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선일의 불모열전 시즌2] 4. 응원(應元·應圓) 스님
임진왜란에 소실된 금산사 일으켜 세운 佛母 호남 중심으로 활동했던 조각승 송광사, 화엄사 등서 불상 조성 수문 스님 등과 금산사 불사 주도 사찰 불교경전 간행 시주로 참여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파괴된 사찰을 중건하면서 사찰에 주도적으로 불상을 제작한 조각승은 현진(玄眞)·원오(元悟·圓悟)·수연(守衍)·법령(法靈)·응원(應元) 스님 등 20여 명에 이른다. 이 조각승들이 어느 사찰에 거주했는지 관련 문헌이 남아 있지 않아 정확히 알 수 없고 불상을 조성한 지역을 중심으로 추정할 뿐이다.
이 가운데 응원 스님은 〈금산사사적기(金山寺事蹟記)〉에 “주지인 장로 지훈(智訓)이 일을 계승하여 꾸리고, 대사 천택(天澤), 용면(龍眠)대사 응원(應元) 등이 법고를 두드려 대중을 모으고 불사에 힘을 쏟았다(寺中住持長老智訓幹蠱大士天澤龍眠大士應元等擊集衆)”와 “선조 30년에 왜구가 육지로 쳐들어와 마음대로 날뛰며 백성들이 살해하였다. 사찰과 불상 그리고 나머지 기물(器物)들이 한꺼번에 모조리 불에 타버렸다. 산승(山僧) 지훈(智訓), 덕행(德行), 석준(釋俊), 수문(守文), 천택(天澤), 응원(應元), 학연(學蓮), 태전(太顚), 운근(雲根), 심윤(心允), 경일(敬日), 문익(文益), 보환(寶還), 인언(印), 지수(智守), 천주(天珠) 등이 함께 형제처럼 서로 도와 이 일을 마음 속에 새기고 부지런히 힘써 (불탄 절을) 복구하고 일을 처리하였다(大明萬歷二十五年丁酉之秋 我宣祖大王三十年倭寇陸梁民物虔劉(殺害也) 寺與像設餘殘器物一時燒盡山之人智訓德行釋俊守文天澤應元學蓮太顚雲根心允敬日文益寶還印智守天珠等率兄弟壎菜相應念玆在玆首工藏事)”는 기록을 통해 김제 금산사에 거주한 스님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1600년부터 1635년까지 김제 금산사 중건을 주도한 석준(釋俊)·응원(應元)·태전(太顚) 스님 등은 17세기 전반에 불상 제작을 주도한 조각승들이다.
조각승 응원 스님은 1600년부터 수문 스님, 지훈 스님과 금산사 중건을 주도하고, 1613년 11월에 경주 백운암 목조보살좌상(전주 관음사에 봉안됐다가 현 위치로 이운)을 만들면서 처음으로 불교조각계에 이름을 드러냈다. 또한 1614년 2월에 각심(覺心) 스님, 인균(印均) 스님과 무안 목우암 목조아미타여래삼존상(아미타여래, 관음보살, 대세지보살)을 제작한 후, 4월 논산 쌍계사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에 각수(刻手)로 참여하고, 7월 부여 오덕사 〈예념미타도량참법(禮念彌陀道場懺法)〉 간행에 시주자로 동참하였다.
응원 스님은 1615년에 태전(太顚)과 김제 금산사 독성상(獨聖像)을 만들고, 1622년 3월에 옥명(玉明) 스님, 현진 스님, 수연(修衍) 스님, 승일 스님 등과 의왕 청계사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간행에 시주를 했다.
그해 5월에는 광해군의 왕비인 장열왕후가 발원한 자수사(慈壽寺)와 인수사(仁壽寺)에 현진·응원·수연·법령(法玲)·청허(淸虛)·인균·승일 스님 등이 비로자나불(2존), 석가여래(3존), 노사나여래(2존), 미타여래(2존), 관음보살(1존), 대세지보살(1존) 등 11존의 불상과 5점의 불화를 조성했다. 현재 비로자나불은 국립중앙박물관, 석가여래좌상은 서울 칠보사와 안동 선찰사에 봉안되어 있다.
응원 스님은 수화승으로 1624년에 순천 송광사 광원암 목조아미타여래좌상, 송광사 응진전 목조석가여래삼존상과 소조나한상 등을 조성하고, 1628년에 순천 송광사 소조사천왕상을 제작하였다. 또한 응원 스님은 1634년 3월부터 1635년 8월까지 청헌(淸憲) 스님과 함께 구례 화엄사 목조비로자나삼신불좌상(국보)을 만들었는데, 본존인 비로자나불과 석가불은 청헌 스님을 도와 부화승으로, 좌협시인 목조노사나불좌상은 수화승으로 조성했다.
