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일야의 詩, 불교를 만나다] 8. 박노해의 ‘회향’
깨달음은 산사 아닌 시장에 있다 부처가 부처인 것은 회향에 있어 진리서 세상으로 다시 와서 ‘如來’ 불교적 회향 공간은 산 아닌 세속 중생 아픔 알려면 시장으로 가라
부처님이 위대한 이유
해마다 부처님오신날이 다가오면 봉축위원회에서 봉축표어를 발표한다. 올해는 ‘세상에 평안을, 마음에 자비를(Peaceful World, Compassionate Mind)’이 선정됐다. 세상을 조화롭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평화와 안정을 찾고, 자비로운 마음을 키워야 한다는 취지라 한다. 대통령 탄핵으로 조기 대선이 치러지는 어지러운 시절 때문인지 ‘세상에 평안을’이라는 글귀가 더욱 마음에 와닿았다. 그리고 탄핵 찬성과 반대 두 진영으로 갈라져 대립과 갈등이 심해지고 있는 오늘날 ‘마음에 자비를’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봉축표어를 잘 정했다는 생각이다.
사월 초파일 당일에는 전국에서 봉축법회를 열고 부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뜻을 기린다. 그때마다 빠지지 않는 것이 부처님이 태어나면서 외친 사자후다. 불자들은 부처님의 탄생게(誕生偈)에 담긴 실존적 의미를 새기고 그분의 위대한 삶을 찬탄한다. 탄생게에는 인문학의 두 가지 근본 물음인 ‘인간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불교적 해답이 담겨있다. 잠시 인용해 본다.
“하늘 위, 하늘 아래 나 홀로 높다. 온 세상이 고통에 빠져있으니, 내가 마땅히 그들을 편안케 하리라.(天上天下 唯我獨尊 三界皆苦 吾當安之)”
알려진 것처럼, 유아독존(唯我獨尊)은 나만 홀로 잘났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은 그 자체로 존엄하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성별이나 피부, 신분과 관계없이 불성(佛性)을 갖춘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가장 불교적인 대답이다. 그런 고귀한 인간이 고통 속에 빠져있으니, 그들을 모두 구원하겠다는 것이 탄생게에 담긴 인문학적 의미다. 타인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고 그들과 함께하면서 살겠다는 서원(誓願)이 새겨진 귀한 가르침이다. 부처님이 세계 4대 성인으로 추앙받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어느 날 부처님의 위대한 삶을 노래한 짧은 시 한 편을 만나게 되었다. 박노해 시인의 ‘회향’이라는 시다. 시인은 부처님이 왜 위대한 분인지 매우 실존적이면서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한마디로 부처님의 위대한 점은 출가나 고행, 깨달음이 아니라 회향(廻向)에 있다고 한다. 욕망과 욕망이 부딪히는 시장 속으로 들어가 아름다운 연꽃을 피워냈기 때문에 부처님이 위대하다는 것이다. 고통 속에 빠진 모든 중생을 구원하겠다는 탄생게의 의미와 서로 통하는 것 같아 이 시를 소개한다.
박노해는 노동운동을 하는 시인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1983년 <시와 경제>에 ‘시다의 꿈’을 발표하면서 등단한다. 이듬해에는 그 유명한 <노동의 새벽>을 출간하는데, 이 시집은 한국 사회에 엄청난 반향을 일으킨다. 노동자의 고달픈 현실을 생생하게 그린 이 책은 정부와 자본가에 대한 비판적인 내용을 다루었다고 해서 군사정권에 의해 금서로 지정된다. 이러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100만 부가 넘게 팔릴 정도로 엄청난 관심을 받았다. 특히 대학가를 중심으로 많은 학생들이 읽고 또한 운동가요로 만들어져 시위 현장에서 자주 불리게 되었다.
시인의 본래 이름은 박기평이다. 그런데 노동운동을 시작하면서 박노해라는 필명으로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다. ‘박해받는 노동자(勞)의 해방(解)’이라는 뜻이 담겨있다. 시인의 삶과 잘 어울리는 이름이다. 독재 정권 당시에는 얼굴 없는 시인으로 알려졌고, 1991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어 7년간 복역하게 된다. 1998년 대통령 특별사면으로 출소한 후에는 사진작가이자 평화 운동가로 활동하면서 시를 쓰고 있다.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를 비롯하여 <너의 하늘을 보아> 등 많은 작품이 있다.
누군가 그에게 왜 사진을 찍는지 물어본 적이 있다. 그때 시인은 사진을 위해 현장에 간 적은 없다면서 ‘약자들에게 가장 필요하고 강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카메라’라는 인상적인 말을 남긴다. 사회적 약자를 향한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이러한 시선으로 부처님을 삶을 바라본 <회향>을 읽어보기로 하자.
