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보배의 24번의 계절] 11. 망종 _ 수원 길을 걷다
풍년 기원 푸르른 계절에 깃든 애민군주의 꿈
“보리는 익어서 먹게 되고, 볏모는 자라서 심게 되니 망종이요.”
망종(芒種)을 설명하기에 이보다 좋은 속담이 또 있을까. 기나긴 허기짐에 봄이 채 오기도 전 부랴부랴 심었던 보리. 이제 겨우 먹을 만해지니 쉴 틈도 없이 모내기철이 다가왔다.
태양의 황경은 75도, 소만(小滿)과 하지(夏至) 사이에 자리한 여름의 절기. 부지런히 달려온 지구의 6월은 망종과 함께 시작된다.
푸르름을 먹는 계절
너 나 할 것 없이 아직 채 다 익지 않은 풋보리를 베어다 까끌거리는 그것을 맨손으로 비빈다. 톡톡 떨어지는 귀한 보리알을 알뜰히 모아 솥단지에 볶고, 다시 맷돌에 갈아 체로 치면 마침내 한 줌의 보릿가루. 그 가루로 죽을 끓여 먹으면 여름에 보리밥을 먹고도 배탈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어디 그뿐일까. 풋보리를 불에 그을려 먹거나, 밤이슬에 맞혀 다음날 먹으면 아픈 허리의 약이 되고, 그해 무병하며, 또 농사가 잘 되어 보리밥을 달게 먹을 수 있다고도 했다.
과거 망종 때면 제주부터 육지까지 어디서나 볼 수 있던 ‘풋바심’, 그리고 ‘보리그스름(보리그을음)’의 풍속은 어딘가 모르게 맹목적이다.
노상 아픈 허리가 청보리를 그을려 먹는다 해서 나을 리 만무하고, 보리밥이야 농사가 잘 되건 아니건 늘 달게 먹었던 터다. 보릿가루를 내어 죽을 먹어야 하는 것은 아직 오지도 않은 여름철 배앓이 걱정보다 곯을 대로 곯은 속을 놀라게 하지 않고 곡식을 섭취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채 익지 않은 보리라도 하루빨리 입에 넣어야 했던 사람들에게 세상 모든 것은 이유가 되었다.
망종 무렵의 보리는 길고도 질긴 보릿고개의 끝에서 겨우 잡은 생명줄. 청보리를 베어 곡식을 내는 ‘풋바심’에는 숱한 이유를 대고도 가려지지 않는 다급한 진심이 숨겨져 있다.
슬프고 또 그만큼 찬란한 푸르름을 먹고 되살아나는 계절. 그 억센 힘으로 다시 땅은 일구어지고, 그 위의 삶도 계속되어 간다.
물을 다스리다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에 자리한 화성(華城).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수원천을 중심에 두고 수원 중심부 일대를 둘러싼 아름다운 성곽이다.
수원화성은 1794년(정조 18년) 2월에 착공해 1796년에 축성된 것으로, 정조는 화성을 중심으로 정치·군사·상업·농업이 하나 된 강력하고 철저한 계획도시를 꿈꿨다.
아버지 추존왕 장조(사도세자)와 부인 헌경왕후 홍씨를 합장한 현륭원. 또 그 곁을 지키는 용주사를 창건하며 본격적으로 현실화된 그 꿈은 무엇보다 농업을 기반으로 한다.
〈홍재전서〉와 〈일성록〉에는 정조가 농업정책을 직접 지휘한 기록이 상세히 남아 있는데, 즉위와 함께 가장 먼저 착수한 사업도 기존 농서의 보완과 기술의 확산이었다. 화성 축성과 토지 개혁 사업에 사용된 거중기, 녹로 등의 실학적 성과도 이때 이루어진 것이다.
평생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을 강조했다는 정조의 신념은 화성행궁을 짓는 과정에서 더욱 잘 드러난다. 1794년 화성 축조가 한창이던 때, 가뭄으로 흉년의 기운이 들자 정조는 화성 성역을 전면 중단할 것을 엄명했다.
그 자신조차도 ‘만일 백성들이 굶주리지 않았다면 이 역사는 나아감만 있고, 미루는 일은 결코 없었을 것’이라 할 만큼 필생의 염원으로 삼았던 화성 성역화 사업. 하지만 백성의 고달픔 앞에 그는 과감히 욕심을 내려놓고, 새로운 농업 진흥 사업에 박차를 가한다. 농민, 아니 조선의 경제적 자립을 향한 토지 개혁의 시작이었다.
