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선일의 불모열전 시즌2] 6. 인균(印均·仁均·印筠) 스님

조선 대표 조각승 집단 이끈 최고 僧匠 응원 스님과 호남 중심으로 활동 1640년대 수화승 맡아 작품 절정 김제 귀신사 등 불상 조성 이끌어 천신-색난으로 불모 계보 이어져

2025-05-23     최선일 동북아불교미술연구소장
조선 후기 조각승 인균 스님이 수화승으로서 가장 빠른 시기인 1633년 조성한 김제 귀신사 목조석가여래좌상. 

인균 스님은 17세기 전반 전라도를 중심으로 활동한 응원 스님과 함께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조각승이다. 응원 스님과 인균 스님의 관계를 알 수 있는 문헌 기록은 남아있지 않지만, 스님이 제작에 참여한 15건의 불상 중 7건을 응원 스님과 함께 작업했다. 특히 1610년부터 1630년대 중반까지 응원 스님을 따라 대부분 작업을 한 것으로 보아, 선후배 사이라기보다는 사제지간일 가능성이 높다. 응원 스님이 1635년에 구례 화엄사 목조비로자나삼불좌상을 제작한 후 활동한 흔적이 발견되지 않지만, 인균 스님은 1640년대부터 1660년대 전반까지 수화승으로 불상 제작을 주도하여 응원 스님보다 한 세대 더 활동했다. 

조각승 인균 스님은 1614년 2월, 각심(覺心)·응원 스님과 함께 무안 목우암 목조아미타여래삼존상(아미타여래, 관음보살, 대세지보살)을 제작할 때 보조화승으로 참여했다. 1615년에 태전(太顚)·응원 스님과 함께 김제 금산사 독성상(獨聖像)을 만들었다. 또한 1622년 5월 서울 자수사(慈壽寺)와 인수사(仁壽寺)에서 현진·응원·수연·법령(法玲)·청허(淸虛) 스님 등이 비로자나불(2존), 석가여래(3존), 노사나여래(2존), 미타여래(2존), 관음보살(1존), 대세지보살(1존) 등 11존의 불상 등을 조성할 때, 보조화승으로 참여했다. 당시 제작된 비로자나불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석가여래좌상은 서울 칠보사와 안동 선찰사에 봉안되어 있다. 인균 스님은 1623년 3월부터 11월까지 수화승으로 활동하며, 석삼(釋森) 스님과 함께 하동 쌍계사 목패(김제 금산사 조성)를 제작했다. 

인균 스님은 1624년 수화승 응원 스님과 함께 순천 송광사 광원암 목조아미타여래좌상, 송광사 응진전 목조석가여래삼존상과 소조나한상 등을 조성했다. 이어 1628년에는 순천 송광사 소조사천왕상을 조성할 때, 오위(五衛)의 정6품의 군직에 해당하는 사과(司果)로 참여했다. 이후 인균 스님이 1633년 10월에 김제 귀신사 영산전 소조석가삼존상과 나한상 등 25구를 수화승으로 조성한 것을 볼 때, 당시 조각승으로서 위상이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인균 스님은 1634년 3월부터 1635년 8월까지 청헌(淸憲)·응원 스님을 도와 구례 화엄사 목조비로자나삼신불좌상(국보)을 만들었다. 이후에는 수화승으로서 1643년 목조아미타여래삼존상(아미타여래는 광양 백운사, 보살좌상은 청도 장연사)과 1648년 여수 흥국사 목조지장보살삼존상과 시왕상 일괄(보물)을 조성했다. 

1654년에는 해익(海益)·천신(天信)·하륵(河勒) 스님과 함께 화순 사자암에 목조보살좌상(순천 송광사 부도암 봉안)을 제작했다. 1655년에는 여수 흥국사 목조석가여래삼존좌상과 나한상을, 1662년에는 전주 학소암 목조여래좌상을 만들었다. 

