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일야의 詩, 불교를 만나다] 7. 나태주의 ‘바람 부는 날’

그대가 아프면 나도 아픕니다 ​​​​​​​ 바람 부는 날 숲속에 가보면 이 나무, 저 나무 모두 흔들려 둘은 상호 존재 이유이자 근거 모든 존재 연결됐다는 깨달음서  구현되는 불교적 실천이 ‘자비’

2025-04-11     이일야/ 전북불교대학장
해당 삽화는 생성형 AI를 통해 제작됐습니다.

한 사람이 한사람이다
언젠가 한 학인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불교가 뭐냐는 질문을 지인에게 받았는데, 대답을 못 해 난감했다는 것이었다. 적지 않은 시간 절에 다니고 불교대학에 입학해 공부했어도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면서 이런 질문을 받을 때 한마디로 말할 수 있는 모범답안 같은 것이 없는지 물었다. 그래야 좀 더 쉽게 전법을 할 수 있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아마 많은 불자들이 공감하는 문제일 것이다.

실제 ‘불교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으면 사람에 따라 답변도 매우 다양하다. 누군가는 나쁜 짓 하지 않고(諸惡莫作) 착하게 사는 것(衆善奉行)이 불교라고 답한다. 고통에서 벗어나 행복을 얻는 것(離苦得樂)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그저 마음 하나 깨치는 것이 불교라는 선불교적인 답변도 있다. 어찌 보면 듣는 사람을 배려한 답변일 수 있지만, 불교 전체를 관통하는 대답으로는 조금 허전한 느낌이 든다.

그래서 쉬우면서도 불교의 핵심을 담은 답변이 없을까 고민해 보았다. 그 결과 불교란 한마디로 동체자비(同體慈悲)의 가르침이라고 답하는 것이 적절하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동체란 존재하는 모든 것은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연기의 진리를 의미한다. 이러한 깨달음이 있을 때 상대가 기쁘면 나도 기쁘고(慈), 상대가 슬프면 나도 슬픈(悲) 진정한 자비행이 가능하다는 것이 불교의 일관된 입장이다. 동체자비는 일반인에게도 낯설지 않고 깨침과 자비의 가르침이라는 불교의 본질을 함축하고 있어서 더없이 좋은 답변이라는 생각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나태주 시인의 ‘바람 부는 날’이라는 시를 읽다가 문득 동체자비와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알려진 것처럼 그는 ‘풀꽃’이라는 시로 유명한 작가다. 잠시 감상해 보기로 하자.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 너도 그렇다.”

짧으면서도 인상적인 문장으로 사랑의 본질을 전하고 있는 멋진 작품이다. 아무리 사랑해도 자세히 보지 않으면 상대가 얼마나 예쁜지 잘 알 수 없다. 오래 보는 일도 마찬가지다. 누구나 그렇다.

나태주는 197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대숲 아래서’라는 작품으로 등단하였다. 당시 그는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면서 시를 쓰고 있었다. 등단 이후 〈누님의 가을〉을 비롯하여 〈사랑이여 조그만 사랑이여〉, 〈풀꽃〉, 〈사랑만이 남는다〉 등 수많은 시집을 발표하였다. 〈꽃을 던지다〉와 〈작은 것들을 위한 시〉 등 산문집도 여러 편이다. 한국시인협회상과 정지용문학상, 소월시문학상 대상 등 수상 경력도 화려하다. 

주위를 보면 시가 어렵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시인은 자신이 바라본 세계를 표현하기 위해 다양한 상징을 동원하는데, 시어에 담긴 의미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이럴 때 읽기 편하고 마음에 쏙 들어오는 시를 만나면 무척이나 반갑다. 오늘의 주인공 나태주 시인의 경우가 그렇다. 그의 시는 읽기 쉽고 편하면서 때로 진한 감동을 선사한다. 사람들이 중시하는 사랑이나 진실 등의 가치를 쉬운 언어로 의미 있게 전하고 있다. 시인의 가장 큰 장점이자 그가 대중에게 사랑받는 이유라 할 것이다.

오늘의 시 ‘바람 부는 날’은 2022년 출간된 시집 〈한 사람을 사랑하여〉에 실린 작품이다. 출판사 소개 글에 의하면 여기에서 말하는 한 사람은 또 다른 의미가 있다고 한다. 즉 한 사람을 붙여 쓰면 ‘한사람’이 되는데, 결국 ‘같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렇게 보면 우리는 모두 누군가에게 ‘한 사람’이 되고, 서로 연결되어 ‘한사람’이 되는 셈이다. 불교의 본질인 연기(緣起), 동체(同體)와 뜻이 서로 통한다. 

모든 존재는 홀로가 아니라 하나로 연결되었다는 깨달음에서 나오는 실천이 바로 자비다. 불교를 한마디로 동체자비의 가르침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시를 직접 감상해 보자.

“두 나무가 서로 떨어져 있다 해서 /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다 / 두 나무가 마주 보고 있지 않다고 해서 / 서로 생각하지 않는 건 아니다 / 바람 부는 날 홀로 / 숲속에 가서 보아라 / 이 나무가 흔들릴 때 / 저 나무도 마주 흔들린다 / 그것은 이 나무가 저 나무를 / 끊임없이 사랑한다는 표시이고 / 저 나무 또한 이 나무를 / 쉬지 않고 생각한다는 증거 / 오늘 너 비록 멀리 있고 / 나도 멀리 말이 없지만 / 우리가 서로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고 / 서로 생각하지 않는 건 아니다.”

