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선일의 불모열전 시즌2] 1. 각심(覺心) 스님

 왜란 땐 僧軍, 종전 후엔 불사 매진한 佛母 부휴 문도로서 의승군 참여 추정 戰火로 쓰러진 사찰 불사에 참여 호남 영서 중심으로 조각승 활동 목우암 목조아미타삼존상 등 조성

2025-03-14     최선일 동북아불교미술연구소장
각심 스님이 1614년에 만든 무안 목우암 목조아미타여래삼존상 ⓒ 동북아불교미술연구소

임진·정유재란(1592~1598) 중 왜구에 의해 파괴된 사찰은 1600년대 초 전각 건립, 불상과 불화 조성 등이 순차적으로 이루어졌다. 이 시기 중심 법당에는 석가여래삼불좌상이나 아미타여래삼존상 등이 봉안되었는데, 이 불상들은 여러 명의 승려 장인들이 공동 작업으로 제작하였다. 이 시기 불상을 주도적으로 만든 조각승은 현진(玄眞) 스님, 원오(元悟, 圓悟) 스님, 수연(守衍) 스님 등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이들 조각승들은 사승 관계와 작업 환경을 밝힐 수 있는 문헌이 발견되지 않아 구체적인 접근이 쉽지 않다. 이에 2000년 이후 연구자들이 불상에서 발견된 발원문(發願文)이나 사적기(寺蹟記) 등에 언급된 단편적인 내용을 중심으로 개별 조각승의 활동과 불상의 양식적 특징을 밝히고 있다. 

현재 1600년부터 1620년까지 전국 사찰 전각에 주독적으로 불상을 제작한 조각승은 석준(釋俊) 스님, 각민(覺敏) 스님, 각심(覺心) 스님, 태전(太顚) 스님, 학문(學文) 스님, 광원(廣圓) 스님, 천진(天眞) 스님, 인일(仁日) 스님, 행사(幸思) 스님 등 여러 명이 알려져 있지만, 수화승으로 만든 불상이 각각 한두 건밖에 조사되지 않아 활동이나 불상 형태의 특징을 밝힐 수 없다.

이후 사찰에 봉안된 불상의 복장 조사가 추가적으로 이루어진다면 17세기 초반에 활동한 조각승들의 활동과 계보가 밝혀질 것이다. 특히 이 시기에 활동한 조각승들이 전쟁이 끝나자마자 불상을 중수하거나 조성한 것을 보면 16세기 후반부터 활동한 스님일 가능성이 있다. 

17세기 초반을 대표하는 무안 목우암 목조아미타여래삼존상은 2021년 국가지정문화유산 승격을 위한 조사 과정에서 본존 바닥에 적힌 조성묵서(造成墨書)가 공개되어 1614년 2월에 각심(覺心) 스님, 응원(應元) 스님, 취명(就明) 스님, 덕현(玄) 스님, 경륜(敬倫) 스님, 인균(印均) 스님, 이환(離幻) 스님이 삼존상(아미타여래, 관음보살, 대세지보살)을 제작했음을 알게 되었다. 내용 중에 조성 사찰이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삼존상의 높이가 180㎝인 중대형으로 암자보다 규모가 큰 사찰의 중심 전각에 봉안되었던 것으로 추정이 가능하다. 이 불상이 봉안된 목우암은 법천사(法泉寺)의 산내 암자로 창건되어 성쇠(盛衰)를 함께 하다가 본사인 법천사가 폐사된 후 그 명맥을 유지하였다.

목우암 목조아미타여래삼존상 제작에 수화승으로 참여한 각심 스님의 생애와 승려 장인이 된 배경은 알 수 없지만, 불상 조성에 참여한 2건의 문헌을 통하여 활동 시기와 조각승 계보를 짐작할 수 있다. 각심 스님은 1605년 10월부터 1606년 3월까지 대략 5개월 동안 수화승 각민(覺敏) 스님과 충남 공주 계룡산 청림사 대웅전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현재 공주 동학사 봉안)과 극락전 아미타여래좌상(소재 미상)을 조성하였다. 그 후 각심 스님은 1614년 2월에 수화승으로 목우암 목조아미타여래삼존상을 응원 스님 등과 제작하였다. 

이런 문헌을 바탕으로 각심 스님은 1570년 전후에 태어나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거치면서 의승군으로 활동하다가 1606년에 수화승 각민이 공주 청림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을 제작할 때 부화승으로 참여하고, 수화승으로 1614년에 무안 목우암 목조아미타여래삼존상을 제작한 것을 보면 당대 최고의 실력을 갖춘 조각승임을 알 수 있다. 특히 선배로 추정되는 각민 스님은 호남과 영서 지방 사찰에 현진 스님, 석준 스님, 원오 스님 등과 불상을 조성한 조각승이다.

각심 스님의 조각승 계보는 석준(1599~1610, 이하 활동기간)·원오(1599~1611)·각민(1605~1614)·각심(1605~1614)·응원(1613~1635)→행사(1606~1648)·휴일(1605~1651)·인균(1614~1655)으로 추정된다. 

