러간다. 우리는 영사기가 비춰 스크린에 쬐이는 허상에만 집중하지만, 부처님께서는 동쪽으로 흘러간 과거의 필름들을 물끄러미 주시하고 계신다. 그래야만 스크린 위의 삶이 의미가 있게 된다.
앞서의 산책에서 정각원의 주련은 두두물물의 일월성신 모든 것이 부처님이라는 나옹 스님의 게송에서 실제 역사상에 오셨던 단 한 분의 부처님으로 포커스를 집중하는 〈화엄경〉 ‘여래현상품’의 게송, 그리고 이해하기 어려운 세 구절의 진주알, 마지막으로 믿음에서 열반으로 이어지는 〈화엄경〉 ‘현수품’으로 이뤄져 있음을 확인했다. 이제 이해하기 어려운 세 알의 진주를 진주 조개잡이 어부로서 이야기를 풀어 보자.
공간의 경전인 〈화엄경〉에서는 두두물물, 일월성신에 편재한 법신 비로자나가 보리수 아래의 석가세존으로 나타나신다. 시간의 경전인 〈법화경〉은 동방 세계를 비추어 부처님 자신과 모든 중생의 과거를 추억하시고, 이제 새로이 나갈 시간이라고 선언하신다. 사실 나는 앞으로도 헤아릴 수 없는 세월 동안 영축산에 있으면서 법륜을 굴리며 너희를 기다릴 것이라고. 이 사실을 안 중생들은 영축산에 계신 부처님을 직접 뵙기 위해 몸과 마음을 아끼지 않으며 정진하게 된다. 이 몸과 마음을 다한 중생에게 영축산의 부처님께서 대중들과 함께 나타나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너희 모두 붓다가 될 것이다. 이를 믿어라. 여래는 허망한 말을 하지 않으니.” 이를 믿으면 중생은 열반에 들어가게 된다. 다시 정리하면 법화가 없이 화엄은 의미가 없다. 법화를 통해 방만하게 늘어 놓은 화엄의 장광설이 중생이라는 명확한 방향성을 띠게 된다. ‘동국상방대광명’, ‘법륜상전어법계’, ‘자타일시성불도’라는 〈법화경〉의 어구가 중생의 신심으로, 그리고 깨달음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