이 나무와 저 나무는 ‘不二’
“아프냐? 나도 아프다.”
2003년 MBC에서 인기리에 방영된 드라마 ‘다모’의 유명한 대사다. 상대를 너무 사랑하기에 그녀가 아프면 내 의지와 관계없이 저절로 아프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나와 대상이 하나라는 인식이 있을 때만 나올 수 있는 감정이다.

마치 어린 자식이 아프면 부모가 아픈 것처럼 말이다. 상대가 나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면 이런 마음은 나오지 않는다. 네가 아프니까 내가 아픈 것은 상대를 사랑한다는 강력한 증거가 된다.

이러한 사랑을 불교에서는 자비라고 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자(慈)는 상대가 기쁠 때 나도 기뻐하는 것이며, 비(悲)는 상대가 슬플 때 함께 슬퍼하는 것을 의미한다. 자비는 서로가 연기적인 존재라는 것을 전제할 때 나올 수 있는 감정이다. 그런데 아무리 미워하는 관계라도 상대에게 불행한 일이 생기면 슬퍼할 수는 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상대의 불행에 대해서는 비교적 관대하기 때문이다.

반면 가까운 사이라 해도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아닌 이상 상대의 기쁨에 대해 같은 마음으로 기뻐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겉으로는 기뻐하는 것처럼 행동해도 무의식에서는 부러움이나 시기, 질투 등의 감정이 작동하는 것이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이유가 있는 셈이다. 상대의 행복에 대해 인색한 것 역시 인간의 본능이다.

이처럼 진정한 자비, 사랑은 너와 내가 둘이 아니라는 인식이 있을 때 나온다. 성경에서도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하지 않았던가. 참다운 사랑은 너와 내가 한 몸(同體)이 될 때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이를 기준으로 삼으면 내가 상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어렵지 않게 판단할 수 있다. 상대가 불행할 때 얼마나 슬픈지가 아니라, 상대가 행복할 때 내 마음이 얼마나 기쁜지 보면 된다는 것이다.

나태주 시인은 두 나무가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려면 바람 부는 날 홀로 숲속에 가보라고 권한다. 시인이 지적한 것처럼 이 나무가 흔들릴 때 저 나무도 흔들리는 것은 둘이 끊임없이 사랑한다는 분명한 증거가 된다. 비록 멀리 떨어져 있다 해도 말이다. 이 나무와 저 나무는 둘이 아니기 때문에 네가 아프면 내가 아프고 네가 기쁘면 나도 기쁜 것이다. 서로서로 존재 이유이자 근거가 되는 셈이다. 이처럼 누군가를 지극히 사랑하면 말이나 행동, 생각 등의 변화가 나타난다.

“세상에 와서 / 내가 하는 말 가운데서 / 가장 고운 말을 / 너에게 들려주고 싶다 / 세상에 와서 / 내가 가진 생각 가운데서 / 가장 예쁜 생각을 / 너에게 주고 싶다 / 세상에 와서 / 내가 할 수 있는 표정 가운데 / 가장 좋은 표정을 / 너에게 보이고 싶다 / 이것이 내가 너를 / 사랑하는 진정한 이유 / 나 스스로 네 앞에서 가장 /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소망이다.”

나태주의 ‘너를 두고’라는 시다. 사랑하니까 가장 고운 말과 가장 예쁜 생각, 그리고 가장 좋은 표정을 보이고 싶은 것이다. 상대를 사랑하지 않으면 결코 나올 수 없는 표정과 말이다. 이처럼 사랑하는 연인 앞에서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소망이 절로 생긴다. 어쩌면 사랑이 좋은 사람을 만드는 것은 아닌지 모를 일이다. 좋은 사람과 좋은 음식을 먹으면서 좋은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큼 즐거운 일이 또 있을까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유유상종(類類相從)이라 한 것처럼 사람은 결이 비슷한 이들끼리 모이는 법이다.

비록 부모와 자식, 연인처럼 가까운 관계가 아니어도 우리는 누군가의 슬픔과 기쁨에 함께 반응하면서 살아간다. 최근 인기를 끌었던 ‘폭싹 속았수다’에 나오는 대사다.

“유채꽃이 혼자 피나. 꼭 떼로 피지. 혼자였으면 골백번 꺾였어.”

유채꽃은 혼자가 아니라 함께했기에 그 세찬 바람을 이겨내고 아름답게 피는 것이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다. 혼자였으면 어찌 자식 잃은 슬픔을 이겨낼 수 있었겠는가. 힘든 시간을 함께 나눈 이웃이 있었기에 그 모진 풍파를 견뎌낸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공명(共鳴), 즉 함께(共) 울리는(鳴) 마음의 소리다. 

이런 공감의 소리가 널리 울려 퍼지는 세상이 다름 아닌 불국토 아닐까. 이곳에 사는 한 사람은 그저 나와 관계없는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 더불어 사는 한 몸(同體)이다. 제주를 아름답게 수놓은 유채꽃과 바람에 흔들리는 숲속 나무에도 동체자비의 가르침은 작동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