1663년에 건립된 구례 화엄사 벽암국일도대선사비(碧巖國一都大禪師碑)를 통해서는 인균 스님이 승병장이자, 당대의 최고의 고승 벽암 각성(碧巖覺性, 1575~1660)의 문도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문헌을 바탕으로 인균 스님은 1580년 전후에 태어나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거친 후, 1610년대 각심 스님이나 현진 스님 등이 제작한 불상의 보조 화승으로 참여하다가 1630년대 청헌 스님이나 응원 스님 등이 주도한 불상 제작에 부화승으로 참여했음을 알 수 있다. 또 1640년대에 수화승으로서 명산대찰 전각에 불상을 제작한 당대 최고의 실력을 갖춘 조각승으로 보인다. 특히 1630년대 중반 왕실의 발원으로 조성된 구례 화엄사 대웅전 목조비로자나삼신불좌상 제작에 참여한 수십 명의 조각승 중 세 번째로 언급된 점을 통해, 그가 이 시기 완숙기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인균 스님의 계보는 응원(1613~1635, 이하 활동 연대)→인균(印均·仁均, 1614~1662)·석삼(釋森·釋參, 1623~1640)·회감(懷鑑·懷鑒, 1633~1666)삼인(1628~1659)→천신(天信, 1654~1670)→색난(色難·色蘭, 1662~1730)·충옥(忠玉, 1668~1705) 등으로 17세기 불교 조각계를 대표하는 조각승 집단이다. 특히 1662년 전주 학소암 목조여래좌상 조성 시, 조선 후기 불교 조각계의 전성기를 이끈 색난 스님이 보조 화승으로 제작에 참여한 점은 17세기 전중반을 대표하는 조각승으로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인균 스님이 수화승으로 만든 가장 빠른 불상은 1633년 10월에 조성한 김제 귀신사 영산전 소조석가여래삼존상과 나한상 일괄이다. 불상에서 발견된 ‘조성발원문’에 의하면 “난이 일어났을 때 모두 불타고 없어졌습니다. (중략) 나한전이 없었는데, 도헌 비구가 탄식하며 스스로 발심하여 나한전을 짓고, 곳간을 고친 후 영산전에 교주 석가모니불, 아난과 가섭, 16나한상, 좌우 제석, 감제직부사자, 건령신 등 25위를 한 곳으로 봉안하였습니다. (중략) 숭정 6년 계유 10월 7일에 낙성하였습니다”라고 적혀 있다.

당시 석가, 가섭아난, 16나한, 제석(2구), 사자(2구), 장군(건령신, 2구)를 합하여 총 25구의 불상을 인균대오(大悟)·신계(信戒)·관해(寬海)·회감(懷鑑)·천고(天沽)·처심(處心)·영관(靈寬)·영인(靈印)·고경(沽敬)·상의(尙儀)·학고(學沽) 스님이 제작했다. 

귀신사 불상은 총 12명의 조각승이 1633년 10월에 완성한 것을 보면 우기(雨期)가 끝난 직후 조성이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화주는 도헌(道軒) 스님, 증명은 처명(處明) 스님, 지전은 성열(性悅) 스님이 맡았다. 증명을 맡은 처명 스님이 1633년에 조성된 고창 선운사 소조비로자나삼불좌상을 만들 때도 증명으로 참여한 것을 보면, 당시 전북 지역에서 활동한 고승(高僧)임을 알 수 있다. 

소조석가여래좌상은 135.5㎝의 중대형 불상으로, 얼굴에 비하여 어깨가 약간 좁지만 체구가 건장한 편이다. 무릎의 너비나 높이가 적당한 비례를 갖추고, 양쪽 무릎 끝에서 머리끝으로 이등변 삼각형을 이루어 전체적으로 안정감을 준다. 정수리에 정상계주를 갖추고, 나발은 촘촘하게 장식되어 있으며, 이마 중앙 윗부분에 반원형의 중간계주가 있다. 앙련(仰蓮)과 복련(伏蓮)으로 이루어진 대좌 위에 결가부좌한 자세로, 오른손은 아래로 내려 촉지인(觸地印)을 취하고, 왼손은 다리에 얹은 채 손바닥을 위로하고 엄지와 중지를 결하고 있다.

상호는 긴 네모꼴로 눈두덩이가 두툼하고, 가늘게 뜬 눈은 눈꼬리가 살짝 위로 올라갔으며, 코는 이등변 삼각형이다. 착의법은 두꺼운 대의 안쪽에 부견의를 입지 않은 채, 오른쪽 어깨를 덮은 대의 자락이 완만하게 팔꿈치로 늘어져 있다. 또한 대의는 복부를 지나 왼쪽 어깨로 넘어가 엉덩이까지 길게 늘어져 있다. 하반신을 덮은 옷자락은 끝단이 앞으로 늘어지고 양옆으로 자연스럽게 펼쳐져 있다. 가슴을 덮은 승각기의 윗단은 사선으로 접혀 있고, 그 밑에 불룩한 배를 표현하였다. 

이러한 이목구비(耳目口鼻)에서 풍기는 인상이나 착의법은 인균 스님이 수화승으로 제작한 광양 백운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1643년), 여수 흥국사 목조지장보살좌상과 시왕상(1648년), 화순 사자암 목조보살좌상(1654년), 여수 흥국사 목조석가불좌상과 나한상(1655년), 전주 학소암 목조약사여래좌상(화순 유마사 조성, 1662년) 등에서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