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원의  불교미학산책] 8. 박물관2-아름다움의 속성

불상의 아름다움은 무엇인가? 콤플렉스로 미륵불 아름답지 않다고 생각 어느 날 필요한 ‘실용적 보살’임을 깨달아 박물관 부처님도 본인 일대사인연 수행 중

2025-04-18     서정원 박사
논산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 사진출처=국가유산청 

모더니스트라고 할지 포스트 모더니스트라고 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누구나 들어봤을 법한 작가 이상(李箱)의 ‘날개’는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한다.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 맥락은 전혀 다르지만, 박물관에 모셔진 부처님들을 뵐 때마다 왠지 이 문장이 계속 생각나고는 한다. 동국대학교 박물관에 계신 여러 부처님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다.

불교미술 연구자 이주형은 한 40대 백인 여성이 미국 박물관에 전시된 530년경 제작된 불상을 응시하는 사진을 보면서 다음과 같은 의문을 가진다.

이 여인은 그 너머로 또 무엇을 볼 수 있을까?…그녀는 불교를, 붓다라는 동양의 성인을, 혹은 신을 이 상에서 느끼고자 할지 모른다.…막연히 ‘마음의 평정’, ‘숭고함’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을지 모르나, 그것이 구체적으로 불교라는 종교의 범주와 일치하는 것이라고 낙관하기는 어렵다. 더욱이 그녀는 이 상을 신앙의 태도로 보지 않는다.(‘미학·예술학 연구’ 25, p.90)

말 그대로이다. 사진만으로는 알 수 없으나 그녀는 자신 삶(미국의 중년 백인 여성)의 궤적상 아주 잘 알기는 어려운 대상물 앞에 서 있다. 그리고 그 대상물은 동양의 수억 명이 믿고 따르는 숭고한 인물, 즉 성인(聖人)의 상(像), 불상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 맥락이 없이 미국 한복판의 박물관에 박제돼 있을 뿐이다. 불상을 치장하는 연화좌도 산개도 닫집도 없이 말이다. 그녀는 그 불상을 보면서 별생각이 없을지도, 아니면 이주형의 말대로 어떤 숭고함을 느낄 수도 있다. 그것이 불교를 믿는 사람이 느끼는 숭고함이랑은 아주 다를 수도 혹은 비슷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불상이라는 것은 그 자체로 성스러운 것이 아니라 감상자의 태도에 달려 있는 것일까? 불상 자체가 성스럽지 않다는 질문에 대해 오늘의 산책을 해볼까 한다.

본래 미학에서 미적 속성이 미적 대상(주로 예술품)에 속하는지 감상자의 심상(心想)에 속하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했다. 미의 객관주의-주관주의 논쟁이 이를 잘 보여준다.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과거의 철학자일수록 미란 객관적인 것으로 심상 외부에 존재하는 것이었다. 그리스인들이 비율과 비례가 보여주는 아름다움에 얼마나 열광했는지, 혹은 아름다움 자체는 자연에 귀속되는 것인데 그것을 재현한다고 만든 예술에 대해서 얼마나 경멸했는지를 본다면 잘 알 수 있다. 반면 중세 암흑시대, 신에 의해 모든 것이 제약당하던 우울한 시기를 넘어 르네상스, 인본주의, 낭만주의와 같은 말이 등장했을 때, 인간 심상에서 뿜어져 나오는 미적 체험은 있는 그대로 긍정되기 시작했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은 말한다.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그렇다고 생각할 뿐이다.”

다시 불상으로 돌아와 보자. 많은 불교미술 책에는 어떤 특정 불상이 아름다운 이유에 대해서 별의별 설명을 다 늘어놓는다. 어떤 불상은 그 당시로서 최신의 조각양식을 보여줌으로 아름다운 것이라고 하고, 어떤 불상은 유행을 쫒지 않고 투박한 민중적 요소를 가졌기 때문에 아름답다고 하며, 또 어떤 불상은 인체의 비례미를 잘 표현해서, 또 어떤 불상은 인체의 비례미를 파격적으로 해체해서 등등. 그냥 읽어 내려갈 때는 그래, 그렇군하고 지나가지만 다시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래서 불상의 아름다움은 무엇인가 아리송해지는 것이다. 아름다움이란 형용은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인 것일까?