각심 스님이 제작한 목우암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높이 186㎝의 중대형 불상으로, 얼굴과 앉은키의 비례가 1:3.4로 인체에 가깝고, 어깨가 넓어 완만한 편이다. 신체는 당당하고 긴 상반신에 비해 하반신이 낮아 안정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 머리 전체에 뾰족한 나발(螺髮)이 붙어 있고, 육계 밑에 은행알 모양의 긴 중간계주(中間珠)가 있지만, 특이하게 정상계주(頂上珠)가 표현되지 않았다. 

얼굴은 길쭉한 편이고, 눈두덩은 두툼하고 눈꼬리가 많이 올라가 있다. 미간에서 급격하게 돌출한 콧대, 날렵한 얇은 입술, 목에 자연스러운 삼도(三道)가 새겨져 있다. 오른손은 어깨까지 올려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따로 제작된 왼손은 엄지와 중지를 맞댄 수인(手印)으로 무릎에 얹었다. 아미타불은 대의 안쪽에 복견의를 입지 않았는데, 이러한 방식은 조선 전기의 아미타불에서 볼 수 있는 요소이다. 

이후 1620년대 이후에 제작된 여래상은 석가여래만 복견의를 입지 않았다. 아미타불은 상체에 대의를 걸쳐 대의 자락이 오른쪽 어깨를 완전히 덮고 팔꿈치까지 완만하게 늘어진 후, 배를 지나 왼쪽 어깨로 넘어간다. 하반신에 걸친 대의자락은 배 밑에서 흘러내린 끝자락이 둥글게 말려 있고, 그 옆으로 짧은 사선을 그리면 옷 주름이 접혀 있다. 그리고 왼쪽 무릎에 가늘고 뾰족한 소매자락이 바닥까지 길게 늘어져 있다. 

목우암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바닥 조성묵서 ⓒ최선일

관음보살상은 높이 184.5㎝, 대세지보살상은 높이 191㎝로, 임진왜란 이전인 15-16세기에 주로 제작된 입상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관음보살의 보관 중앙에 화불(化佛)이 없지만, 조성묵서에 아미타여래, 관음보살, 대세지보살을 제작했다는 기록을 통해 명칭을 알 수 있다. 관음보살입상은 보관 바깥 면에 구름과 화염(火焰)이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고, 정수리에 높이 7.8㎝의 상투[보계(寶)]는 끝부분이 뒤쪽으로 꺾인 형태이다. 보관 밑으로 세선(細線)으로 표현된 보발(寶髮)은 두 귀를 따라 수직으로 내려와 귓불에서 꼬여 어깨 위로 흘러내리고, 어깨에서 두 개의 원을 그린 후 세 가닥으로 늘어져 있다. 길쭉한 얼굴에 볼은 통통하고, 날렵한 눈매과 오뚝한 콧대가 본존과 닮았다. 관음과 대세지보살은 손의 위치가 반대이고, 착의법은 관음보살이 대의식(大衣式)이고, 대세지보살이 천의식(天衣式)으로 차이가 있다.

각심 스님과 가장 관련성을 가진 조각승은 각민 스님으로 보인다. 각민 스님은 1605년에 원오 스님이 완주 위봉사 북암(北庵) 목조보살입상(4구, 현재 익산 관음사와 혜봉원 및 완주 위봉사 봉안)을 조성할 때 금(金)을 시주하고, 1606년에 공주 계룡산 청림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공주 동학사 봉안)과 1614년에 순천 송광사 비로자나불삼존상(한국전쟁 중 소실)을 조성하였다. 

각민 스님이 임진왜란 중에 소실된 순천 송광사 주요 불상을 제작한 것을 보면, 부휴 선수 문도(門徒)에 속한 스님이라 생각된다. 부휴 선수(浮休善修, 1543~1615)는 조선 후기 불교계를 대표하는 고승(高僧)으로, 부휴 문도의 스님들은 여수 흥국사를 중심으로 충무공 이순신 장군 휘하의 수군(水軍)에서 활약하였다. 이들 의승군은 좌수영(영취산 흥국사)-조계산 송광사-지리산 화엄사로 이어지는 지휘 체계를 구축하였다. 그리고 스님들은 전쟁이 끝난 후 순천 송광사를 시작으로 보은 법주사, 김제 금산사, 구례 화엄사, 완주 송광사, 강화 전등사 등의 중창과 중수 불사를 주도하였다. 

최선일 (사)동북아불교미술연구소장은 
홍익대 대학원 미술사학과에서 ‘조선후기 조각승의 활동과 불상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조선후기 조각승 색난과 그 계보’, ‘고양 상운사 목조아미타삼존불좌상과 조각승 진열’을 발표하며 조각승 계보 연구에 매진했다. 저서로는 <조선후기승장인명사전>(2007), <조선후기 조각승과 불상 연구>(2011), <조선후기 조각승 열전>(2018) 등이 있다. 국가유산청 문화유산감정위원을 역임했으며, 현재 동북아불교미술연구소장과 경북·인천 문화유산위원으로 활동 중이다.