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원섭의 불교, K-드라마로 만나다] ‘폭싹 속았수다’
역사를 살아내온 우리 모두 ‘장하다’ ‘등 두드려주는 손’은 세상 모든 부모 사랑 상징 가치 알아준 광례·관식 덕에 애순 세상은 꽃밭 아픈 현대사와 문학 감성 담긴 역사의 ‘서사시’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가 처음 공개될 즈음, 올해를 대표하는 드라마로 꼽힐 것 같은 예감이 든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기억하실지? 막상 16부까지 드라마 전체가 공개되고 나니 예상보다 훨씬 폭발적인 반응이다. ‘한국 드라마 역사상 최고의 드라마’라거나 ‘최애 인생 드라마’라는 평가가 쏟아졌고 그 여운도 길게 이어지고 있다. 2025년 3월 한 달 넷플릭스 월간 사용자 수가 1400만이 넘은 것은 덤. 〈글로리〉가 공개되었던 2023년 1월 이후로 두 번째라고 한다.
〈폭싹 속았수다〉는 제주에서 태어난 1951년생 오애순(배우 이지은/문소리)의 70년 인생을 사계절로 풀어낸 드라마이다. 그리고 애순의 곁에서 사계절을 함께 살아낸 남편 양관식(배우 박보검/박해준)의 이야기이다. 드라마는 이 둘의 서사를 중심으로 큰딸 양금명(배우 이지은)의 이야기를 비중있게 다루면서도 애순의 가족과 관식의 가족, 해녀 3인방과 부상길(배우 최대훈) 가족까지 거의 모든 등장인물의 이야기를 골고루 담아내고 있다.
지난번에 작가의 전작인 〈동백꽃 필 무렵〉을 거론하면서 “평범한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기적 같은 이야기”이자 “사람이 사람에게 기적이 될 수 있다”는 진실을 알려주는 드라마라고 했는데 이런 기조는 〈폭싹 속았수다〉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너나 할 것 없이 애순이 부부를 보며 우리네 부모를 떠올리고, 금명이를 보며 나 자신을 돌아보게 할 만큼 우리 모두의 이야기를 덤덤하게 풀어놓으면서, “덕 쌓고 살어라. 덕도 업도 고대로 자식들한테 물려준다”거나 “제비의 박씨는 운이 아니라 흥부가 따낸 포상”이라며 선한 행동의 결과가 기적이 되어 다가오는 불교적인 도리를 전한다.
〈동백꽃 필 무렵〉 ‘엄마, , mother’ (15회) 편을 보면 까불이에게 죽임을 당할 뻔한 동백을 엄마인 정숙이 구해내는 장면이 있는데, 〈폭싹 속았수다〉에서도 인신매매를 당할 뻔한 애순을 엄마의 촉으로 구하는 광례의 모습이 등장한다. 이러한 모성은 애순에게도 고스란히 이어진다. 연탄가스에 중독된 금명을 제주도에서 날아온 애순이 살리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폭싹 속았수다〉에서는 어머니인 애순 못지않게 아버지인 관식도 금명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필사적이다. 작은 배의 선장으로 하루 다섯 끼를 먹어야 할 정도로 고된 노동을 하면서도 힘들다는 내색 한번 없이 자식을 위해 살아온 관식은 언제나 “힘들면 빠꾸해. 아빠 항상 여기 있을게”라며 금명을 응원한다. 어떤 순간에도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 주는 가장의 모습과 부모의 사랑을 전면으로 내세운 점에서 〈동백꽃 필 무렵〉과 구별되는 〈폭싹 속았수다〉만의 특징이 있다.