나는 항상 머리가 큰 것이 콤플렉스였는데 대학시절 불교유적답사를 하러 논산 관촉사에 갔다가 그 유명한 ‘가분수 대마왕’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을 만나게 됐다. 불교미술교과서에 따르면 이 부처님은 황금비례를 무시한 파괴미, 민중적 심상의 메시아를 표현한 대중성을 가져 아름다운 작품으로 평가된다. 그날 같이 답사 간 동기들이 대두 둘을 보고 놀리는데 넌더리가 났다. 나는 팔등신의 비례미, 대중 속에는 도저히 존재하지 않는 특별한 외모를 추구하는 사람인데 내 대두는 그것과는 달리 아름답지 못한 외모였고 그것이 싫었다. 혹 미학교과서에는 그것조차 현실과 이상의 괴리에 대한 고난과 역경의 드라마로서 아름다움이라 할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이 석조미륵보살상은 전혀 아름답지 않게 나의 심상 속에 결정화됐다. 그런데 경전과 논서를 헤집는 불교학자의 삶 속에서 미륵은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이름 아닌가? 내가 주로 보는 문헌들은 〈법화경〉과 그 주변의 주석서들인데, 〈법화경〉은 미륵보살의 질문으로 시작되는 경전이다. 즉 모든 〈법화경〉 책은 첫 장(章)부터 미륵, 그리고 미륵, 또 미륵을 적어놓고 있다. 미륵이란 두 글자를 볼 때마다 나는 석조미륵보살상이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괴로웠다. 미륵이라는 두 글자는 나의 대두를 연상시키는 번민이었다. 그리고 괴로움을 극복하는 숭고미 같은 건 찾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사찰 불교대학에서 〈법화경〉 강의를 하는 첫날 자조적으로 석조미륵보살상을 화면에 띄워놓고는 〈법화경〉을 시작하는 미륵보살도 대두고 〈법화경〉 강의를 하는 나도 대두니 나만치 〈법화경〉을 잘 설명할 사람도 없다고, 앞으로 한 학기 잘 들으시라고 한 적이 있다. 이 말을 하면서도 사실 수치스러웠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것일까. 그런데 학생들에게 연신 박수가 터지는 것이 아닌가? 내가 미륵보살을 닮은 대두라 환희심이 난다고까지 한 보살님도 계셨다. 그때 알았다. 아 나에게 이 석조미륵보살상은 실용미임을 깨달은 것이다.

우리나라의 국가유산급 예술품은 7~8할이 불교예술과 관련되어 있다. 그리고 조선 500년에서 이승만의 불교재산불용 등 그동안 끊임없이 약탈당해 온 사찰의 예술품들은 외부 박물관에서 그 맥락이 없이 그저 전시실에 내던져져 있다. 박물관에서야 내던져져 있다는 표현에 분개하겠지만 그들이 성상(聖像)을 위치시키면서 작법을 지었겠나, 불공을 드렸겠나 생각해본다면 불자가 된 입장에서는 부처님들을 자신들의 전시계획에 따라 이리 던졌다, 요리 던졌다하는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나는 이도 좋다고 생각한다. 40대의 미국 백인 여성이 부처님의 상호를 박물관이 아니면 언제 보겠는가? 그 인연으로 그녀는 반드시 다음 생에 성불할 것이다. 〈법화경〉의 소선성불이 이 내용이다. 박물관의 부처님은 너무나 실용적이게도 본인의 일대사인연을 수행하고 계신 것이다. 마치 내가 불경스럽게도 가분수라고 싫어한 미륵보살이 어느 날 나에게 꼭 필요한, 실용적인 보살님이었던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