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보배의 24번의 계절] 12. 하지_영월길을 걷다(上)

천지 만물이 생명 에너지 불태우는 시간

2025-06-20     장보배 작가
망경대산 해발 800m에 자리한 망경산사 전경. 사역은 스님과 자원봉사자들의 손길로 정성스레 가꾸어져 있다.

2월 정월 대보름 무렵, 냉기가 채 빠지지 않은 땅은 아직 돌처럼 단단하지만 새로운 한 해를 준비하는 농가는 쉴 틈이 없다.

겨우내 아껴둔 감자들을 꺼내어 둥글둥글 예쁘고 튼실한 것들만 골라내는 시간. 큰 것은 뚝뚝 잘라 잘 태운 나뭇재를 묻혀 재워 두고 작은 것들은 그대로 두어도 될 일이다. 

씨감자를 만드는 일은 그렇게 시작된다. 3월이 오고, 춘분이 되면 푸릇한 싹이 난 씨감자는 비로소 땅속 제자리를 찾아갈 것이다. 그리고 몇 달의 시간이 흘러 뜨거운 여름이 시작되면 찬란한 기쁨이 되어 돌아올 테지. 

태양의 온기와 함께 달큰한 햇감자가 돌아오는 열두 번째 계절, 하지(夏至)의 문이 열린다.


빛의 나날
어느덧 6월. 도심의 시장은 물론 온라인 농수산물 판매처까지 ‘하지 감자 예약 받습니다’라는 문구가 수시로 눈에 들어온다. 곧 출하될 햇감자를 찾는 이들과 선주문을 받는 지역 농장의 분주함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한여름의 달뜬 기분을 더하는 때다.

하지 감자란 춘분 무렵 심어 두서너 달이 지난 하지 무렵 수확하는 감자를 말한다. 농사를 짓는 일이란 자연과 발맞추어 더불어 가는 것. 제철에 나온 작물에 제 절기의 이름을 붙이는 것만큼 정직한 보증서가 또 있을까. 

하지. 일 년 중 태양의 적위가 가장 커지는 시기로, 이 무렵 태양은 황도상 가장 북쪽에 자리한 ‘하지점(夏至點)’에 올라선다. 정점에 선 태양의 힘은 그야말로 어마어마해서 낮과 밤의 적절한 분배 같은 것은 아랑곳없이 자신의 영역을 넓혀 버린다. 

하지의 태양 빛을 내리받는 북반구는 일 년 중 가장 긴 한낮을 얻게 되고, 또 밤은 그만큼 짧아지고 마는 것이다. 석 달을 내리 해가 지지 않는 백야의 현상도 이때 시작된다. 

정오의 태양 높이는 최고점을 찍고, 낮이 가장 길며 일사량도 가장 많은 시기. 그만큼 지표면은 열기로 뜨거워지고, 기온도 점점 상승해 날씨가 몹시 더워지는 때다. 이런 날들이 켜켜이 쌓여 곧이어 삼복의 더위가 맹위를 떨칠 것이다.

가뭄과 장마를 동시에 대비해야 하고, 또 수확과 파종이 동시에 이루어져 농촌에서는 가을 추수철과 더불어 연중 가장 바쁜 시절. 폭발하는 저 태양의 열기와 함께 온 세상 만물이 생명의 에너지를 불태우는 시간. 여름은 시작됐다. 
 

망경산사 스님들이 가꿔 온 데이지 꽃 군락.

불과 물의 시간 
‘논농사는 물 농사’, ‘논에는 물이 장수’, ‘하지가 지나면 발을 물에 담그고 산다’ 등의 속담들은 모두 하지 전후의 사정에서 비롯된 것이다. 

태양의 힘이 강력해질수록 생명은 더욱 애타게 물을 찾는다. 이 시기 비를 기원하는 것은 당연한 일. 특히 하지가 다 지나도록 비가 오지 않으면 그해 농사를 망친다고 해서, 과거에는 조정과 민간을 막론하고 기우제를 지내는 일이 중요한 의례였다. 

〈삼국사기〉부터 실록, 민관의 기록에까지 남겨진 기우제의 모습은 다양하다. 특히 조선 시대에 이르러서는 마을 공동체를 하나로 묶는 세시풍습으로 완전히 자리 잡는 것이다.

1895년(고종 32)에 발간된 〈양주군읍지(陽州郡邑誌)〉에서도 이런 모습을 잘 볼 수 있다. 마을 사람들은 먼저 냇가, 강가, 바다에서 제를 올리며 수신에게 기원을 한 뒤, 다 함께 횃불과 장작 등을 들고 산으로 올라가 불을 지피며 연기를 피운다. 이는 연기를 일으켜 구름을 모으고, 하늘의 천신께 바람을 고하는 의미를 지닌 것.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이 끝나면 마을 사람 모두가 모여 음식을 나눠 먹으며, 한바탕 신명 나는 잔치를 벌이는 것이다. 

