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보배의 24번의 계절] 8. 곡우 _ 선암사로 향하는 길

봄 마감 후 여름 기다리는 시절, 생명 비가 손짓한다

2025-04-18     장보배 작가
선암사로 향하는 길은 아름답다. 부처님오신날을 앞두고 선암사 가는 길 옆 야생 차밭 위로 오색 연등이 이어졌다.

유유자적 달려가던 버스는 마침내 느리게 걷기 시작한다. 

4월이 되면, 호수에 맑은 물이 일렁이고 그 곁을 따라 분홍 벚꽃이 수십 리 가득 피어난 날이라면. 그런 곳에서라면 달리던 버스도 제 속도를 줄이고 느린 걸음을 걷기 시작하는 것이다.

봄이면 그런 일도 더러 일어나곤 하는 것. 밤 길었던 겨울을 지나 빛으로 온 이 계절은 마침내 생명의 비마저 손짓해 부른다. 6번째 계절, ‘곡우’의 시작이다. 

선암사 가는 길
순천으로 향하는 기차 안. 문득 사람들의 탄성에 고개를 들어보니 눈 앞에 펼쳐진 것은 저 멀리 섬진강을 따라 끝없이 이어진 벚꽃길이었다. 

이곳은 남쪽의 땅, 봄은 늘 이곳에서 먼저 시작되어 매일매일 더 높은 곳을 향해 전진하지 않던가. 전년보다 꽃 소식이 늦다 하지만, 발 빠르게 피어난 봄의 전령은 여전히 담대하고 화려하게 제 모습을 뽐내고 있었다. 

홀린 듯 시선을 빼앗긴 채 도착한 곳은 순천역. 그리고 오늘의 목적지는 바로 선암사다. 오래전 법정 스님이 사랑하신 매화가 있고, 뭇 문인들이 찬미하며 신선들조차 아꼈다는 천년의 고찰. 뚜벅이 여행자가 그곳을 찾기 위해선 순천역에서 선암사로 향하는 유일한 노선인 1번 버스를 타야 한다. 

순천만에서부터 도심까지 장대하게 흐르는 동천, 그 곁을 따라 벚꽃 흐드러진 뚝방길을 넘어 웃장, 아랫장의 국밥 내음 가득한 시장 풍경까지. 버스는 1시간에 걸쳐 순천의 진짜 얼굴과 두루두루 인사하며 힘차게 달린다. 

꽃을 따라서
운이 좋은 날이었다. 도심을 떠나 외곽을 달리던 버스는 저 멀리 상사호(上沙湖)와 분홍 구름 같은 벚꽃 군락지가 보이자 천천히 속도를 줄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노란 산수유, 향기 그윽한 매화, 진분홍 꽃봉오리가 고슬고슬 매달린 박태기나무와 철쭉까지. 조붓한 길을 따라 세상의 모든 꽃이 손을 내미는 그때, 버스는 마치 어린아이가 첫걸음을 떼듯 자분자분 걸으며 그곳을 만끽하기 시작했다. 달린다는 말보다 걷는다는 표현이 어울릴 만큼 느리게, 느리게. 

열린 창문 너머로 손을 뻗으면 꽃도 바람도 모두 손에 쥘 것만 같은 시간. 가차 없는 봄이 버스 안으로 밀려오던 길. 그 여정의 끝에 선암사가 있다. 

선암사를 찾은 것은 어느새 ‘곡우(穀雨)’가 코앞으로 다가온 덕분이다. 꽃도, 길도, 계절도 흐르고 흘러 모이는 곳. 한 편의 드라마를 본듯한 순천의 고운 풍경은 여기 선암사에서 새로운 절기와 함께 대미를 장식할 것이다. 

선암사 차밭은 인위적인 손길을 거두고 제 기운대로 자란 야생 그 자체다.

곡우와 차(茶)
곡우는 입춘으로 시작해 우수, 경칩, 춘분, 청명에 이어 봄을 상징하는 여섯 절기 중 가장 말미를 맡는다. 봄을 마감하는 동시에 입하로 시작되는 여름의 문을 여는 때. 그리고 그 문을 여는 키워드는 바로 비(雨)다. 

백곡을 여물게 하고 나무에 물을 오르게 한다는 봄비의 시간. 예로부터 ‘곡우물 마시기’라는 풍습에 따라 산다래나무와 자작나무, 박달나무의 수액을 채취했던 것도 바로 이즈음이라고. 곡식을 키우는 비가 내린다고 하지만 아직 논과 밭은 싹을 틔우기 전. 대신 이 절기의 풋풋한 생명력과 순수를 상징하는 존재는 따로 있다. 바로 ‘차(茶)’다. 