〈동백꽃 필 무렵〉에 주인공 동백의 본래 모습을 꺼내어주고 자존감을 북돋아 준 용식이 있다면 〈폭싹 속았수다〉에는 애순을 향한 사랑만으로 똘똘 뭉친 팔불출 무쇠 관식이 있다. 어린 시절, 대통령이 되겠다는 애순의 꿈을 듣고 자기는 ‘영부인’이 되겠다고 선언한 관식은 애순이 자신의 본모습을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도록 평생 한순간도 흔들림 없이 애순의 든든한 뒷배가 되어 주었다. 이런 부모의 모습을 보고 자란 금명에게는 새삼 자신의 가치를 발견해줄 용식이나 관식이 필요 없다. 자신처럼 다른 사람의 가치를 제대로 볼 줄 아는 사람을 찾을 뿐이다. 금명의 남편이 마마보이 영범(배우 이준영)이 아니라 어머니에게 존중받고 자란 충섭(배우 김선호)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소녀 애순이 소년 관식에게 한 “소 죽은 귀신이 씌었나 뭔 놈의 게 지껄이지를 않는다”는 말을 금명이 자신의 첫사랑인 영범에게 똑같이 하는 장면 때문에 시청자들이 잠시 헷갈리긴 했지만, 사실 무쇠 같은 관식의 본질은 “지껄이지를 않는” 데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애순을 위해서라면 집안의 위계질서를 깨고 애순이 있는 밥상으로 돌아앉을 줄 아는 기개와 과감히 분가해서 가부장적인 할머니와 어머니에게서 애순을 떼어놓을 줄 아는 용기이다. 부잣집에서 자라 말만 앞서는 영범과 달리 뱃멀미를 하면서도, 관식의 권하는 술에 취해서도, 금명이 걱정되어 화장실까지 따라가는 충섭. 딸이 “상을 차리는 사람이 아니라 상을 막 엎는 사람이 되었음 좋겠”다던 애순의 바람은 금명이 영범을 버리고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해주는 충섭을 택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서울대를 나와 대기업에 다니는 금명을 향해 국도 제대로 못 뜬다며 핀잔을 주고, 격이 맞지 않는 결혼이니 금명이를 말려달라던 영범의 어머니와 달리 “가을에 친정집에 가 제일 좋은 감을 따다가 드릴 생각하며 한 계절 내내 공을 들였습니다. 예쁜 금명이를 보듯 매일 보고 또 보며 만들었습니다. 저는 금명이가 그렇게도 예쁩니다”라는 충섭 어머니의 카드를 보며 눈시울을 붉힌 것은 애순만이 아니라 전국 모든 딸을 둔 어머니들이었을 것이다.
〈폭싹 속았수다〉의 핵심은 ‘등 두드려주는 손’이다. 관식은 광례의 장례식에서도, 젊은 날 힘들어하던 어느 날에도, 자신의 죽음을 앞둔 어느 날에도, 슬퍼하는 애순의 등을 다정하게 두드려준다. 그 두드려주는 손 너머로는 “웡이 자랑”이라고 읊조리는 자장가가 함께 들려온다. 드라마에서 애순의 등을 두드려주며 자장가를 불러주는 장면이 처음 등장한 것은 광례가 애순에게 유언을 할 때였다. 그러므로 등 두드려주는 손은 애순에게 어머니와 같다. 애순이 관식에게 “두드려”라고 말하는 것은 광례의 손길을 느끼고 싶어하는 애순의 마음인 동시에, 관식이 광례를 대신하여 인생의 지지자가 되었음을 보여주는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나아가 “사는 내내 우리 등만 두드려준 아빠”라는 금명의 내레이션을 통해 ‘등 두드려주는 손’이야말로 드라마가 전하고자 하는 세상의 모든 부모의 사랑을 상징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애순은 유난히 꽃을 좋아한다. 옷도 꽃무늬, 양말도 꽃무늬, 핀도 꽃핀, 온 천지가 꽃이다. 또 평생 시인을 꿈꿨던 오애순의 시집이 출간되고 나서는 “칠십 년짜리 꽃동산”이라고 애순의 입으로 직접 말하기도 한다. 내가 가진 가치를 충분히 알아주고 응원해주면 그곳이 바로 꽃밭이라는 메시지다. 그러니 애순의 가치를 존중하고 응원하는 광례와 관식과 가족 덕분에 애순의 세상은 온통 꽃밭이었고, 애순의 수만의 날들이 온 천지가 꽃밭인 봄이었다.
애순의 시 〈ㅊㅅㄹ〉에서도 “그래서 내 맘이 만날 봄인가”라고 하고 시집의 표지에도 보이는 〈오로지 당신께〉에서도 “당신 덕에 나 인생이 만날 봄이었습니다”라고 한다. 드라마의 오프닝 주제곡 제목이 〈봄〉이고, 금명이 딸 이름도 ‘새봄’인 것도 그래서이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는 1951년생 주인공을 통해 우리의 아픈 현대사를 고스란히 담아내면서도 적절한 웃음과 문학적 감성을 덧붙인, 그야말로 역사의 ‘서사시’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역사를 살아내온 우리 모두에게 “미안함과 감사, 깊은 존경을 담아, 폭싹 속았수다”라며, 그동안 폭싹 속았으니 ‘장하다’고 위안과 격려의 말을 함께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