이런 문헌을 바탕으로 응원 스님은 1570년 전후에 태어나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거친 후, 김제 금산사 중건을 지훈 스님, 수문 스님 등과 주도하고, 1610년대와 1620년대 각민 스님이나 현진 스님 등이 주도한 불상 제작에 부화승으로 참여하다가 1620년대 중반에 수화승으로 명산대찰 전각에 불상을 제작한 당대 최고의 실력을 갖춘 조각승이다. 또한 1630년대 중반 왕실에서 발원한 구례 화엄사 대웅전 목조비로자나삼신불좌상을 청헌 스님과 조성했다.
응원 스님의 계보는 응원(1613~1635, 이하 활동 연대)→인균(印均·仁均, 1614~1662)·석삼(釋森·釋參, 1623~1640)·회감(懷鑑·懷鑒, 1633~1666)→천신(天信, 1654~1670)→ 색난(色難·色蘭, 1662~1730)·충옥(忠玉·玉, 1668~1705) 등으로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조각승 계보이다.
응원 스님이 수화승으로 만든 순천 송광사 감로암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높이 49㎝의 중소형 불상으로, 1624년 9월 조계산 광원암에서 고한(高閑)·심정(心淨)·사순(思舜)·인균·석삼·종해(宗海)·성종(性宗)·천효(天曉)·봉익(鳳翼) 스님이 제작했고, 송광사 응진전 목조석가여래좌상과 소조나한상도 함께 조성했다.
감로암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타원형의 단아한 상호와 안정된 신체비례를 가지고 있다. 좁고 높은 타원형의 머리에는 동일한 크기의 굵직한 나발(螺髮)을 촘촘히 부착하였으며, 육계(肉)가 불분명하고, 정상계주(頂上珠)와 중앙계주(中央珠)를 표현했다. 이목구비는 크고 뚜렷한 편으로, 두툼한 눈두덩에 작게 내리뜬 눈, 곡선의 눈썹은 콧대와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코는 오뚝하며, 도톰한 입술이 미소를 머금고 있다. 목에는 자연스러운 삼도(三道)가 새겨져 있다.
오른손은 가슴 높이로 치켜들고 엄지와 중지의 끝을 맞대고, 왼손은 무릎 위에 자연스럽게 올리고 있다. 착의 형식은 오른쪽 어깨를 대의가 완전히 덮고, 가슴 왼쪽에 수직과 좁은 V자형 주름이 접혀 있으며, 왼쪽 측면 어깨에서 팔꿈치로 흘러내린 대의 자락이 넓게 펼져져 늘어져 있다. 하반신에 걸친 대의자락은 좌우로 자연스러운 옷주름이 펼쳐지고, 옷자락 끝이 대좌로 흘러내려 물결 모양을 이룬다. 가슴을 덮은 승각기는 수평으로 단순하게 접혀 있다.
또한 1635년에 조성한 구례 화엄사 대웅전에 봉안된 불상은 대좌를 포함해 총 3m가 넘는 대형불상으로, 오른손으로 왼손을 감싼 지권인(智拳印)의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을 중심으로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한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과 상품중생인(上品中生印)을 취한 노사나불(盧舍那佛)로 이루어진 삼신불이다.
이 삼신불은 임진왜란 때 소실된 화엄사를 재건(1630~1636)하면서 대웅전에 봉안하기 위해 1634년부터 1635년까지 조성한 것이다. 당시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을 역임한 벽암 각성(碧巖覺性, 1575~1660) 스님의 주관 아래 선조의 여덟 번째 아들 의창군 등 다수의 왕실 상궁 등 1,320명이 시주자로 참여한 대형 불사이다. 목조비로자나삼신불좌상은 17세기 전반을 대표하는 조각승이 만든 대작(大作)으로, 조각으로 유일하게 삼신불(비로자나불-노사나불-석가모니불)을 제작하였다는 측면에서 불교조각사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매우 높다.
응원 스님이 수화승으로 만든 목조노사나불좌상은 청헌 스님이 수화승으로 제작한 목조비로자나불좌상과 목조석가여래좌상과 달리 화려한 보관(寶冠)을 쓴 보살형이다. 볼살이 많아 각진 얼굴에 가늘게 뜬 눈이나 두툼한 눈두덩, 대의자락의 처리 등에서 1624년 제작한 송광사 감로암 목조아미타여래좌상과 유사하면서 더 간략하고 단순하게 처리했다.
응원 스님은 제자인 인균 스님과 임진왜란 중에 소실된 김제 금산사, 구례 화엄사, 순천 송광사 등의 주요 전각에 불상을 제작한 것을 보면, 조선 후기 불교계를 대표하는 고승(高僧)인 부휴선수(浮休善修, 1543~1615)의 문도(門徒)에 속한 스님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