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원섭의 불교, K-드라마로 만나다] “차별·혐오 대신 공감·이해하길”
12. ‘놀아주는 여자’(2024) ‘까마귀’ 노는 곳에 간 ‘백로’ 이야기 ‘놀아준다’는 상대에 온전한 공감 의미 고통 이해 바른 길로 이끄는 게 보살 삶
드라마 ‘놀아주는 여자’의 작가가 쓴 기획의도에 이런 말이 있다.
“친구는 가려서 사귀어라. 어릴 적부터 많이 들어온 말이다. 검은색을 가까이하면 검어지고, 붉은색을 가까이하면 붉어지니, 까마귀는 까마귀끼리, 백로는 백로끼리 어울리라 하였다.”
누구에게나 익숙한 말이다. 그런데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의문이 든다. 나쁜 친구를 사귀지 말라는데 도대체 나쁜 친구를 알아내는 기준은 무엇일까? 아니, 나쁜 친구가 있다고 치자. 그럼 그 나쁜 친구는 어떻게 친구를 가려서 사귈 것인가? 자기보다 좀 덜 나쁜 친구를 찾아야 할까?
‘놀아주는 여자’의 서지환(배우 엄태구)은 ‘불독파’라는 전국 최대 조직폭력 집단 보스의 외아들이다. 아버지 밑에서 조직 생활을 하던 그야말로 ‘나쁜 친구’이다. 그런 지환이 조직을 물려받자마자 제일 먼저 한 일은 아버지를 감옥에 보내고 불독파를 해산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전국 세 군데에 공장을 둔 ‘목마른 사슴’이라는 육가공회사의 대표를 하고 있다. ‘목마른 사슴’의 특징은 직원의 80%가 전과자라는 점이다. 갱생의 의지가 확고한 전과자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해 사회의 일원으로 만드는 역할을 하는 회사이다. 더 이상 ‘까마귀’로 살지 않겠다는 지환의 의지가 담겨 있다.
고은하(배우 한선화)는 ‘미나와 놀아요’라는 유튜브 채널의 콘텐츠를 만드는 키즈 크리에이터다. 워낙 아이들을 좋아하는 은하는 야외 활동이나 귀찮은 행사도 마다하지 않고 자원해서 온몸으로 아이들과 놀아줄 뿐만 아니라 소아병동을 찾아가 봉사하며 아이들의 웃음꽃을 피워 준다. 은하의 목표는 그저 아이들에게 좋은 추억을 안고 살아갈 힘을 주겠다는 것이다.
은하가 이런 꿈을 꾸게 된 데에는 사연이 있다. 은하의 어린 시절은 빚을 지고 잠적한 아버지 때문에 하루가 멀다고 깡패들이 집을 찾아온 기억밖에 없다. 사는 일에 치여 신경을 써주지 못하는 엄마를 대신해 놀아줬던 사람은 주인집 아들 현우 오빠였다. 그러던 어느 날 현우 오빠가 무서운 아저씨에게 끌려간 뒤로 소식이 끊겼다. 은하는 현우 오빠가 자신에게 해 주었던 것처럼 아이들에게 꿈을 주고 싶다. 그리고 ‘현우’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을 만날 때마다 옛날 그 현우 오빠가 맞는지 확인하는 것이 버릇이다. 그러다가 우연히 검사 장현우(배우 권율)를 만나는데, 검사는 현우 오빠의 꿈이었다. 과연 이 현우가 그 현우 오빠일까?
작가의 기획 의도에서 힌트를 얻자면 ‘놀아주는 여자’는 ‘까마귀’ 서지환이 노는 곳에 ‘백로’ 고은하가 어울리면서 시작하는 이야기다. ‘백로’ 고은하는 ‘까마귀’ 서지환의 검정 깃털을 그 자체의 개성으로 받아들이고 인정해 준다. 그래서 “서로의 다른 깃털 색이 함께 어울려 노는 데 걸림돌이 되지 않음”을 보여 주면서 “차별하고 혐오하는 게 아니라 공감하고 이해하는 세상이 되길” 바라는 드라마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드라마 제목의 ‘놀아주는’이라는 말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1차적으로는 현우 오빠가 은하와 놀아주고, 또 은하가 아이들과 놀아주듯이 말 그대로 ‘놀아준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누군가와 놀아주려면 기본적으로 상대와 눈높이를 맞추어야 한다. 키가 작은 상대이면 내가 몸을 낮추어야 하고 나이가 어린 상대라면 나의 행동과 말투도 어린아이의 것이어야 한다. 나의 것만을 고집해서는 제대로 놀아줄 수가 없다. 그러니 ‘놀아준다’는 말의 깊은 의미는 결국 나를 버리고 온전히 상대에게 공감하고 상대를 이해하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한다. 그 ‘누구나’에는 보통의 중생은 물론 지옥 중생까지 포함된다. 엄청난 죄를 지어 지옥에서 고통 받는 존재마저도 부처가 될 수 있는 씨앗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그런데 언뜻 보기에 이런 가르침과 조금은 달라 보이는 설명이 있다. 바로 천태불교에서 말하는 ‘십계호구(十界互具)’라는 것이다. 천태에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열 가지로 구별한다. 흔히 알고 있는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상의 6도윤회의 세계에, 성문, 연각, 보살, 부처님의 네 세계를 합한 것이다. 그리고 이 열 가지 세계가 각각 나머지 아홉 세계를 모두 갖추고 있다는 것이 ‘십계호구(十界互具)’이다.
이 설명에 따르면 부처님 세계에도 지옥세계가 갖추어져 있다.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했으니 지옥세계가 부처님 세계를 갖추고 있다는 것은 금방 이해할 수 있지만 도대체 부처님 세계에 어떻게 지옥세계가 갖추어져 있다는 것인가?
이 말은 부처님도 지옥에 떨어진다는 말이 아니라, 부처님은 지옥 중생의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의미이다. 가벼운 고통인지 무거운 고통인지를 따지지 않고 지옥 중생의 고통이 있다면 그 모든 고통을 공감해 주고 이해하는 분이 바로 부처님이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부처님을 달리 부르는 이름 중에 세간의 모든 것을 다 안다는 ‘세간해(世間解)’가 있는 것이다.
나쁜 친구를 사귀지 말라고 했다고 해서 나빠 보이는 친구를 그대로 보고만 있으면 그 친구는 어떻게 될까? ‘까마귀’ 지환의 세계에 ‘백로’ 은하가 뛰어들어 검은 세계를 옅게 해 주듯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의 아픔과 고통을 공감해 주어서 바른 길로 올 수 있게 하는 것이 보살의 삶일 것이다.
시인 김춘수의 ‘꽃’이라는 시에 이런 구절이 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 그는 다만 /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 그는 나에게로 와서 / 꽃이 되었다.”
나의 애정과 관심이 없으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들의 삶에 공감하여 그들이 나의 세계에 들어올 때 비로소 존재의 의미를 갖는다.
혹시라도 내 주변에 길을 잃은 까마귀는 없는지, 또 내가 놀아줄 까마귀는 없는지 살펴볼 일이다. 그래야 나도 기꺼이 그에게로 가서 꽃으로 장엄한 백로가 되어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