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소연의 수행 다이어리] 매 순간 자유로워지는 법
12. 분리와 반야의 발사
지난 연재에서 바탕 의식에 눈뜬 것만으로도, 언제라도 도피할 곳이 생긴 듯 살 만하다. 그런데 그것은 오래가지 않는다. 다시 의식은 내 몸과 마음에 갇히게 된다.
살 만하다가, 안 살 만하다!
오랫동안 내 의식의 고향은 ‘바탕자리’가 아니라 ‘무명’이었던 것이다. 자석처럼 이끌려 다시 무명에, 업장에, 취착에, 오염된 반응 체계[염법연기染法緣起]에 들러붙어 고꾸라진다. 약 15년 전 첫 삼매 체험을 한 뒤, 처절하게 방황했던 기억이 난다. 치탐진(癡貪瞋)의 습관적 집착이 다시 가동되니, 딱히 살 만하지 않았다. “다 없는 건데, 자연인이 되나?” 여태껏 목숨 걸고 하던 미술사 공부도 순식간에 심드렁해졌다. 생존을 위해 기를 쓰던 집착이 떨어져 나가도 안 죽는다는 것을 알았으니 배짱은 세졌다. 하지만 오히려 그것(나에게서 벗어나는 삼매 체험)을 몰랐을 때보다, 무명의 요동은 더욱 ‘염오(染汚)’스럽게 느껴졌다. 그 이유는 똥물에서 벗어나 보지 못했을 때는 그런대로 익숙해져서 지낼 만했지만, 1급수의 청정수를 경험하고 나니 똥물이 얼마나 더러운지 알았기 때문이다. 다시 똥물(오염된 에너지)이 파도칠 때 좌절한다. 이 시점에서 뭇 수행자들이 ‘보림(保任)’ 또는 ‘서원(誓願)’ 운운하며, 구천을 떠돌게 된다.
석가모니 붓다께서는 중생이 오염된 에너지 속에서 자각하지 못하고 또 벗어날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는 모양새를 “똥 속에 빠진 자가 (깨끗한 물로 가득한) 연못을 보고도 그 연못을 원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연못의 잘못이 아니다. (중략) 자신의 목에 시체가 걸려 있는데도 그것을 혐오해 벗어 버리지 않는다면, 그는 자유자재할 수 없다.(〈불종성경〉 중에서)”고 말씀하신 바 있다. 붓다께서 존재에서 해탈하는 수행법을 가르쳐 주셨음에도 수행하지 않는 중생은 ‘똥 속에 있는 사람이요, 썩어 가는 시체를 목에 걸고 다니는 사람’이라는 말씀이다.
삼매체험 이후의 방황
문제는 삼매에서 나왔을 때 바닥을 친다는 것이다. 일상생활에서의 나의 반응은 변한 게 없다. 그래서 한동안은 ‘없다와 있다, 냉탕과 끓탕, 극락과 지옥’을 오갔다. 석가모니 붓다는 어떻게 수행하셨을까? 나의 등대, 중생의 등불이신 석가모니 붓다를 따라가기로 했다.
붓다는 당시 유행했던 선정(사마타) 수행의 대가(알라라와 웃다까)를 찾아가, ‘아무것도 없다’라고 관(觀)하는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과 ‘상(想)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라고 관하는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의 경지를 성취한다. 이 두 경지는 두 스승이 각기 최고의 경지라고 말하는 삼매이다. 그러나 아무리 높은 삼매의 경지라도 그 상태에서 깨어나면 다시 몸과 마음의 동요로 돌아오게 된다는 것이다. “(선정 수행을 통해) 다만 무소유처정과 비상비비상처정에 들었을 뿐이다. 이는 나를 집착이 없는 곳, 갈애가 없는 곳, 고(苦)가 소멸한 곳, 완전한 지혜가 있는 곳, 궁극의 깨달음의 상태로는 이끌지 못했다”라고 붓다는 토로한다. 지금 이 순간, 현재 매 순간 존재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정사유와 정념, 원인에 대한 통찰
물론 답은 있다. 이미 2500여 년 전, 석가모니 붓다께서 말씀하신 ‘반야[혜慧, 통찰지]’의 계발이다. 반야의 빛이 발사되는 데는 사마타의 힘이 절대적이다. 그렇기에 붓다께서는 ‘계(戒)-정(定)-혜(慧)’로 본인의 수행법을 정리하셨고, 이 체계가 바로 불교를 불교 되게 하는 핵심이다. 자아와 분리된 바탕의식(또는 바탕자리)에서 ‘지금 일어난 현상의 원인이 뭐지’라고 정사유(正思惟)를 했더니, 반야의 레이저 건이 발사되어 그 과정과 요소들이 낱낱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정사유의 ‘사유’란 무얼 ‘생각하다’라는 뜻이 아니라, ‘원인이 무엇인지 의문을 품고 통찰한다’는 의미이다. 붓다께서는 더욱더 미세하고 깊은 경지로 들어갈 때마다, 정사유를 징검다리 삼으셨다는 것을 초기 경전의 기록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사마타는 흔들리는 총부리를 고정시키는 역할을 하고, 위빠사나는 총알을 발사해 과녁을 맞추는 역할을 한다. 정(定)과 혜(慧)의 협업으로 일어난 법의 연기(緣起)된 과정이 (분해되어) 드러나니, 더 이상 덩어리(조건 지어진 것)에 속지 않는다. 공(空)이 드러난다. “행심반야바라밀다시(行深般若波羅蜜多時),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 도일체고액(度一切苦厄)”으로 시작하는 〈반야심경〉의 문구가 떠오른다. 제대로 반야의 총알로 타깃을 맞추어 그것이 산산이 부서질 때 느껴지는 해방감과 자유. 하지만, 가물에 콩 나듯 발사된다. 아! 이젠 반야에 대한 집착이 생긴다. 이렇게 힘이 약해서야! 일상생활에서 유지하기 힘든 정정(正定)과 정념(正念), 짐을 싸 들고 선방으로 직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