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 붓다를 만나다] 11. 미륵 세상을 꿈꾸며

금강산에 묻은 어느 부부의 특별한 염원 

2025-05-30     이승혜 동아대 역사문화학부 교수
사진 ; 금강산 출토 이성계 발원 사리장엄구 일괄, 고려 1390~1391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사진 제공=e뮤지엄

1932년 산불 저지선 공사가 진행 중이던 금강산 월출봉(月出峰)에서 한 석함이 우연히 발견되었다. 석함 안에는 금속과 백자 기물 등으로 구성된 사리장엄구가 모셔져 있었는데, 그중 백자발 한 점의 안쪽에는 대명 홍무 24년(1391년, 공양왕 3년) 4월 1만여 명의 사람들이 미륵을 기다리며 금강산의 비로봉(毗盧峯)에 부처님 사리를 모신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함께 발원하여 봉우리에 사리장엄구를 모신 사람 중에는 후일 조선을 건국하는 문하시중(門下侍中) 이성계(李成桂, 1335~1408)와 그의 둘째 부인인 삼한국대부인 강씨(三韓國大夫人 姜氏, 1356~1396)도 있다. 

이 사리장엄구는 발견 이듬해인 1933년 7월 조선총독부 박물관의 소장품으로 정식 등록되었다. 우리나라가 해방을 맞이한 이후에는 국립박물관에 인수되어 고려 말기 금속공예의 높은 수준과 불교 신앙을 보여 주는 귀중한 유물로 중시되었다. 이 점은 2017년에 이 사리장엄구가 보물로 지정된 데서도 확인할 수 있다. 

‘금강산 출토 이성계 발원 사리장엄구 일괄’, 나라에서 정한 이 보물의 명칭이다. 발원문 중 스님을 제외하면 이성계의 이름이 가장 먼저 열거된다는 점에서는 발원의 주체를 명확히 드러낸 적절한 명칭일 것이다. 그러나 함흥 출신의 무장 이성계가 조선의 태조(太祖, 재위 1392~1398)로 거듭나기까지 가장 가까이에서 그를 도왔던 삼한국대부인 강씨, 즉 실질적으로 조선의 첫 번째 국모였던 신덕왕후(神德王后)의 존재가 지워졌다는 점에서는 아쉬움이 남는 명칭이기도 하다. 이 두 사람이 금강산에 함께 묻었던 비밀스러운 염원은 무엇이었을까.

사리장엄구에 새겨진 염원
일제강점기에 우연히 발견된 이 사리장엄구에 대해서는 발굴 보고서가 발간되지 않아서 상세한 내용을 파악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 비로봉에 모셔져야 했을 사리장엄구가 왜 월출봉에서 발견되었는지도 자료의 부족으로 인해 알 길이 없다. 그러나 그간 발표된 여러 연구를 통해 조성과 봉안 당시의 모습을 추정할 수 있다. 

사리를 직접 모신 그릇은 모두 5중에 달하며, 여기에 지금은 전하지 않는 석함까지 포함하면 6중이라고 볼 수 있다. 가장 바깥쪽 그릇으로는 백자 사발이 사용되었다. 백자 사발 안에는 유기완(鍮器)이 포개져 있었을 것이다. 이 유기완 안에는 은제도금 팔각당형 사리기(銀製鍍金八角堂形舍利器), 은제도금 라마탑형 사리기(銀製鍍金喇塔形舍利器)를 차례로 넣었고, 이와 함께 사리를 옮기는 데 사용했을 귀이개 모양의 은제이소(銀製耳搔)가 함께 들어 있었다. 

팔각당형 사리기는 따로 제작한 연화형 대좌와 팔각형 은판, 팔각당형의 뚜껑을 결합하여 만들어졌다. 몸통에는 두 손을 모아 합장한 불입상이 각 면마다 새겨져 있다. 여래의 상호는 넓적하고 귀가 크며, 양쪽 발을 벌리고 선 정면향의 모습이 독특하다. 

은제도금 팔각당형 사리기(분리한 모습), 고려 1390년, 전체 높이 19.8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사진 제공=e뮤지엄

라마탑형 사리기도 팔각당형 사리기와 유사하게 별도로 만든 연화형 대좌, 원통형 은판, 라마탑형 뚜껑을 결합하는 구조이다. ‘라마탑’은 티베트 불교미술에서 유래한 탑의 형식으로, 몽골족이 중국대륙을 지배했던 원대(元, 1271~1368)에 본격적으로 조성되었다. 기본적으로 수미좌, 탑신, 상륜, 탑찰의 네 부분으로 구성되는데, 가운데 부분이 볼록하게 나온 탑신의 모습이 특징적이다. 고려가 원의 간섭을 받게 됨에 따라 원 황실에서 숭앙했던 티베트 불교와 티베트 불교미술의 양식이 고려에 수용된 결과이다. 탑신에는 4구의 불입상을 돌아가며 새겼다. 팔각당형 사리기에 새겨진 불입상과 마찬가지로 정면을 바라보며 양발을 벌리고 선 모습이다.

