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성미의 심심톡톡] 내면에 숨은 ‘니디’를 만날 용기
38. 불가촉천민 니디를 바꾸신 부처님, 부모 교육 ‘자존감’ (3) 수치심의 뿌리를 껴안는 부모의 용기 자녀에게 자존감 주는 부모의 태도
2600년 전 인도의 어느 숲길. 한 남자가 다급히 몸을 숨겼다. 불가촉천민인 그의 이름은 ‘니디’. 평생을 똥 치우는 일을 하며 누구에게도 사람다운 대접을 받지 못했다. 사람들은 그가 지나가면 얼굴을 찌푸렸고, 심지어 그의 존재 자체를 혐오했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부처님과 제자들이 숲을 지나간다는 소식에, 니디는 얼른 숲속으로 숨었다. 아무 잘못이 없어도, 자신이 그 자리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누군가에게 불편함이 될까 두려웠다.
그 두려움은 단순한 부끄러움이 아니다. 그것은 ‘내가 이런 모습이라 미안하다’, ‘나는 본래부터 누군가의 거부 대상이었다’는 존재에 대한 뿌리 깊은 수치심이었다. 수치심은 단지 잘못된 행동 뒤에 따라오는 감정이 아니다. 그것은 ‘내가 틀렸다’는 인식이 아니라, ‘나는 잘못된 사람이다’라는 믿음이다. 그래서 수치심은 인간 존재 자체를 뒤흔든다.
인간은 누구나 어떤 형태로든 수치심을 안고 살아간다. 어릴 때 겪은 작은 실수 하나, 남들과 달랐던 외모나 성격, 사랑받지 못한 기억 하나가 마음 깊이 새겨진다. 그 기억은 삶 속에서 끊임없이 속삭인다. ‘넌 이상해’, ‘넌 모자라’, ‘넌 사랑받기에 부족해’.
자존감은 이런 속삭임을 잠재우는 조용한 외침이다. ‘나는 괜찮은 사람이다’, ‘내가 존재해도 좋다’, ‘내 감정과 내 생각, 내 존재는 누군가에게 짐이 아니다’. 자존감은 자신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내면의 생명을 존중하는 감각이다.
그렇다면 왜 많은 부모가 이 자존감을 아이에게 제대로 건네주지 못할까? 이유는 단순하면서도 깊다. 바로 부모 자신이 자존감을 누려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부모 자신도 어릴 적 자주 혼이 났고, 늘 비교당하며 자랐다. “넌 왜 그것밖에 못 하니?” “다른 애는 저렇게 잘하는데.” 이런 말 앞에서 자신을 지키는 감각은 점차 사라지고 ‘잘해야 사랑받는다’는 믿음만 남았다. 이 믿음을 품은 채 어른이 되었고 그 믿음대로 아이를 키운다. 분명 자녀를 사랑하지만 불안이 더 크고, 응원하고 싶지만 기대가 먼저 튀어나온다. 수용하고 싶지만 조급한 마음이 말투를 바꾼다. 아이의 미래를 걱정하며 통제하게 되고, 그 통제는 아이의 자존감을 조금씩 앗아간다.
그러나 부모는 아이를 해치려는 의도가 없다. 그저 불안한 사랑, 조건이 많은 수용 속에서 살아남은 방식 그대로 아이를 대할 뿐이다. 이 지점에서 필요한 것은 부모의 자책이 아니라 부모 자신부터 자존감을 회복해야 한다는 인식이다.
부처님이 니디를 대했던 방식은 오늘의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부처님은 니디를 외면하지 않으셨다. 사람들이 피하던 그 존재를 발견하고 숨어 있는 그를 향해 다가섰다. 그 시선은 “나는 너를 보고 있다”는 메시지였다. 관심이자 행동으로 보여주는 경청이다. 그리고 니디를 꾸짖지 않으셨다. 똥물이 튀자 니디는 본능적으로 움츠렸지만 부처님은 침묵하셨다. 그 침묵은 책망이 없는 시간이었다.
부처님은 니디를 물가로 이끌어 몸을 씻게 하셨다. 그것은 단순히 씻기는 행위가 아니라 스스로 혐오하던 자신을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보살핌이었다.
오늘의 부모는 부처님처럼 아이에게 다가갈 수 있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부터 해야 할까? 부모가 자녀에게 자존감을 건네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내면을 돌아봐야 한다. 부모가 회복해야 할 것은 존재를 바라보는 시선이다.
첫째, 자기 존재에 대한 수치심을 들여다보는 용기가 필요하다. 부모도 한때는 아이였고, 내면의 아이는 아직 그 안에 살아 있다. “너 왜 그래”, “그렇게 하면 안 돼”라는 말을 들으며 자라온 기억 속에는 아직 말하지 못한 수치심이 숨어 있다. 나는 언제부터 나를 미워하게 되었는가? 어떤 상황에서 ‘미안하다’는 말이 먼저 나오는가? 상처받은 내면의 니디를 만나고 품고 수용해 주는 것이 첫걸음이다.
둘째, 비판적인 내면의 목소리를 인식하고 멈추는 연습이 필요하다. “또 못했잖아”, “이 정도는 해야지”라는 말은 나 자신을 채찍질해 온 오랜 습관이다. 이 목소리는 아이에게도 고스란히 전달된다. 비판받은 부모는 비판하는 부모가 되기 쉽다. 하루에 한 번, 스스로에게 건네는 말을 관찰해 보자. 그리고 비판 대신 이해하는 말로 바꿔보자. “왜 이렇게 예민해”가 아니라 “지금 좀 지친 상태야, 괜찮아”라고 다독이는 연습이 필요하다.
셋째, 아이를 통제하려는 욕구보다 함께 있으려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부처님은 니디를 변화시키려 하지 않으셨다. 함께 걷고 함께 씻으며 존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셨다. 아이도 마찬가지다. 감정을 표현할 때, 바로 해결하려 하지 말고 그 옆에 잠시 머무는 연습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존재를 수용하는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 부처님의 말씀처럼 평가가 아닌 감각, 조건 없는 사랑이 담긴 언어가 필요하다. “잘했어” 대신 “네가 참 많이 노력했다는 걸 느꼈어”, “그래서 엄마가 너를 사랑해” 대신 “너니까 좋은 거야”라고 말해보자.
부모가 부처님처럼 되기 위해 회복해야 할 것은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시선이다. 그 시선은 내 안의 부끄럽고 실수투성이의 나, 늘 부족하다고 느끼는 나를 먼저 수용하는 데서 출발한다. 아이를 보려면, 내 안의 니디부터 만나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