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보배의 24번의 계절] 10. 소만 _ 화성 길을 걷다

희망·절박함 함께하는 두 얼굴의 절기

2025-05-23     장보배 작가
경기도 화성시 화산 기슭에 자리한 효찰대본산 용주사. 정조의 효심이 깃든 이곳을 찾는 가족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한 번 더. 한 번 더 뛰어봐. 할 수 있어!”

산문을 나서는 길. 귓전을 스치는 다정한 목소리에 잠시 발길을 멈춘다. 자그마한 돌다리를 넘지 못하는 어린 딸의 손을 꼭 붙잡고 다독이는 젊은 아버지. 아직은 누군가의 아들인 편이 더 어울릴 법한 앳된 얼굴의 그가 자신의 아이를 지킨다. 

하나의 세상에서 또 다른 세상으로 이어지는 우주의 법칙. 그 오랜 이야기를 닮은 또 한 번의 절기, ‘소만(小滿)’이 시작된다. 

소만의 얼굴
5월의 끝자락, 햇살은 부드럽고 바람은 맑다. 들녘의 보리는 어느덧 고개를 숙이기 시작하고 모내기를 위한 손길이 분주해지는 때. 도드라진 세시풍속은 없다지만, 그만큼 농민들의 몸과 마음이 분주한 것도 바로 이즈음이다. 밭작물부터 모내기까지 본격적인 농번기가 시작되는 때가 바로 소만이기 때문. 

곡우 무렵 새 볍씨를 물에 담근 그 날부터, 한 달여의 시간이 지나 모심기에 다다르기까지. 농민의 마음은 한없이 낮고, 작아진다. 제아무리 기술이 발전한다 한들 땅을 일구는 일이란 자연에 기대고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에서 시작되니까. 그런 이유로 옛사람들은 볍씨를 담근 날이면 몸과 마음을 정갈히 하고, 어떤 동티도 나지 않도록 매사 조심하는 것이 일반이었다. 

항아리에 금줄을 쳐 고사를 올리고, 또 초상집을 찾거나 부정한 일을 접한 사람은 집 앞에 불을 놓아 그 위를 건너 집안으로 들였다. 이른바 화기(火氣)로 악귀와 부정한 기운을 날려 보내는 것이다. 이때 집 안에 들어와서도 볍씨를 보지 못하는데, 만일 부정한 사람이 볍씨를 보거나 만지면 그해 농사를 망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간절히 키워낸 한 뼘짜리 새싹은 한 해 농사의 명운이 달린 생명줄이었다. 밭작물을 심고, 보리를 추수하고, 모를 심는 계절. 이 절기는 희망과 절박함이 함께 한다. 

따뜻하고 푸르른 5월의 모습. 하지만 아침저녁으로 불어오는 찬바람에 ‘소만 바람에 설늙은이 얼어 죽는다’는 두 얼굴의 절기. 소만은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한 계절인지도 모른다.

왕실 원찰임을 상징하는 용주사 홍살문.

보릿고개가 남았다
만물이 조금씩 차오른다는 소만. 아직 완전하지 않은 그 여백의 시간은 마지막 고비를 넘기 전 극한으로 차오른 빈곤이 채운다. 올해 농사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고, 지난해 가을 갈무리한 곡식은 이미 동이 난 지 오래. 초근목피로 견디며 희망을 꿈꿔야 하는 이 모진 시기를 옛사람들은 ‘보릿고개’라고 이름 지었다.

시골집 젊은 아낙 저녁거리가 없어서
빗속에 보리 베어 숲속으로 돌아오니
생나무는 습기 먹어 불길도 일지 않고
문에 들어오는 어린 딸은 옷 잡고 우는구나.

허균의 스승이었던 이달(李達, 1539~1612)이 쓴 ‘보리 베는 노래(刈麥謠, 예맥요)’에는 보릿고개를 나는 백성의 괴롭고 고달픈 삶이 절절히 그려진다. 

비에 젖은 어머니가 베어 온 것은 아마도 채 영글지 않은 보리, 이른바 알곡이 익기도 전에 베어 양식을 마련하는 ‘풋바심’일 것이다. 축축해진 나무에 불을 피워보지만 그 또한 여의치 않은 상황. 젊은 어미의 가슴에는 치마에 걸린 어린 딸의 눈물보다 먼저 피눈물이 배인다.

이러한 상황은 근대에 이르기까지 별반 다를 것이 없어 시인 이영도(李永道, 19161976)의 작품 ‘보릿고개’에도 여전히 남아 있다.

