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원의 불교미학산책] 9. 혜화별관-아름다움은 어디에 있는가

진주 잡는 어부인가, 진주 품은 조개인가 미학에서의 보이는 것과 보여지는 것  현색과 형색의 조합은 미의 객관주의 자신의 심리 상태에 따르면 주관주의

2025-05-05     서정원 박사
혜화별관에는 ‘영상대학원’이라는 표지판이 붙어 있다.

동국대학교 박물관을 나와 학교의 정상, 남산의 중턱인 팔정도 광장에 이르는 길에는 세 가지가 있다. 먼저 박물관과 혜화관 사이의 계단을 직통으로 올라가는 길, 혜화관 엘리베이터를 타고 중간층에 내려 구름다리를 건너는 길, 마지막으로 혜화관을 끼고 한 바퀴 빙 돌아가면 100주년 기념비와 정각원이 맞이해주는 길이다. 외로운 산책자에게는 반갑게 맞이할 친구가 있는 길이 좋지 않을까? 혜화관을 빙 돌아 가보도록 하자.

그런데 계속 언급하는 혜화관의 혜화라는 단어에 눈길이 간다. 우리는 꽤 오래 전에 혜화문을 넘어오기도 했는데, 도대체 다른 대학이 위치한 혜화동이라는 이름이 왜 계속 동국대학교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을까? 그건 동국대학교의 전신인 혜화전문학교의 행지(行持)가 동국대학교에 살아있기 때문이다. 혜화전문학교는 1940년부터 1944년까지 비교적 짧게 사용된 이름이지만 광복 직전, 긴 밤 중에서도 가장 어둡다는 동틀 녘 직전에 사용된 이름이어서 그런지 가장 많이 회자되는 동국대학교의 개명 전 이름이다. 우리에게 너무나 잘 알려진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의 조지훈이 이 혜화전문학교를 다녔다.

이렇듯 동국대학교는 수많은 과거가 쌓여 올라간 학교이다. 우리가 밟는 산책로는 수많은 이야기의 얼개로 짜이고 얽혀 만들어진 길이다. 다만 이 길을 만든 무수한 이야기 중 살아남는 이야기는 몇 가지 되지 않는다. 동국대학교의 역사가 혜화전문학교 하나로서만 말해질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살아남는 이야기만이 우리에게 남겨질 뿐, 그 곁으로 사라져 가는 이야기는 주목되기 힘들다. 이 수많은 얼개의 이야기 중 무엇이 살아남고, 무엇이 살아남지 못할지 결정하는 것이 바로 해석학이다. 나는 해석학을 볼 때마다 독일 제3제국 철도청의 선로변경원이 생각난다. 어떤 기차가 아우슈비츠로 가는 선로를 타고, 어떤 기차가 번영의 베를린에 가게 될까?

해석학에 대한 불평불만을 다하고 나니 혜화관이 끝나고 정각원이 나타나게 될 찰나에 또 하나 눈길이 가는 건물이 있다. 혜화별관이다. 필자 나름 생각해보면 동국대학교를 불교적으로 풀어나간 사람이 한둘은 아니겠지만, 혜화별관에 주목한 사람은 나밖에 없으리라 생각이 든다. 그만큼 산책자로서 여유로워서이지만 산책자의 눈길이 멈춘 것은 혜화별관에 위치한 영상대학원이라는 표지판 때문이다.

동국대학교 영상대학원은 서울 동국대학교의 수많은 특수대학원 중, 유일하게 박사과정까지 운영하고 있는 대학원이다. 동국대학교 학부 연극영화학과가 한국에서 가장 높은 평가를 받는 것과 어울리게 그 연장선의 대학원 또한 자부심을 가질 만큼 운영이 잘 되고 있다고 안다. 그런데 산책자의 마음을 사로잡은 단어는 영상(映像)이다. 비칠 영(映)에 형상 상(像)이라니. 이 보이는 것, 보여지는 것, 이 두 가지는 불교철학의 핵심 테마이다.