“곡식을 얻고자 하나 가뭄이 들면 헛일이 되니, 수리(水利)를 다스리는 것이 곧 민생을 다스리는 일이다.” <정조실록>
정조가 생각한 농업 개혁의 핵심은 안정적인 수리 체계였다. 그는 수원의 가뭄 문제를 해결하고 안정적인 생산을 위해 즉각 대규모 저수지 건설에 돌입한다.
가장 먼저 1799년(정조 23년)에 ‘만 섬의 곡식을 거둘 수 있다’는 뜻의 만석거를 축조, 이후 현륭원을 지키는 남쪽의 만년제, 영원히 만석의 꿈을 축원한다는 서쪽의 축만제, 그리고 지금은 흔적 없이 사라진 동쪽의 지동저수지까지. 수원의 동서남북에 대규모 저수지와 관개용 수로를 설치하고 인근의 황무지를 차례로 둔전(국영농장)으로 개간한 것이다.
놀랍게도 가장 첫 단추를 낀 만석거의 대유둔은 몇 해간 이어진 가뭄을 극복하고 1만 석의 소출을 내는 성과를 낸다. 이는 상업, 군사 영역까지 조선의 또 다른 바퀴를 구르게 한 마중물이었다.
신명한 그들을 위하여
보통의 둔전은 관의 노비들이나 빈민들이 개간하고, 대부분의 수확물을 국가가 걷어가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일반 농민과 실직자들에게 경작권을 개방하고, 농사를 잘 지은 이들은 관리직을 주어 신분 상승의 기회를 주었다. 부호들에게 농업투자를 적극적으로 유치했으며, 축만제는 관과 민이 함께 농사를 지어 군수자금과 국가 운영자금으로 융통해 나라 살림에 보탰다. 빈곤 구제, 국방 재정 확보, 자립 기반 형성이라는 세 마리 토끼를 잡은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이번 화성의 만년제 공사는 백성 한 사람의 힘도 쓰지 않고서 며칠만에 완성했으니, 참으로 큰 다행이다. 만석거를 만들고 대유둔을 설치할 당시에는 백성들이 모두 이를 좋아하지 않아 누차에 걸쳐 권유하고, 타일러 수만금을 들여 일을 시행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는 땅이 더 넓지 않다며 백성들이 원망한다. 그러나 지극히 신명한 것이 또한 백성들이니, 뒤에 의당 나의 고심을 알리라.” <정조실록>
저수지 축조와 개간 사업 비용을 자신의 내탕금으로 충당하면서도 뜻을 굽히지 않았던 정조. 실록에 남겨진 그의 목소리에는 무사히 완성된 개간 사업에 대한 기쁨, 또 이래저래 변덕스러운 백성들에 대한 작은 한탄까지 고스란히 전해진다.
하지만 그에게 백성이란 신령스럽고 이치가 밝은 ‘신명한 존재’. 그가 꿈꾼 모든 미래와 새로운 나라, 그곳의 시작과 끝은 모두 백성이었다.
아직 끝나지 않은 여정
이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화성은 여전히 번화하고, 성곽은 아름답다. 정조가 다스린 물은 저수지만이 아닌 터라 화성행궁에 들어서면 어디서나 수문을 통해 흐르는 수원 천변을 보고 듣고 누릴 수 있다.
북수문의 시원스런 물줄기 위에 자리한 저 아름다운 화홍문과 방화수류정. 이제는 적을 감시하는 군졸 대신 삼사오오 나들이를 나온 사람들로 가득하다.
수원천을 따라 그곳을 향해 걷다 보면 문득 눈에 띄는 수원사. 화성행궁 안에 자리한 몇 개 사찰 중 하나인 이곳은 정조가 꿈꾼 새로운 세상, 그 속의 또 다른 유토피아처럼 존재한다.
그 언젠가 백성의 배고픔에 눈높이를 맞추려 했던 군주의 마음과 선인의 자비심이 물길을 따라 하나로 이어진다.
가난은 나라님도 구제할 수 없다 했던가. 하지만 그 또한 나라님 마음먹기 나름이라는 것을 근 300년 전 한 애민군주의 치열했던 꿈을 통해 배운다. 풍년을 기원하는 망종은 푸르른 계절, 농사는 이제부터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