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 붓다를 만나다] 10. 모든 차별 넘어 부처님 나라로
리움미술관 소장 과 발원문 작은 종이 위에 차별 없이 담긴 바람
고려시대부터 시작된 복장(腹藏)은 의례를 통해 조형물인 불상 안에 부처를 모시는 일이다. 의례의 결과 불상 안에 모셔진 여러 물목들도 복장이라고 부른다. 복장을 지닌 고려시대의 불상은 현재 20여 건에 달하며, 불상의 복장 조사가 지속됨에 따라 향후 그 숫자가 늘어날 가능성이 크다.
복장에서 발견되는 기록유산은 전적과 사경(寫經), 다라니(陀羅尼), 발원문(發願文) 혹은 조성기(造成記) 등으로 다양하다. 그중 불사에 대해 가장 많은 정보를 담고 있는 것은 역시 발원문이다. 복장에서 발견되는 발원문에는 통상 발원의 목적, 불보살의 존명, 불상이 조성된 사찰이나 봉안될 장소, 제작 시기, 그리고 불상 조성에 동참한 이들의 이름이 기록된다. 이 같은 발원문은 제작 당시에 작성된 것과 불상을 중수하거나 개금할 때 남긴 것으로 크게 나눠볼 수 있다.
신앙과 염원을 반영한 삼존불의 도상
리움미술관에 소장된 ‘은제아미타여래삼존좌상’은 복장물을 지닌 고려 후기의 불상 중 하나이다. 은제 난간, 청동합과 은제합 등의 유물이 함께 전한다. 주존인 아미타여래를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이 협시하는 삼존불의 구성이다. 원래는 난간이 있는 불단 위에 삼존상을 모셔두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세 구의 불상은 상, 대좌, 광배를 각각 따로 만들어서 끼우는 형식으로 제작되었다. 대좌와 광배를 서로 결합하면 전체 높이가 약 30cm 정도에 달한다. 불상, 대좌, 난간은 당시로서는 값비싼 재료인 은제합금으로 제작되었고, 광배는 순동으로 만들어졌다. 광배에는 넝쿨무늬를 투각해 장엄했다. 아미타여래와 관음보살의 머리카락에도 석청(石淸)이란 고가의 안료를 칠한 점에서 불상에 들인 공력을 엿볼 수 있다. 은제 불상은 고려시대에서 조선시대 초에 걸쳐 일시적으로 유행했다. 은은 특히 크기가 작은 불상을 만들 때 애호된 재료였다. 이 삼존불은 현존하는 은제 불상 중에서는 크기가 큰 편에 속한다.
본존인 아미타여래는 통견의 법의를 걸치고 결가부좌한 모습이다. 둥근 얼굴형과 단정한 법의의 표현은 고려시대에 발전했던 전통적인 불상형을 따른다. 두 협시보살은 본존불과 마찬가지로 양쪽 어깨를 가리는 통견의 법의를 걸치고 가부좌를 튼 모습이다. 아미타여래의 머리에 중간계주가 없어지고, 좌협시보살인 관음보살의 보관이 망실된 것을 제외하면 완형에 가깝다. 이 삼존상에서는 우협시보살로 두건을 쓴 지장보살이 등장하는 것이 주목된다. 〈관무량수경〉에서 아미타여래의 협시로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든 것과는 배치되기 때문이다.
경전의 규범에서 벗어나는 이 같은 삼존의 구성이 우리나라에서만 유행한 것은 아니다. 중국 사천성에 소재한 석굴사원에서는 당대(唐, 618-907)부터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이 한 쌍으로 등장하거나, 아미타여래를 비롯해 약사여래, 석가여래, 미륵여래를 두 보살이 보좌하는 삼존상의 형식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발견된다. 동아시아 불교문화권에서 이른 시기부터 자비의 보살로서 절대적인 인기를 누렸던 관음보살과 달리, 대세지보살은 독자적인 신앙의 대상이 되지는 못했다. 그 결과 불교미술 상에서도 독존으로 나타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이를 고려할 때, 아미타, 관음, 지장으로 구성된 삼존의 도상은 중국에서 당대 이래 지장보살에 대한 신앙이 크게 발전함에 따라 대세지보살 대신 지장보살을 배치한 결과로 생각된다.
이는 고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물론 673년에 조성된 ‘계유명전씨아미타불비상’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7세기 후반에 경전에 규정된 아미타여래, 관음보살, 대세지보살의 삼존 도상이 확립되어 있었다. 또, 1333년에 조성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금동아미타삼존불상’이나 고려 후기의 여러 아미타삼존도가 보여주듯이, 경전에 입각한 아미타삼존 역시 지속적으로 조성되었다. 그러나 리움 소장 ‘은제아미타여래좌상’이나 14세기 후반에서 15세기 초에 조성된 여러 불화와 불상은 이 시기 지장보살이 대세지보살을 대체하는 형식의 아미타삼존이 상당한 인기를 누렸음을 알려준다. 이는 내세에서 구원받기를 간절히 원했던 당시 사람들의 염원이 미술에 반영된 결과일 것이다.