“부처가 위대한 건 버리고 떠났기 때문이 아니다 / 고행했기 때문이 아니다 / 깨달았기 때문이 아니다 / 부처가 부처인 것은 회향(廻向)했기 때문이다 / 그 모든 것을 크게 되돌려 세상을 바꿔냈기 때문이다 / 자기 시대 자기 나라 먹고 사는 민중의 생활 속으로 / 급변하는 인간의 마음속으로 / 거부할 수 없는 봄기운으로 / 스며들었기 때문이다 / 욕망 뒤얽힌 이 시장 속에서 / 온몸으로 현실과 부딪치면서 / 관계마다 새롭게 피워내는 / 저 눈물 나는 꽃들 꽃들 꽃들/ 그대 오늘은 오늘의 연꽃을 보여다오”
시장 속으로 회향하라
불교에서 회향(廻向)이란 어떤 일을 마친다는 의미로 주로 쓰인다. 예컨대 정규 수업이나 인문학 강좌 등을 마칠 때 회향한다고 말한다. 법회를 마칠 때도 마찬가지다. 사회자는 대개 ‘사홍서원과 산회가를 끝으로 법회를 회향하겠습니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회향에는 좀 더 특별한 의미 즉, 자신이 지은 모든 공덕을 다른 사람들에게 돌린다는 뜻이 담겨있다. 열심히 공부하고 수행해서 쌓은 공덕을 내가 아니라 대중을 위해 베푼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불교를 좋아하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불교의 시선은 언제나 내가 아니라 대중을 향해 있다.
이러한 불교의 특성은 여래(如來)라는 부처님의 호칭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 말은 본래 ‘여래여거(如來如去)’의 준말인데, 진리의 세계(如)에 갔다가(去) 그 세계(如)에서 다시 돌아왔다는(來) 뜻이다. 수행자 싯다르타는 그토록 열망했던 깨달음에 이르렀는데, 왜 다시 번뇌 가득한 중생의 세계로 돌아온 것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진리의 세계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중생들이 사는 세속으로 들어와 그들을 구원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불교 법회를 마칠 때 모든 중생을 건지기 위해 번뇌를 끊고 열심히 공부해서 성불하겠다는 사홍서원(四弘誓願)으로 회향하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박노해 시인은 부처님의 위대함을 바로 이 지점에서 찾고 있다. 부처님은 출가 후 6년 동안 고행하고 마침내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이루었기 때문에 위대한 것이 아니다. 부처님이 위대한 이유는 도를 이룬(成道) 다음 곧바로 중생 속으로 회향했기 때문이다. 욕망 뒤얽힌 민중의 삶 속으로 들어가 자신이 깨친 진리를 전하고 그들의 마음에 스며들었던 점을 높이 평가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부처님과 시인이 지향하는 삶은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개인의 안락이나 행복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중생의 고통을 덜어줄 것인가에 관심이 있었으니 말이다.
절에 가면 법당 벽면에 그려진 피리 부는 목동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잃어버린 소를 찾아서 돌아오는 이 그림을 흔히 심우도(尋牛圖), 혹은 십우도(十牛圖)라 한다. 불교에서 소는 마음을 의미하므로 십우도는 잃어버린 나를 찾는 과정을 열 단계로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그림의 마지막 10단계는 놀랍게도 입전수수(入垂手), 그러니까 시장에 들어가 손을 드리우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불교에서 최고의 경지가 시장 사람들과 막걸리 한잔 나누는 일이라는 뜻이다. 수행의 최고봉이 고요한 산속이 아니라 시장 한가운데 있는 셈이다.
이러한 이상을 현실에서 보여준 인물이 바로 원효다. 알려진 것처럼 그는 의상과 함께 당나라로 유학을 가다가 해골 물을 마시고 큰 깨침을 얻는다. 이를 계기로 원효는 신라로 돌아와 고통 속에 빠진 대중과 함께하는 삶을 이어간다. 고요한 산사에서 수행하는 시간을 제외하고 그는 거지들과 생활하면서 고통을 함께 나누었다. 때로는 술집 작부들과 술을 나누면서 그들의 애환을 들어주기도 했다. 산속이 아니라 중생들의 욕망과 부딪히면서 참다운 회향을 실천한 것이다. 전 세계가 원효라는 인물을 위대하게 평가하는 이유다.
불교 인구가 감소한다고 걱정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린다. 어쩌면 불교가 중생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은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산속에 도인 없다는 말이 그냥 나온 것이 아니다. 나무나 꽃, 새들은 시비를 걸지 않지만, 세속은 곳곳이 경계의 지뢰밭이다. 욕망과 욕망이 서로 세게 부딪히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세상이 더럽고 부조리하다고 해서 버리고 떠나면 되겠는가. 산속에서는 고요하고 평화로운 삶이 보장되겠지만, 그곳에 불교적 삶은 없다. 회향의 공간은 산속이 아니라 바로 세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