통일신라 시대부터 곡우에는 약수제를 지내고, 조정의 제관이 지리산 신령에게 다래차를 올리며 태평성대와 그해의 풍년을 기원했다고 전해진다. 

한국의 다성(茶聖)으로 평가받는 초의 선사는 자신이 쓴 ‘동다송(東茶頌)’에서 중국의 햇차 따는 시기에 대해 “곡우 5일 전이 가장 좋고, 5일 뒤가 다음으로 좋으며, 그 5일 뒤가 그다음으로 좋다”고 기록했다. 흔히 차 중에 최상품으로 치는 우전차 또한 곡우 전에 채취하여 이름을 우전차(雨前茶)라 하는 것이다. 또 봄에 딴 첫 찻잎이라는 뜻에서 첫물차라 부르기도 한다. 

인류와 함께한 차의 역사, 더불어 우리 민족의 차 문화 또한 이 절기와 함께한다. 그리고 그 가장 오랜 뿌리에 우리의 산사가 있다. 

차(茶)의 시간
지난 2018년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이라는 명칭으로 한국의 7개 사찰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선암사도 당시 등재된 사찰 중 하나다. 

그때 한국의 산사를 소개하는 설명문에는 ‘승가공동체를 지속하기 위한 울력을 수행의 한 부분으로 여겨 오늘날까지도 차밭과 채소밭을 경영한다’는 부분이 명시되어 있다. 이는 한국을 대표하는 고찰들의 차 재배가 불가분의 일상이었음을 설명한다. 

통일신라 시대, 도선국사가 창건한 선암사. 태고총림의 기풍과 함께 지켜온 수많은 보물과 문화재, 수백 년을 살아온 꽃과 나무들. 이곳은 사찰이자,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생명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과 함께 성지가 되어버린, 선암사의 야생 차밭이 있다. 

과거 도선 국사가 지금의 선암사 일주문 주변에 처음 차를 심고, 대각 국사가 칠전선원 뒤로 차밭을 일군 뒤 선암사는 한국불교의 다례 문화를 상징하는 한 축으로 자리 잡았다. 지금도 선암사를 둘러싼 저 조계산, 그리고 일주문 앞에는 흐르는 계곡물을 해자처럼 두른 신비로운 차 숲이 펼쳐져 있다. 

만약 일반적인 대규모 다원에서 볼 수 있는 잘 다듬어진 차나무의 모습에 익숙하다면, 선암사 차밭은 무심코 지나칠지도 모를 일이다. 이곳의 차나무는 인위적인 손길을 거두고 제 기운대로 가지를 뻗으며 자라난 야생 그 자체이기 때문. 

차의 맛과 향은 뿌리에서 비롯된다 했던가. 외래종 차나무가 얕은 뿌리로 인해 잦은 병충해로 쓰러지고, 하여 더 많은 비료와 농약 살포로 끝내 토양까지 병들게 하는 것. 이는 근 천 년 전 이 땅에 심어진 산사의 차나무와는 다른 세상의 이야기다. 

선암사 승선교 용머리는 불경한 것을 제압하고 불법 세계를 지킨다는 설이 전한다.

뿌리 깊은 나무
선암사를 비롯해 이 땅에 토착화된 산사의 야생 차나무는 그 뿌리가 1m가 넘도록 단단히 자리한다. 그렇게 뿌리 내린 차나무는 설령 불에 타더라도 반드시 다시 새잎을 낸다는 것이다. 

거름을 주고 키워 두고두고 잎을 생산하거나, 곡우 전에 부러 찻잎을 따 별도의 우전차를 만드는 대신, 선암사는 절기에 맞춰 단 한 번의 제다(製茶)를 마친다. 

같은 규모의 차밭에 비해 수확량은 1/10밖에 되지 않지만, 이런 방법을 고수하는 것은 불가가 자연을 대하는 겸허와 자비의 실천이리라. 한 잔의 차에서 선을 구하고, 그 정수 안에서 삶을 일치시키려 했던 다선일여(茶禪一如) 사상은 지금도 고고히 흐른다. 

선암사를 향하는 길은 아름답다. 저 유명한 선암사 승선교의 용머리는 모든 사악하고 불경한 것을 제압하고, 불법의 세계를 지킨다고 했던가. 그 불패의 비호 안에서 향기 어린 찻잎도, 깨달음을 향한 간절한 바람도 조용히 자라난다. 

여름이 오기 전 가장 먼저 딴 찻잎은 부처님 전에 오르고, 선암사 가는 길은 차향으로 가득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