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보배의 24번의 계절] 7. 청명 _ 경주 길을 걷다(2)
하늘이 밝아지는 생명의 절기, 다시 봄이 돌아온다
태양의 황경이 0°를 이루었던 지난 절기. 춘분은 그렇게 겨울로부터 태양의 힘을 돌려받아 빛의 계절을 열었다. 봄의 문이 열리는 그 0의 선에서 태양은 다시 힘차게 발을 구르고, 마침내 황경 15°에 다다르는 시간. 다섯 번째 계절, 청명(淸明)이 시작된다.
청명과 한식
4월은 청명과 함께 문을 연다. 하늘이 맑고, 밝아지기 시작한다는 이 절기에는 열린 하늘 틈으로 일조량이 많아지면서 기온이 오르기 시작한다.
일 년의 24절기 중, 본격적인 농사력을 셈하는 것도 청명부터다. 청명 전후로 논과 밭의 흙을 고르고, 비로소 봄 밭갈이가 시작되는 것이다.
“삼월이라 모춘이니 청명곡우 절기라네/ 봄 햇살은 다양하며 만물이라 화창하니/ 백화는 난만하고 새소리는 각색이네.”
〈농가월령가〉 3월령에 전해지는 이 절기의 모습은 이토록 해사하다.
청명과 함께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이 바로 우리 민족의 4대 명절 중 하나인 ‘한식’. 동지로부터 104일째 되는 날이 청명, 105일째인 바로 그다음 날이 바로 한식이기 때문이다. 절기와 세시풍습이란 자연의 모양새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니, 하루 차이인 청명과 한식의 풍경도 손잡은 아이들 마냥 하나와 다름없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따르면 청명이 다가올 즈음 버드나무와 느릅나무를 비벼 새 불을 일으켜 임금에게 바치고, 임금은 다시 이 불을 문무백관과 360 고을의 수령에게 나누어준다. 이를 ‘사화(賜火)’라 하는데, 수령들은 한식날 다시 이 불을 백성에게 나누어주는 것이다. 백성들은 이 사화의 시간 동안 불을 쓰지 못했는데, 새 불을 받기까지 밥을 지을 수 없어 미리 익혀둔 음식이나 찬밥을 먹어 이날을 한식(寒食) 혹은 숙식(熟食)이라 불렀다는 것.
이 절기의 가장 도드라진 특징은, 과거 옛사람들이 이 시기 빛과 양기가 강해지는 것을 받아들임과 동시에 그 위험성 또한 인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빛은 신성이며, 귀한 만큼 어려워해야 할 경외의 대상이었다.
고대로부터의 경고
아마도 한식의 유래로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춘추시대 인물인 개자추(介子推)의 설화일 것이다. 망명해 있던 진나라 공자 중이를 위해 헌신했던 개자추. 그는 훗날 자신의 공이 잊혀지자 분개한 마음에 산으로 은둔하는데, 뒤늦게 그 사실을 안 중이가 개자추를 산 밖으로 끌어내려 불을 냈지만 끝내 나오지 않고 목숨을 버린다. 그런 개자추를 기리기 위해 불을 쓰지 않고 찬 음식을 먹는 한식이 시작되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그것은 진나라 시대의 일, 실은 그보다 오랜 상고 시대부터 금화(禁火)와 개화(改火)의 풍습은 이어지고 있었다.
고대 사회에서는 모든 사물이 생명을 지니며, 생로병사의 과정을 거친다고 믿었다. 이런 사상은 불에도 투영이 되어 오래된 불은 잠재우고, 새로운 불을 켜 새 생명의 기운을 얻는 의식을 반복해 온 것이다. 이후 별자리를 읽고 길흉화복을 점치기 시작한 때부터는 청명과 한식에 불을 끄는 의미는 더욱 심오해진다.
동지 후 105일째 되는 날, 별자리 28수 중에서도 화의 기운이 거센 ‘대화(大火)’가 그 기운을 돋우는 상극의 자리에 들어선다. 이런 이유로 옛 중국에서는 2월 무렵부터 불을 관리하는 도감을 두고 화마를 경계했던 것.
어디 그뿐이랴. 조선 시대, 우리 역사에 큰 변화를 일으킨 사건 또한 바로 이즈음에 일어난다.