어느 날 카지야마 유이치(梶山雄一)라는 일본학자의 <인도불교철학>이라는 책을 봐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일이 있었다. 번역자인 권오민 선생님이 이 책에 대해 ‘이론체계로서 불교를 받아들이게 한다’고 평가한 것을 보고 무언가에 홀린 듯 책을 빌리게 되었다. 그 당시에는 불교공부에 체계를 잡지 못해 도대체 내가 무엇을 하는지 길을 잃은 상태였기 때문에 저 한 줄의 평에 길을 찾았다고 기뻐하며 빌려보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리고 책을 펼치고서 들이닥친 암담함은 지금 와서 생각해도 내가 불교공부를 계속할 용기가 어디서 난 건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이 책에서는 보이는 것과 보여지는 것, 이 두 가지만을 가지고 인도불교철학 전체의 얼개를 잡고 있다. 우리가 보이는 것을 어떻게 아는 것일까? 이 책은 본다고 하는 것은 외계의 실재하는 대상물일까, 한 찰나 마음에 남긴 흔적일까, 아니면 내 마음이 만들어낸 환상일까, 아니면 이조차 사실 생겨난 적도 없는 공한 일일까에 대한 내용으로 가득 차 있는 책이다. 나오는 전문술어들의 어색함은 둘째 치고, 이 정도 사고력이 없으면 내 스스로 불교적 구도를 이루어 가는 건 끝이라는 생각을 하며 책을 고이 접어서 책장 한쪽에 묻어뒀다. 그래도 책을 나빌레라 날려 보내지는 않아서일까? 불교학의 외도로 가져온 미학에서 다시 보이는 것과 보여지는 것의 문제를 만나게 되었다.

미(美)라는 심상이 대상물에 존재하는지, 자신의 마음에 존재하는지는 지난 호에서 말했듯이 미학의 중요주제로 미의 주관주의, 객관주의 논쟁이란 이름 아래 치열하게 논의되어 왔다. 미라는 것이 대상의 형태 자체에 귀속된다라고 할 때, 미는 꼭 심리적인 요소만이 아니라 외형의 상태 그대로를 말한다. 반대의 경우에는 형태를 바라보는 자신의 태도에 미가 달려있다고 보는 것이다. 즉 불교식으로 말한다면 미가 심소(心所)인지, 현색(顯色)과 형색(形色)인지의 문제이다. 형색은 길고, 짧고, 각지고, 둥글고의 외형적 모습인 장단방원을 말한다. 현색은 푸르고, 누르고, 빨갛고, 하얀 외형적 색깔인 청황적백을 말한다.

우리에게 보여지는 대상물이 마음 밖 외계에 실재한다면, 그것은 그 실물의 장단방원·청황적백이라는 현색과 형색의 값이 실재하는 것이고, 그것의 조합에 따라 미가 결정된다는 의미이며, 이런 사고방식은 곧 미의 객관주의에 속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꽃도 장단방원청·청황적백을 가지고 있고, 쓰레기도 장단방원·청황적백을 갖고 있지만 그 조합에 따라 꽃은 아름답고, 쓰레기는 아름답지 않다. 보통의 사람은 꽃은 아름답고 쓰레기는 아름답지 않다고 생각한다. 장단방원·청황적백의 객관적 조합에 따라 아름다움이 결정되는 것이다. 반면에 쓰레기에도 왠지모를 쓸쓸함, 자신의 쓸모를 다한 홀가분함 등의 미를 느낄 수도 있다. 이는 전적으로 자신의 심리적 상태에 기대하고 있는 미적 작용이다. 이런걸 미의 주관주의라고 나는 생각한다.

서둘러 첨언하자면 인도에서 지난한 세월 고민해 온 아비달마적인 논리와 그 연습에 대해 경탄만 보낼 뿐, 사실 그 이해의 문턱조차 넘지 못한 산책자가 주제넘게 비바사(毘婆沙, 논사) 흉내를 내본 것이다. 그럼에도 내 안에 결정화되는 이 미라는 진주의 출처가 외부인지 내부인지는 산책자에게 너무나 중요한 문제이다. 산책자는 진주조개를 잡는 어부인가, 사실 진주를 품은 조개일 따름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