1383년, 같은 원(願)을 세운 사람들
리움미술관 삼존불 중 아미타여래와 관음보살상은 복장이 개봉되어 조사된 바 있다. 그중 관음보살상에서 나온 한지에 먹으로 쓴 발원문을 통해 1383년에 제작된 것을 알 수 있다. 현재 결락된 부분이 많아서 정확한 발원자 수를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대략 600여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동참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발원문은 ‘~대덕동발원문(~大德同發願文)’이란 제목으로 시작되며, 불상의 조성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서원(誓願)의 내용으로 이어진다. 다음으로 시주자의 이름을 적었으며, 마지막으로는 제작의 연대가 기록되어 있다. 발원문은 전체 37행이며, 각 행에는 대략 50자씩 글씨가 쓰여 있다. 여타의 고려시대 발원문과 마찬가지로 글씨의 크기나 글자체에서 질서나 규칙을 찾아보기는 어려우며, 승려와 재가 신도들의 이름도 일정한 순서 없이 뒤섞여 있다. 한편, 불사를 주도한 사찰의 이름이나 불상을 봉안할 지역, 전각에 대해서는 아무런 정보가 없다. 이 점은 1450년에 조성된 ‘통도사 은제아미타삼존불상’의 복장에서 발견된 발원문 형식과도 매우 비슷하다.
발원문 첫 부분이 결락되어 법명은 알 수 없지만, ‘~대덕과 함께 한 발원문’이란 제목이 알려주듯이 삼존불의 발원을 주도한 이들은 스님이었다. 득도하여 극락에 가기를 기원하고, 중생을 이끌어 모든 사람이 해탈할 수 있겠다는 발원의 내용 역시 발원의 주체와 호응한다. 600여 명 정도로 추산되는 발원자 중 절반 가까이가 법명(法名)을 사용한 스님이라는 점도 매우 주목된다. 그중에는 법명에 ‘묘(妙)’자를 쓰는 비구니 스님들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어 눈길을 뜬다.
재가신도 발원자 중에서 성씨를 소유한 상층계급이 매우 제한적으로 나타난다는 점도 흥미롭다.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은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李成桂, 1335~1408)이다. 그 외에 왕실 여성으로 추정되는 순안옹주 이씨(順安翁主 李氏)도 눈길을 끈다. 선행연구에 의하면 승려와 성씨 소유자가 전체 발원자 중 대략 71.8%에 달하며, 나머지 28% 정도는 하층민 혹은 노비로 이해된다. 이 중 ‘가이 加伊’, ‘고음이古音伊’, ‘내은內隱’, ‘소근小斤’ 등은 고려 후기에 흔히 사용되던 하층민, 여성, 노비의 이름이었다.
이 발원문에는 발원자의 이름만 적혀 있을 뿐 이들의 구체적인 참여 내용이나 정도, 참여의 목적 등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따라서 비구니 스님이나 신분이 낮은 여성들이 불사에 어떻게 기여했는지나 어떤 마음으로 여기에 동참했을지에 대해서도 알기 어렵다. 그러나 발원문의 앞부분에 보이듯이, 참회를 통해 업장을 소멸하고 극락정토에 태어나기를 바랐던 마음은 불사를 이끌었던 스님들이나 재가 여성들이나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600여 명의 사람들은 승속을 넘어, 성별의 다름을 넘어, 그리고 신분의 차이를 넘어 극락에 함께 왕생하기를 꿈꾸며 힘을 모았을 것이다.
가로, 세로가 각각 30cm가 조금 넘는 이 작은 종이 위에는 수많은 이름이 있다. 이 위에서만큼은 승속의 구분도, 성별의 다름도, 신분의 차이와 관계없이 똑같이 이름이 적혀 있다. 신앙과 예경의 대상인 불상의 몸 안에 내 바람과 이름을 적어 넣은 발원문을 봉안하는 일은 불사에 동참한 이들에게 분명 큰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이 점에서 복장에 참여하는 일은 여러 불사 중에서도 특별하게 여겨졌을지도 모른다.
▶한줄 요약
참회를 통해 업장을 소멸하고 극락정토에 태어나기를 바랐던 마음은 불사를 이끌었던 스님들이나 재가 여성들이나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600여 명의 발원자들은 승속을 넘어, 성별의 다름을 넘어, 그리고 신분의 차이를 넘어 극락에 함께 왕생하기를 꿈꾸며 힘을 모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