사흘 안 끓여도/ 솥이 하마 녹슬었나
보리누름 철은/ 해도 어이 이리 긴고
감꽃만/ 줍던 아이가/ 몰래 솥을 열어보네.

배고파 투정을 부려 보아도 나올 것이 없다는 것을 아는 아이는 가만히 솥을 열어본다. 하지만 이미 며칠째 일 없는 솥은 녹이 슬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 실망한 아이가 맥없이 돌아서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감꽃이 피어나는 5월 하순, 지난 역사 속에 드리워진 우리네 삶의 애달픈 풍경이다. 

용주사 효행박물관 앞의 부모은중경탑.

죽추(竹秋)의 시간
소만을 이르는 또 다른 이름, 바로 죽추(竹秋)다. 온 산천이 푸르러지는 계절이지만, 이맘때의 대나무는 마치 가을처럼 누렇게 마르며 잎을 떨군다. 이는 큰 대나무가 어린 죽순에 제 양분을 나눠주며 생기는 현상으로, 마치 부모가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자식을 키우는 모습과 닮아 있다. 

경기도 화성시 화산 기슭에 자리한 효찰대본산 용주사. 이곳을 향해 거닐다 눈에 띈 것은 저 멀리 도량을 감싼 대나무 숲. 어느새 누렇게 말라 부슬부슬해진 댓잎이 땅 위를 소복이 덮었다. 만약 그 아래 새로이 자라나는 어린 죽순들이 있다는 걸 몰랐다면 그저 무심히 지났을. 하지만 한 생명이 제 생을 다해 새로운 생명을 지키는 그 묵묵한 위대함에 잠시 걸음을 멈추고 응원하게 되는 것이다. 

화성 용주사 또한 부모 자식의 인연을 떼어놓고는 설명할 수 없다. 모든 생명이라면 저마다 지닌 천륜의 몫. 용주사는 조선의 제22대 임금인 정조대왕이 자신의 아버지 사도세자와 어머니 경의황후의 명복을 빌고 넋을 기리기 위해 창건한 사찰이기 때문이다. 

용주사 경내에서 산책을 즐기는 가족의 모습.

언젠가 만날
본래 이곳은 신라 문성왕 16년(854년) 염거화상에 의해 창건된 갈양사의 터. 하지만 잦은 병난에 의해 소실되었던 이곳에 정조대왕은 용주사를 새로이 창건한다. 즉위 14년을 맞던 해,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화산 현륭원으로 이장하고, 용주사를 능침사찰(陵寢寺刹, 왕릉을 수호하기 위해 설치된 사찰)로 세웠다. 

숭유억불의 시대, 본인의 입지에 위험이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조는 용주사의 존재를 공고히 하고 그 역할을 분명히 했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장흥 보림사에서 보경 스님과의 우연한 만남이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스님으로부터 부모 자식의 인연과 어버이의 은혜에 관한 <불설대보부모은중경>(이하 부모은중경) 설법을 듣고 깊이 감화한 정조는 사찰을 지을 것을 결심한다. 

28세의 젊은 나이에 부왕에 의해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 아버지. 겨우 11살에 그 모습을 마주한 어린 아들. 정조는 억울하게 돌아가신 아버지의 넋을 달래고, 또 아버지의 부재를 안은 채 살아야 했던 그 자신의 마음을 달랠 길을 불법에서 찾았다. 

정조는 용주사 창건을 준비하며 〈부모은중경〉을 조각하여 그 경판을 용주사에 보관하고, 백성들을 위한 한글본을 편찬하여 만백성들에게 그 뜻을 전했다. 그에게 효는 단순한 개인적 미덕이 아니라 국가와 민심을 연결하는 새로운 가능성이었는지 모른다. 

보릿고개를 상징하던 5월은 이제 ‘가족의 달’이라는 이름으로 더욱 친근하다. 그리고 아버지를 그리워 한 어느 아들의 간절한 바람이 담겨 있는 이곳. 지금도 용주사에는 그 오랜 이야기를 듣고 찾아오는 수많은 가족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그리고 혹여 저 다정한 가족 중에 먼 시간을 돌고 돌아 다시 만난 두 사람이 있지는 않을까, 못내 궁금해지곤 하는 것이다. 

▶한줄 요약 
밭작물을 심고, 보리를 추수하고, 모를 심는 계절.  소만은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한 계절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