1426년 음력 2월 26일. 세종대왕 즉위 8년에 화적이 지른 방화로 한양에 대화재가 일어났다. 건조한 땅에 강한 서북풍이 더해져 불은 걷잡을 수 없이 번지고, 도성 안의 가옥 1100여 채가 전소되어 최소 32명이 목숨을 잃는 대사건이었다. 그리고 이 사건으로 인해 조선 최초의 소방관청 ‘금화도감’이 설립된 것이다.
금화도감이 내린 방화대책 중 하나는 다음과 같다. ‘청명 3일 전부터 바람이 불지 않는 이른 아침에만 불을 때 음식을 하고, 청명에는 불과 연기가 나는 모든 것을 금한다.’
별을 잃고, 계절을 모르고, 절기를 잊은 시대. 우리는 그만큼 많은 것을 연기처럼 날려버린다. 그리고 언제나 너무 늦게, 그 오랜 경고를 떠올리는 것이다.
분황사의 보리밭
춘분을 넘겨 청명을 앞둔 어느 날, 경주 분황사를 찾은 것은 봄이면 이곳에 청보리를 심는다는 소식 때문이었다. 지금도 옛 신라와 오늘의 어디쯤이 연결된 것만 같은 그 고적한 터에 다시 봄이 돌아온다는 것, 그것은 역시나 신비로운 일이다.
이제 막 고사리손 같은 모습을 드러낸 청보리 싹, 그들이 드넓은 유적지를 자분자분 덮어나가는 계절이다. 마침 현장학습을 나온 학생들과 함께 분황사에 들어서자 그 유명한 분황사 모전석탑(국보)이 방문객들을 반긴다.
신라 석탑 가운데 가장 오래된 이 탑은 찍어낸 벽돌이 아닌, 단단한 안산암을 일일이 깎아 차곡차곡 쌓아 올린 시대의 걸작이다. 비단 공이 많이 들어가서가 아닌, 화려한 기교를 배제한 그 묵직하고도 정직한 흑회색의 아름다움 때문이다. 거대한 탑의 사면을 지키는 인왕상과 사자상은 더할 것도, 뺄 것도 없이 빛나는 석탑의 수호자다.
분황사는 선덕여왕의 치세를 기원하며 세워진 사찰이지만, 그보다 더 특별한 인연은 원효대사와의 인연에 있다.
‘일체유심조’를 깨달은 뒤, 일평생 세상 속에서 민중과 함께 불법을 노래한 해동의 성인. 당대 중국에서는 원효대사의 저서에 부처와 같은 경지에 이른 보살의 것에 붙이는 ‘론(論)’을 더해 칭송했다. 그런 그가 이곳 분황사에서 〈화엄경소〉, 〈사십회향품소〉 등을 집필하고 불법을 펼친 것이다. 그리고 지금껏 그의 사상과 노력은 이 땅의 사람들에게 꺼지지 않는 등불이 되어 어둠 속을 인도한다.
분황사 도량 밖은 드넓은 대지. 보리밭 사이로 오가는 사람들이 쌓아 올린 수많은 돌탑이 하늘을 향해 손을 뻗는다. 오래전 분황사의 곁에 자리했던, 이제는 사라진 저 웅대한 황룡사지의 9층 목탑처럼.
청명은 ‘부지깽이를 꽂아도 싹이 난다’는 생명의 절기. 자연의 생명력이 희망이 아닌 적이 있던가. 지금도 꿋꿋이 서 있는 저 분황사 당간지주에 옛 신라의 사람들처럼 높이 깃발을 세울 수 있다면. 하늘을 덮을 듯 커다란 깃발을 훨훨 날리면 우리의 바람도 그렇게 온 산야에 전해질 것만 같다.
살아오라.
부디 푸르게 다시 살아 돌아오라.
▶한줄 요약
4월은 청명과 함께 문을 연다. 하늘이 맑고, 밝아지기 시작한다는 이 절기에는 열린 하늘 틈으로 일조량이 많아지면서 기온이 오르기 시작한다. 청명은 ‘부지깽이를 꽂아도 싹이 난다’는 생명의 절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