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불논단] 너와 나, 모두 도움 되는 대화를

정치·종교 논쟁 민감한 韓사회 감정으로만 상대와 대화하기 때문 바른 논쟁은 사회 발전을 이끈다

2025-04-14     무상 법현 스님/ 열린선원장, 보국사 주지

지난해부터 얼마 전까지 한국사회는 큰 홍역을 앓았다. 대통령이 계엄령을 내렸고, 이에 군경은 국회 장악을 시도했으나 시민들이 이를 가로 막았다. 야당과 일부 여당 국회의원들은 담장을 넘어 국회의사당으로 진입해 비상국회를 열고 계엄을 해제했다. 

이후에도 계엄과 탄핵 관련 여론이 첨예하게 맞물리면서 대한민국은 말 그대로 반쪽이 났다. 그렇게 123일이 지났고, 헌법재판관들의 선고로 4월 4일 11시 22분 윤석열 대통령은 파면됐다. 이제 그는 일반인으로 돌아가 그와 부하들이 일으킨 행위에 관한 재판을 받게 됐다. 

한국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태에 대해 지구촌 가족들은 어떻게 보았을까? 주변에서 만나는 외국인 도반들과 이야기를 나눠보니 흥미롭게 지켜보았던 것 같다. 이들은 “교과서로는 볼 수 없는 민주주의와 정치, 그리고 책임자와 시민들의 행동을 살펴 볼 기회였다”고 했다. 이제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정치와 종교 문제를 대화 주제로 올리는 것은 ‘싸움의 지름길’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정치와 종교 문제만큼 중요한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 이야기를 빼고 사회 전반의 문제 대해 대화를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정치와 종교 문제를 이야기하기 어려운 것은 해당 주제를 이성이 아닌 감정으로 대하기 때문이다. 나와는 다른 주장을 가진 사람의 이야기를 듣지 않으려 하고, 틀렸다고만 생각하는 것은 애시당초 대화와 토론의 출발점에 서 있지 못하는 것이다. 당장의 공감과 이해가 어렵다면, 우선 경청이라도 해야 하지만,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우리는 스스로가 논리적으로 말하고 행동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는 논리를 말하기 보다는 감정을 섞어 말하게 된다. 서로가 서로에게 교감하고 공감할 때 비로소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1873년 스리랑카 ‘파아나두라’라는 마을에서 1만명이 넘는 청중 앞에서 불교의 스님과 기독교의 목사가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 이를 ‘파아나두라 대논쟁’이라고 한다. 당시 스리랑카의 시대적 배경은 네덜란드 식민지가 끝나고 영국의 지배(1796~1948)에 들어간 시기다. 지배자들은 스리랑카의 국교인 불교의 활동을 제한하고 기독교로 개종을 강요했다. 에에 모호티왓테 구나난다 스님이 토론을 제안했고, 이를 수록한 기독교계에서는 데이비드 데 실바 목사가 논쟁에 참여했다. 

이들은 영혼의 문제부터 육체와 정신, 교주의 지혜, 죽음, 경전의 신뢰성 등에 대해 논의했고, 결

국에는 불교의 승리로 끝났다. 두 종교인의 논쟁은 날카로운 이성을 바탕으로 이뤄졌고, 논쟁 후에도 어떠한 폭동과 갈등도 없었다. 이 논쟁은 현재까지 스리랑카가 불교국가로 남을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 

한국불교의 ‘화쟁’도 갈등을 풀어가는 대화법이다. 불교의 대화법은 목표가 명확하다. 너와 나, 우리 모두가 도움되는 대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