하지는 아시아뿐만 아니라 유럽 지역에서도 특별한 대접을 받는 절기다.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폴란드 등 동유럽 전역에서도 ‘이반 쿠팔라(Ivan Kupala)’라는 축제가 열린다. 

성 요한 축일과 고대의 하지 축제 문화가 더 해진 이날, 사람들은 숲과 호수에 모닥불을 피워 놓고 뛰어넘는다. 불을 뛰어넘기 전 물에 몸을 담그거나 물을 뿌리는데, 그래야만 나쁜 마음도, 악운도 사라진다는 이유다. 또 스웨덴에서는 농경신에 대한 숭배의 의미로 큰 모닥불을 피우고, 신성한 샘을 찾아가 목욕을 하며 하지 축제(Midsommar)를 열어 여름을 환영했다.

우리네 풍습과 어딘가 다른 듯, 닮아 있는 저 먼 이국의 풍경. 하늘과 땅에 기대어 살아온 인류에게 이 여름은 불과 물의 시간, 그 자체인지 모른다. 


 

망경산사 대웅전 전경.

영월로 가자
서양에서는 일 년 중 낮이 가장 길고 빛의 힘이 강해지는 하지의 전날 밤 신비로운 일들이 일어난다고 전해진다. 마법의 힘이 강해지고, 꿈을 통해 미래를 엿볼 수 있다고 말이다. 

셰익스피어의 희극 ‘한여름 밤의 꿈(A Mid summer Night’s Dream)’의 배경도 바로 이 하지의 전날 밤. 장난꾸러기 요정이 사람의 마음을 한껏 흔들어 놓는 이야기, 그 안에는 몽환적인 영국의 여름밤과 물빛 가득한 공기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하지를 앞에 두고 영월로 향한 것은 한여름 밤의 꿈과 같은 한 사찰을 찾기 위해서다. 백두대간의 맥을 잇는 해발 800m, 그 안에 숨겨진 망경산사. 

영월 시내에서 동강을 따라 한참을 달리는 길. 스쳐 가는 산 아래 땅 위에선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쑥쑥 자라나는 옥수수와 감자, 배추 밭이 끝도 없이 이어진다. 


이제 잘 자란 감자는 하지에 맞추어 전국 각지로 전해질 것이고, 아직 풋풋한 옥수수는 7월 중순이면 다 익어 여름날의 별미가 되어 줄 것이다. 옥수수 하모니카의 구수한 내음이 나도 모르게 입안에 감도는 시간. 

초록빛 파도처럼 넘실대는 땅을 뒤로하고 굽이굽이 산등성이를 돌다 보면, 어느새 귀가 먹먹해지는 고도. 망경산사에 다다른다.
 

풀을 매는 데 사용하는 스님의 수레.

모두 다 살아나라 
감자꽃 대신 거대하게 물결치는 백색의 꽃물결. 구름 한 점 없는 맑고 푸른 하늘 대신 이 깊은 산중에 꽃구름이 가득히 내려앉았다. 망경산사의 스님들이 수년간 심고 키워 온 데이지 꽃 군락이다. 

이곳은 한때 1만 명이 넘는 주민들이 살았던 영월 제일의 탄광촌. 석탄 산업이 사양길에 접어들며 버림받은 돌무더기 산자락은 유령의 땅처럼 잠들어 있었다. 하지만 선농일치(禪農一致)의 수행공동체를 꿈꾸며 이곳을 오른 스님들은 땅을 개간하고, 파헤쳐진 산자락에 꽃씨를 뿌리며 이곳에 새로운 생명을 부여했다. 

고도가 높은 계곡에서만 자란다는 처녀치마, 노루귀, 천남성과 동자꽃, 얼레지, 바람꽃과 같은 토종 야생화. 40여 종의 취나물과 각종 희귀 식물들까지 셀 수 없이 많은 생명이 숨 쉬는 이곳. 약을 치지 않고 오롯이 손으로 가꿔지는 이곳을 산중 동물이라고 좋아하지 않을 리 없다. 

멧돼지와 고라니, 사슴이 매일 아침저녁 제 입맛에 맞는 풀로 배를 채우고, 두더지 가족이 발 아래서 볼록볼록 굼뜨게 인사하는 땅. 

저 멀리 햇살 아래 그 땅에 선 한 스님의 모습이 보인다. 뙤약볕 아래 풀을 매고, 수레를 옮기며 쉼 없이 움직이는 수행자의 시간. 그 순수한 노동이 쇠락한 폐광촌을 기름지고 푸르른 초목의 대지로 바꾸었으리라. 

작열하는 빛이 아무리 강하다 한들, 대지를 일구는 사람의 마음 또한 그에 진배없는 것. 길게 누운 저 한낮의 반짝이는 발자국마다 뭇 생명이여, 모두 다 살아나라. 
 

▶한줄 요약 
하지는 일 년 중 낮이 가장 길고 일사량도 가장 많은 시기이다. 옛사람들은 건강과 풍년을 기원하는 제를 지내고 연회를 즐기며 이 빛의 계절을 맞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