은제도금 라마탑형 사리기와 유리제 사리병(분리한 모습), 고려 1390년경, 전체 높이 15.5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사진 제공=e뮤지엄

라마탑형 사리기의 원통형 구조 중앙에는 가느다란 원통형 모양의 유리 사리병이 봉안되어 있었다고 전한다. 무색투명한 석영유리를 주재료로 만들어진 이 병이 사리를 직접 모신 가장 안쪽 그릇에 해당한다. 유리 사리병은 금속 재질의 연화대좌로 안정감 있게 받치고, 금속 재질의 연꽃 모양 마개로 봉인하도록 고안되었다. 

석함 안에는 이와 같은 5중의 사리장엄구 외에 대형 백자 4점이 함께 들어 있었다. 이 중 1점은 구연부에 테두리가 달린 완(垸) 형태의 향로이며, 다른 1점은 향목을 봉안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백자 사발이다. 그리고 나머지 2점의 백자는 아래보다 위가 넓은 주발이다. 이 두 점의 주발은 앞서 살펴본 명문이 있는 두 점의 백자에 각각 포개어 뚜껑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상의 기물 중 사리장엄구의 가장 바깥쪽 그릇인 백자 사발의 안측과 굽, 향합으로 추정되는 백자 사발의 외면, 유기완의 구연부, 팔각당형 사리기 안의 팔각형 은판, 라마탑형 사리기 내부의 원통형 은판에는 조성 경위를 기록한 명문이 각각 남아 있다. 이 중 라마탑형 사리기 안 원통형 은판에 새겨진 ‘분충정난광복섭리좌명공신 벽상삼한삼중대광 수문하시중 이성계, 삼한국대부인 강씨, 물기씨(奮忠定難匡復燮理佐命功臣 壁上三韓三重大匡 守門下侍中 李成桂 三韓國大夫人 康氏 勿其氏)’라는 명문은 더 특별한 의미가 있다. 사리와 물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위치에 새겨진 명문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보이는 호칭은 이성계가 1389년에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옹립한 공으로 받은 것이다. 이 위호를 통해 라마탑형 사리기가 1389년 이후에 제작되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으며, 왕을 능가하는 권력자 이성계의 위상도 엿볼 수 있다. 이 명문에서 무엇보다도 주목되는 점은 이성계 다음으로 그의 첫째 부인인 한씨(韓氏, 1337~1391)가 아니라 둘째 부인인 강씨가 이름을 올렸다는 사실이다. 당시 한씨가 와병 중이었다는 사실을 고려하더라도 이처럼 중요한 불사에 그녀의 이름이 빠졌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라마탑형 사리기 외에 뒤에서 살펴볼 다른 기물들에서도 한씨의 이름은 나타나지 않는다. 이 점은 이 불사에서 강씨가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물기씨’에 대해서는 별도의 정보가 없어서 정체를 파악하기 어려우나 이성계 부부와 아주 가까운 사람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새 세상이 열리는 그날 
사리장엄구의 가장 바깥쪽 그릇인 백자 사발의 안쪽에는 ‘금강산 비로봉 사리안유기(金剛山毘盧峯舍利安遊記)’라는 장문의 명문이 새겨져 있다. 1391년 5월에 이성계와 부인 강씨, 승려 월암(月菴), 몇몇 신분이 높은 여성들이 만 명의 사람들과 함께 비로봉에 사리를 모시고 미륵의 하생을 기다린다는 내용이다. 이 여성들 중에는 나라에서 받은 칭호와 스승에게 받은 법명을 이용해 자기를 표명한 낙랑군부인 묘선(樂浪郡夫人 妙善/禪)과 강양군부인 이씨 묘청(江陽郡夫人 李氏 妙情)처럼 불자로서 뚜렷한 자의식을 가진 여성도 포함되어 있다. 

14세기 후반 혼란의 고려 사회를 살아가던 민중은 미륵불이 하생하여 새로운 세상이 도래하기를 고대했다. 전장에서 왜구와 홍건적을 토벌하며 자신의 이름을 만들어 나간 함흥 출신의 무장도, 그에게 운명을 건 몰락한 귀족 집안 출신의 강씨 역시 민중과 함께 새 세상을 꿈꾸었다. 이 사리장엄구를 봉안하고 일 년 후에 마침내 도래한 새 세상에서 강씨는 이성계의 옆에서 조선의 첫 번째 국모 자리에 올랐다. 라마탑형 사리기에 나란히 이름을 올린 것처럼 말이다. 

▶한줄 요약 
14세기 후반 혼란의 고려 사회를 살아가던 민중은 미륵불이 하생하여 새로운 세상이 도래하기를 고대했다. 이성계와 함께 사리장엄구를 봉안한 그의 둘째 부인 강씨 역시 마찬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